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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나의 시론)
동양적 전통시관傳統詩觀에 기대어
정대구 시인
*자성자문-내 시에 대한 회의懷疑와 성찰
내가 시인인가. 아무리 언어를 조탁해도 삼라만상의 반짝거리는 생생한 상형문자를 형용할 수가 있겠는가. 언어에 절망한다. 침묵. 이러고도 내가 시인인가.(자연에 대하여 침묵하는 시가 과연 좋은 시인가)
내가 시인인가. 열심히 쓴다.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누구를 따라한다. 겨우 따라잡을만하면 저들은 또 새로운 시법을 내 놓는다. 저들의 어법으로 길들여진 시쓰기. 이러고도 내가 시인인가.(저들이 만든 잣대에 맞춰 쓰는 시가 과연 좋은 시인가.)
내가 시인인가.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를 쓰는 순간만이라도 시인이어야 할 텐데, 나는 온전히 시에 몰입하지 못하다. 현실에 얽매여 허덕이는 나, 이러고도 내가 시인인가.(오늘에서 날아오를 상상력의 날개를 못 펴는 시가 과연 좋은 시인가.)
내가 시인인가. 어려서부터 이백이나 두보 같은 시인이 되기보다 공자 같은 교육자가 되겠다던 나. 다시 태어나도 미美의 추구에 앞서 교사가 되겠다고 공언하는 나, 이러고도 내가 시인인가.(아는 척 깨달은 척하는 시가 과연 좋은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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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나의 기본생각
*시무정형詩無定形
시는 사람 사람마다 어머니로부터 첫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주변 사람들을 슬피 울게 하는 전 과정이다. 어디 현세뿐이겠는가 전생 후생까지 아우르는 그 무엇, 총체적인 전인적인 소우주요 대우주다. 그러므로 시는 무한대요 무정형이다. 시는 뭐라 정의하는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시는 어느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다. 시공을 초월하는 무한대의 하늘이요 그 자유다.
내가 시를 짓는다는 것은 가장 겸허한 마음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나의 소우주요 무한우주율에 고독한 새 한 마리 띄워 목말라 샘을 파는 그 과정이다.
가을 하늘
구만장천 저 높은 곳에
나의 눈길 가 닿기나 하는지
한량없는 하늘
그저도 가고 있는지
무한천공 그 구멍에
하늘샘 파고 있는
내 영혼 목마른 새 한 마리
*시사무사詩思無邪
시사무사는 논어 위정편에 처음 보인 말인데, 비단 공자시대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시를 보는 잣대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는 무사(無邪·無私) 곧 사특(邪慝·私慝)함이 없는 삶의 진정성이요 진실 정직한 순수한 진리의 세계다. 체험적 삶에 공명하는 공정무사한 순수 영역이다. 뭐니 뭐니 하는 어떤 후천적 제약이나 가식을 뛰어넘는 천의무봉의 자연스러움이다. 쉬운 말로 하자면 ~척하지 않는다. 꾸밈이 없다. 거짓이 없다는 뜻이리라.
옷을 벗을 때
내가 집에 돌아와서
옷을 벗을 때
거리에서 헤어진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도 지금쯤 거리에서 돌아와
옷을 벗으며
먼지와 욕지거리와 의식의 짐을 풀고 있는
나를 생각할까
하루의 진 짐은 무겁
남녀가 돌아와 옷을 벗을 때가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그녀가 알까.
아무도 진실은 모르는 채
벗어도 벗어도 다 벗을 수 없는
오늘도 우리는 옷을 벗는다.
*체험언어
시는 생각하고 일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사람살이의 삶이 살아 있는 생동하는 언어다. 진실한 삶(사유사상 행위행동)의 언어다. 풍경이나 사물 자체의 물질성에 치우친 장식용 언어, 비유를 위한 비유라 할까 어쨌든 그러한 기교만으로 시의 영역을 드나들려한다면 그것은 시에 대한 모욕이다. 시의 일면인 기표성을 빙자한 거짓이다. 시의 우위는 사람냄새 나는 체험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근간 여러 지면에서 시선을 교란시키는 현란한 언어들이 아무리 세련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삶의 진실을 얼마나 담고 있는지.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미적 표현에 있어서 아무리 완벽하다할지라도 진실한 언어라 말할 수 없다.
좀 오래 된 시이긴 하지만 다음에 예시하는 졸시가 부족하나마 어쩌면 시로 쓴 나의 시론일 수도 있겠다.
철산리에 가서
내 누님을 생각하면
나는 맥주나 마셔 가며
어려운 시를 쓸 수가 없다
과수댁이 된 누님
삼양동 막바지에서 주렁주렁
7남매 매달고 살아온 길은
말도 아니고 길도 아니다
지금은 개봉동 너머쪽
서울이 외면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산 221번지에서,
어려운 시를 쓰고 있는 나를
원망하고 있는 우리 누님
날아간 지붕을 고치고
있는 우리 누님
(나는 여기서 막걸리 마시고 별을 보며 시를 썼음)
그러나 이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어렵게 사는 누님을 생각하면
정말 나는 시를
맥주 거품 같은 시를
쉽게만 쓸 수도 없다
*행만리로行萬里路 독만권서讀萬卷書
조선 중기 전업시인 권필權鞸은 그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강화도까지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방구석에 앉아 시만 쥐어짜게 하지 않았다. 물도 긷고 장작도 패고 마당도 쓸고 채마밭도 가꾸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도 잡아오고 헤엄도 치게 했다. 시를 쓰려면 많은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그는 젊은이들에게 행만리로, 독만권서를 권장했다. 행만리로, 많은 여행에서 얻은 직접체험이 시가 된다는 것, 시는 발로 써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독만권서, 많은 독서를 통해 체험을 확장하라는 당부다.
나 같은 경우 그 흔한 해외여행 제대로 못해보고 금세기초 겨우 경남 양산에 오년간 머물면서 영남일대의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면서 시를 얻어 두 권의 시집으로 묶은 바 있다. 다음은 울산 반구대암각화를 직접 보고 쓴 산문시.
무연인가 유연인가-반구대 암각화
하늘에도 깊고 좁은 골짜기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한 조각구름을 타고 낯설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언젠가 내가 살았던 듯 아늑한 어머니의 자궁 속인 듯 포근한 골짜기로 조심조심 들어가 보았다 골 안으론 양수인 듯 미끌미끌한 물이 부드럽게 쓸리며 차 있었고 저것 좀 봐 자궁벽을 뚫고 나온 몇 쌍둥이들처럼 몇 개의 바위들이 물속에서부터 물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는데 그 중 우리가 다다른 한 바위 앞에서 우리는 잠시 구름을 멈춰 세우고 바위 면을 살펴보았다 그렇다 이 바위는 분명 풍화된 옛 비석이었다 거기엔 물고기와 산짐승들 그리고 많은 사냥 도구들과 사람들이 290여 개의 글자처럼 새겨져 있었는데 거기 놀랍게도 아래턱이 뾰족한 내 얼굴도 있었다 알겠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전생의 고향을 찾아온 듯 그렇게 처음부터 이 골짜기가 낯설지 않았던 이유 이제야 알겠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내 얼굴을 쌍둥이처럼 사진처럼 저렇게 꼭 닮게 그렸을까 화가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틀림없이 자기 솜씨 같다는 것이다 저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쯤 그녀와 내가 이 골짜기에 태어나 오뉘처럼 혹은 부부처럼 부녀지간처럼 동거하면서(그땐 그런 시대였다) 내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사냥해 오면 그녀가 그것을 받아 요리도 하며 나와 물고기 혹은 산짐승들과 사냥 도구를 그렸다는 것이다 무사고 안전을 비는 주술적 의미와 고마운 마음까지 담아서 한 획 한 획 심혈을 다해 새겨 넣느라 손바닥에 어혈이 묻어났다는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그녀는 손바닥에 그때의 혈흔을 고스란히 손금으로 쥐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나는 새삼스레 그녀의 손바닥에 나의 손바닥을 지긋이 포개 보았다 그녀의 아픔이 부르르 떨면서 내 몸을 통과한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타고 들어왔던 구름 마차는 사라지고 어느 새 그녀의 빨간 색 아토즈에 몸을 싣고 우리는 수천 년 전 선사시대의 아득한 시간을 훌쩍 빠져 나와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신불산 온천단지 쪽으로 달려간다 그녀가 말했다 꿈인가요 생시인가요 한바탕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어요 꿈이었어요 오늘 이 순간 훗날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멋진 꿈을 만들어요 우리,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이 타임머신을 타고 후천 세계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이날 나를 자신의 빨간 아토즈에 태워 동행했던 젊은 배정희 시인은 뒷날「시가 된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밝혔다.
놀랍다. 나는 그저 따가운 여름볕 아래 오래된 벽화를 바라보았을 뿐인데, 거기에 고래가 있는지 사슴이 있는지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저 석면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는 잠시 바라보았던 벽화 앞에서 꿈을 꾸었다. 울산에서 선생 노릇을 하며 시를 쓴다고 까불어대는 나에게 그는 시를 쓰기 위해선 매 순간 대하는 사물에 감정이입하고, 변형하고 파괴하고 새로이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피부이식 수술로 내 손바닥에서 사라진 까만 점. 그것을 그는 어혈로, 혈흔으로, 상처의 자국으로 형상화하였다. 나는 쓰지 못한 나의 상처. 그가 대신 쓴 나의 상처를 읽으며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유연인가 무연인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스토리텔링 양산에선, p.215)
*가이흥可以興 가이군可以群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말. 공자는 사가시론四可詩論을 폈다. 가이관 가이흥 가이군 가이원이 그것이다. 가이관可以觀은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뜻으로 남이 못 보는 것까지 볼 줄 아는 사람이 시인이다. 이점 요즘 젊은 시인들이 놀랍게 잘하는 부분이다. 가이원可以怨은 사회비판의식을 말하는 것일 터이고 가이흥 가이군은 시가 사람을 신나게, 삶을 활기 있게 만들어주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며 소통하고 화합하는 사회적 책무와 역할일 터이다. 헌데 근간 젊은 시인들의 시는 신나고 활기 있기는커녕, 더불어 함께하기는커녕 우울 유폐 잔혹 나약 왜소가 대세다. 그리고 그 결과 난해하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제발 나만의 기우이기를...
한자의 詩(시)는 言(언)과 寺(사)의 합성어로서 言은 언어적 표현기술을 뜻하는 것일 거고 寺(절사·관청시)는 절의 교화적 감화적 역할(서양에서도 lyric서정시는 감화적 역할을 했다), 관官의 지도적 사회적 역할을 함의하고 있다. 흔히 시는 문학이고 문학은 예술의 한 장르라고 하지만 과연 무학이 예술인가. 예술장르인 음악音樂의 樂이 즐거움(락樂), 미술美術의 術이 기술(art術)인 것과는 달리 문학文學literature은 學(학문)의 개념이 우선한다. 따라서 음악하는 사람, 미술하는 사람을 소리꾼, 그림쟁이라 비하했던 반면 문학하는 사람은 단순한 예술가라기보다는 격이 다른 학자 지식인 교양인 교육자 지도층으로 우대를 받아온 전통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있어왔다. 말하자면 문학도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짚고 넘어서는 예술작업이 틀림없지만, 문학은 예술 이상,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인 무엇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헌데, 언제부턴가 문학하는 사람이 글쟁이로 격하되고 詩가 言(표현기술)에 치우쳐 상대적으로 寺(사·시)의 교화적 사회적 기능은 약화되어 겉만 눈이 부시게 현란했지 속은 허망하게도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내용 없는 껍데기, 여기서 독자들은 속았다며 시집을 멀리 내던지지 않을까. 이 또한 나만의 기우이기를...
아래 예시는 어느 미망인의 아픔을 달래고 더불어 외로움을 나누어 그녀의 슬픔을 날려버리고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썼다고나 할까.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치유의 목적의식을 갖고 쓰지는 않았다. 쓰다보니까 시가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는 얘기다.
열망 1
-그녀의 하늘
그 여자 울면서 나에게 왔네
비 오는 날이면 날마다
후줄근히 비를 맞고 나에게 와서
하늘을 달라 하네
하늘을 내놓아라 하네
하늘이 되어달라 하네
이제야 알겠네 그 여자
왜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지
비 오는 날만 골라서
왜 죄를 짓고 싶어 하는지 그 여자
이고 덮고 살아야 할
하늘을 잃었기 때문이네
비 오는 날이면 하늘이 없어지고
하늘을 찾아내라 나에게 와서
생떼를 부리는 거라네
비 오는 날이면 날마다 나는
그 여자의 하늘이 되어
둥개둥개 그녀를 달래야 하네
오늘도 비는 내리고 울며
그 여자 내 앞에 와 서 있네
그 여자 하늘에 안기듯
나에게 안기네
§근간 현대시의 문제점
*불락언전不落言詮 불섭이로不涉理路
말의 그물에 떨어지지 말고 이론에 발목 잡히지 말라는 뜻으로 송나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 나오는 말이지만 현대시창작에도 꼭 새겨둬야 할 말인 듯싶다.
근간 여러 지면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잘 쓴 시도 참 많구나 부러워하면서 기발한 상상력, 미세한 미적표현이 상당한 수준에 와 있어 우리 시도 많이 발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완벽하고 미적으로 현란하게 표현된 시편일지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표현주의 언전言詮에 걸리고 난삽한 이론에 구속되어 시가 왜소해 지고 어떤 경우 시가 죽은 사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해, 그 현란한 표현들이 헛되고 헛되다는 허망한 느낌마저 들 때가 많다. 기교에 치우친 시들은 아무리 잘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시’로 오래 남을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서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절망을 낳는다는 이상의 명언이 현실이 되어 나는 이 기교 앞에 절망한다. 이제 우리는 이 절망에 그대로 무릎 꿇을 것인가 아니면 본래 시가 추구하는 더 높은 무엇을 향해 이 절망을 돌파해 나갈 것인가. 당연히 우리는 절망을 딛고 표현기법에서 거둔 일정부분 지금의 성과까지를 모아 보다 높은 차원의 진로를 모색해야 하겠지만 이에 앞서 여기서는 시가 이렇게까지 내용 없는 형식위주, 방법위주, 기교위주를 불러온 연유부터 규명해 봐야겠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짚어볼 수 있겠지만 예컨대 1920년대 감상적 상징주의 관념시나 내용위주의 경향파에 반하여 30년대에 형식위주 모던이즘 계열의 시문학을 불러왔듯이 20세기 중후반대에 이념시 민중시 노동시 참여시 같은 제종 무거운 주제를 넘어서 금세기초 미래파 혐오시 잔혹시 같은 형식위주의 기교시가 범람하는 것은 형식과 내용의 상호순차교환주기율에 따른 현상이라 치고 또 다른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심하게 시를 갈기갈기 쪼개어 분석하고 시말 비틀기식 작시법으로 시를 교육하는 각 대학 문창과에 일정부분 그 책임이 있다고 봐야겠다. 사실 문창과에서 가르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작시방법에 치우칠 수밖에, 무엇을 더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용이 결한 시가 형식에 치우쳐 결론적으로 같은 틀로 찍어낸 이 옷이 그 옷 같고 그 옷이 이 옷 같은 몰개성의 틀박이 시인들이 양산되는 게 오늘의 현실이 아닌지 그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송나라 원오극근圓悟克勤의 벽암록에 나온 유명한 공안公案이다. 알에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오는 과정이다. 어미닭이 알을 품은 지 약 20일이 지나면 알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삐약 삐약' 소리와 함께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는 신호를 내보낸다. 이때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기다려온 어미닭이 안에서 병아리가 빠는 그 부위를 밖에서 조심스레 쪼아 준다. 그리하여 병아리는 비로소 어둠을 깨고 세상 밖으로 빛을 향해 나오게 된다(병아리가 안에서 빠는 것을 줄啐 이라 하고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안과 밖의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 다는 것이다. 이 동시성이 ‘줄탁동시’, 만약에 알 속에서 나올 때가 덜 된 병아리가 세상보기를 서두른다든가 어미닭이 병아리를 빨리 보고 싶어 알 속 병아리 자체의 노력(啐) 없는 상태에서 탁啄을 서두른다면 어찌 되겠는가. 설사 생명을 얻어 밖으로 나온다 해도 그 병아리는 쉬 병이 들어 죽거나, 건강한 닭으로 성장할 수 없다.
시창작도 이와 마찬가지. 때를 기다려야 한다. 술도 오래 괴야 술맛이 나고 씨도 땅에 묻어 일정기간이 지나야 싹이 튼다. 꾸준히 내공內供·內功을 쌓으며 시의 씨를 받을 수 있는 몸을 만들어 시의 씨를 앉히고 기다려야지. 시의 싹이 트기도 전에 성급하게 시를 끄집어내보라. 그 설익은 시가 시인가. 활자공해만 일으킬 뿐 그런 것은 오래가지 못해 잘해야 종이폐품공장으로 실려 나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시는 주체자아와 객체사물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시는 직선의 두 끝인 자아주체(a)와 대상객체(b)를 구부려 a와 b가 동시에 하나로 만나 알과 같은 원이 되는 경계에서 안(주체)과 밖(객체)의 행위나 정서가 부합 합일되어 비로소 주객일체, 정육불이精肉不二의 생명력을 얻는 줄탁동시의 산물인 원융무애의 세계다. 곧 시는 자아의 타자화, 타자의 자아화가 동시에 이루어내는 내외불이內外不二, 자타동시율自他同時律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잘 익은 시 하 편을 맛볼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장기짝과 바둑알
내가 시를 쓸 때 시말을 운용함에 있어 용도에 제한 받는 장기짝과는 달리 하나하나 똑같은 일대일의 자격으로 어떤 규제도 제약도 없는 바둑알 같이 자유롭게 시말을 부리고자 한다. 모든 시말 하나하나가 완전 평등, 완전 개방, 완전 자유다. 다만 시를 쓴다고 해서 시적인 말을 따로 골라 쓰는 게 아니고 일상의 말들을 데려와 적재적소에 시말로 부려서 일상의 현실을 시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작업이 나의 고민일 뿐, 내가 시말을 부려 시를 쓰는 자유는 어떤 경향이나 체제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 간섭 받지 않고 제한 받지 않는 자유,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요 공간이다. 그만큼 시말 하나하나의 부림은 나에게 책임 지워진 나만의 독창적인 창조행위다. 마치 바둑판 안에 바둑알을 놓는 부지기수의 무제한적 수가 있듯이. 그래서 시 쓰기는 온몸으로 더 혼자고 더 외롭고 더 괴롭고 더 큰 집중이 필요하다. 그만큼 쉽지 않다. 여기서 시 쓰기의 어려움을 피력한, 전에 써 두었던 구고를 덧붙여 이글을 마무리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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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를 쓸 때는
내가 생각한 것, 내가 쓰고자 하는 것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얼기설기 얽혀서 자리 잡을 수 없는 것, 가슴이 미어질 듯 뿌듯한 혼돈의 세계를 어떻게 풀어 쉽게 표현해 내나? 거짓되지 않게, 본래의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율동을 붙일 수 있을까? 시를 쓸 때마다 항상 내가 부딪치는 기본적인 두 개의 질문이다. 그러나 대번에 쉽게 써지는 경우는 드물다. 우선 가슴 속에서 곰삭혀 농익힌 뒤에 붓을 들지만 처음에 내보인 얼굴은 무명상태 너무 어려워 알아보기 힘들다. 시가 어려울수록 나의 본래의 심상과는 다른 설익은 시로만 생각되어 몇 번이고 고쳐 써서 시를 쉽게 만들도록 고심한다.(적어도 나는 요즘 유행처럼 시말을 일부러 비틀어 어렵게 쓰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첨예한 시대, 첨예한 사회, 첨예한 논리에 얽매여 있다. 첨단과학화, 첨단화된 사회에서 나의 의식세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복잡한 회로처럼 어렵게 얽혀있다. 그러니까 현대시는 어려운 것이 정상이라지만 시는 논리를 뛰어 넘는 곳에 있다. 복잡다단한 사회구조 속에서 정서의 다단화多端化는 피할 수 없는 문명인의 삶의 논리라지만 사람이 기계를 낳고 문명을 낳고 논리를 낳는 것이지 사람이 논리의 지배, 기계의 지배, 문명의 지배하에 놓이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대서야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우리는 어서 이 논리의 미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논리의 기계에서 우리 시인이 담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가. 인간 본연의 정서회복, 단순화로의 지향(복잡화, 난해가 대세라지만 난 동의할 수 없다.) 우선 이런 것들이 시급한 과제가 아닐는지.
서양적인 물질문명이 낳은 현대의 위기는 솔직 담백한 동양적인 정신주의로 치유 극복 구제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물질적 부정부패 부조리 불신 정신적인 불안 분열 불협화 불법비리 비겁 소아병적 비소 왜소 자폐 자만 소멸 파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누구나 없이 현대인의 삶의 양식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참으로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각자 심각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누구보다 먼저 시인은 불화 불통 파멸 자폐 자만 말초적 감각 난삽한 관념 논리 불안한 감정 노출 불쾌 등을 극복하고 정신적 관용 관대 겸양 화합 평화 화친 친구 친밀 생성 성장 자유 진리 양심 사랑 소통 웃음 쾌감 아름다운 심성을 개발하여 마비된 현대인을 치유 개혁하는 향방으로 자신의 의식세계를 끝없이 점검하고 새롭게 혁신시켜야 한다. 나부터 먼저.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획일주의 도식화 경색화 자기모방을 엄격하게 배제하고 지양하여 시의 다양화 활성화 생명화를 우리는 꿈꾸어야 한다. 내가 원고지 한 장을 앞에 놓고 갖는 마음가짐이 이렇다.
돌이켜 보건대 인간은 윤택하고 편리하게 살기 위하여 과학문명을 낳았다. 첨단화된 기계를 낳고 수많은 이론과 체계를 세웠고 철학과 종교를 심화시켜 왔다. 그러나 어떤가. 궁극적으로 지금 인류는 행복한가. 어리석게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고 자신들이 세운 이론과 체계에 얽매이고 자신들의 그 잘난 사상 종교로 하여 대립과 갈등 분열을 자초하고 있지 않은가. 무시무시한 핵공포, 가공할 생화학전, 나날이 심각하게 목을 조여 오는 도시의 각종 공해, 온난화, 화폐만능, 인간성의 상실…… 인간은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적어도 한쪽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이와 같은 나의 견해는 삐딱한 시각일까. 나의 염려는 지나친 소심증의 기우일까.
문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파악된다. 지금 문학(시)은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허울 좋은 실험정신을 가장한 편협한 자의식의 세계, 글자놀음의 마술 아니면 전통의 미명 아래 낡은 도식의 답습 이런 악재들이 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문학(시)의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 삶의 진실한 추구, 아름다운 인간성의 회복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대시는 근본(인간)을 떠나 있다. 뿌리를 망각하고 있다. 인간성의 회복은커녕 인간성의 상실 인간성정의 파멸 삶의 부재로 추락하고 있다. 문학은 시대의 반영일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 나가야 한다. 이 현대병(문명병)을 그대로 방치해서 인간의 종말을 지켜만 볼 것인가.
다양성과 복잡성은 다르다. 터질 듯이 복잡한 현상일수록 이를 단순화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여 얽힌 매듭을 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반합의 원리로 통합된 전인적 자유, 통일, 균형을 갖춘 인간성을 되찾아야 한다. 시류와 너무 동떨어진 엉뚱하고 소박한 옹고집일지 모르지만 그리고 바위에 계란치기 같은 무모한 행동일지 모르지만 나는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절로 이런 생각들이 기본에 깔려 있음을 밝힌다.(1990. 8)
첫댓글 예전에 화성문협 바다시인학교에서 뵌 적이 있는 시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의 마음을 정교하게 집어 놓은 듯 가슴에 딱딱 와 닿습니다.
시쓰기에 대한 자세와 시에 대한 자유 못지 않게 책임도 강조되고 있고요.
두고 두고 정신의 양식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몇번에 나누어서라도 뜸뜸히 구석구석 음미하며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읽으면서 순간
나도 이런 이론을 적어본다면
내 시의 영역 표시가 뚜렷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멀지않은 화성에 살고 계시니까
기회 봐서 한번 다녀오려고 해요.
생각이 있는 샘들은 함께 가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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