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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태극종주는 성삼재~천왕봉을 잇는 주능선에 서북과 동남으로 능선을 이어 태극(S) 문양을 이루는 코스를 말한다.‘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원리에 따라 덕두산부터 웅석봉까지의 마루금을 연결했으며, 평균 고도가 1000미터가 넘는다. 서북쪽으로는 구인월 남천에 닿고, 동남쪽으로는 웅석봉까지 온 후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 경호강, 덕천강, 남강, 진양호로 이어진다. 흔히, 지리산 태극종주 구간은 천왕봉을 중심으로 놓고 북쪽 방향인 구인월~성삼재를 서북능선, 성삼재~천왕봉을 주능선, 천왕봉~동남쪽 끝까지를 동남능선으로 구분한다. 이번에 가야 할 1구간은 구인월~성삼재까지로 거리는 약 23km에 달한다. 구간을 세분해 보면 구인월~바래봉 5km, 바래봉~정령치 10km, 정령치 ~ 만복대 2.2km, 만복대~성삼재 5.4km 거리다, 무리하지 않고 걸으면 11시간쯤 걸리겠다. 짧은 산행만 하던 몸이 종주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래 전 산‘지리산’이란 책의 서북능선 편을 펴 든다. 만복대, 한번쯤 나뒹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는 초원, 만복대~묘봉치 꿈결 같은 억새밭, 정령치/팔랑치/성삼재 등 지명에 서린 마한의 전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바래봉 철쭉, 전망 좋은 봉우리 세걸산…. 제목만으로도 풍경이 짐작이 가는 명소가 도처에 있다. 마음이‘갔으면 좋겠다.’에서 ‘꼭 가자’로 바뀐다.
< 희망사항 >
지리산 서북능선은 재야의 유생 같은 산이라 한다. 주류에서 벗어나 존재하되 구성의 바탕이요, 차갑고 매서운 북서풍으로부터 지리의 속살을 보호해 주려는 듯 의연하게 뻗어 내린 능선이다. 후미진 곳에서 묵묵히 제 일 다하는 조직의 근간 이미지가 떠올려진다. 흔히 지리산 서북능선 산행을 논할 때, 가을 억새가 필 무렵에는 정령치에서 성삼재로 8km 만추 산행을, 바래봉 철쭉이 필 무렵에는 정령치에서 운봉으로 철쭉산행을 하라고 권한다. 바래봉 철쭉은 5월 중순부터 말까지가 한창때다. 때를 잘 맞춘 산행이다. 기대가 크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쾌청하고 활동하기 좋은 날씨, 흐드러지게 피어 나는 꽃, 하루가 다르게 잎이 무성해지는 나무, 덩달아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의 표정도 밝아진다. 만물에 생기가 도는 계절이다. 비록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도 이 황금계절 자연의 나눔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누구 말대로, ‘아! 즐겨’야겠다. 이번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래봉 철쭉이다. 철쭉은 꽃과 잎이 동시에 나온다. 기존의 봄이 색의 일방적 독주였다면 철쭉은 꽃과 잎의 조화로 승부한다. 꽃 자체로도 매력적인데다 연둣빛 산록의 후광까지 입으니 철쭉 군락지는 색의 향연장이다. 흔히 철쭉은 봄과 여름을 잇는 가교라 한다. 철쭉이 지는 걸 신호로 계절은 늦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든다. 긴 지리 능선을 다시 걸으며, 그 풀꽃향기 그윽한 봄 햇살 아래 서고 싶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남원 인월 가는 길에 >
일행이 6명으로 늘었다. 먼 길에 동무는 천군만마다. 계란빵을 몇 개 더 준비한다. 금요일 늦은 밤, 집을 나선다. 버스 차창으로 이우는 보름달이 보인다. 정신 없이 살다 보니 달이 뜨는지 지는 지도 모르며 살았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은 곧 천국이었다. 둥근 달이 옅은 구름 사이를 흘러간다. 모처럼 보는 맑은 밤하늘이다. 날씨 기대가 커진다. 양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까막바위님과 조우했다. 함께 같으면 하는 마음과는 달리 덕유산으로 간단다. 아쉬웠다. 버스에 오른다. 6명이 합체된다. 아이넷님과 동무가 되어 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 구인월에서 바래봉 >
함양에서 잠시 쉬고 들머리에 다가선다. 평소답지 않게 허둥대다 안경을 떨어뜨린 걸 모르고 찾느라 요란을 떨더니, 들목에서 출발하려고 하니 핸드폰을 차에 두고 내렸다. 무언가에 홀린 느낌이다. 익숙지 않은 새벽 상황과 부족한 잠에 정신이 몽롱해지며 당황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시작 고도는 450m, 비고 700을 이겨야 한다. 구인월 월평 마을을 가로지른다. 달의 기운으로 사방이 분간된다.‘달아 노피곰 돋아사 ~~ 비취오시라.’로 시작하는 옛 노래를 흥얼거린다.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후미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가사의 한 구절이 지금 떠오르는 이유를. 먼 기억이 비릿한 새벽 냄새 속에서 번져간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충만하다. 아이넷님은 성삼재까지의 서북능선 종주를 기대하고, 나머지는 조심스럽게 정령치까지를 마음에 두고 간다. 난 겉으론 일단 유보 그러나 마음은 정령치 쪽으로 기운다. 아카님과 함께 후미로 간다. 오르막만 만나면 걸음이 쳐진다. 아무래도 함께 성삼재까지는 무리일 것 같다. 상황이 목적지를 결정하리라 믿고, 편한 마음으로 나아간다. 다행히 오르막이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어두운 숲에서 걷는 행위는 사고의 일부를 무디게 한다. 뵈는 게 적으니 높이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진다. 5시가 지난다. 사위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잠시 쉬어가는 사이 날이 밝아온다. 이우는 달은 여전히 서녘 높은 곳에 떠 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지만 농밀한 숲이 허락하지 않는다. 개활지를 찾아 조금만 더 높이높이 하다가 날이 훤하게 밝아버렸다. 대신 동녘이 밝아온다. 먼 산 검은 실루엣 뒤로 주홍색 태양이 떠오른다. 조금 더 일찍 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들여 마시는 숨에 시원한 공기가 느껴진다. 덕두봉 오름에서 오늘의 태양을 맞는 기분이 상쾌했다. 산과 숲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일찍 길을 나선 마음이 벅차 오른다. 밤을 뚫고 길을 나선 보람은 컸다.
< 일출과 덕두산의 아침 풍경 > 출발 2시간 만에 첫 목적지 덕두산에 오른다. 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정표엔 봉으로 표기돼 있다. 바람님이 주신 포도를 먹고 기운을 차린다. 철쭉의 분홍 꽃망울이 하나 둘 보인다. 산죽 길을 따라 바래봉으로 향한다. 산정에 오르자 공기가 틀려진다. 맑은 대기의 기운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청량한 느낌이 참 좋다. 여유로운 마음이 길과 하늘에 묻어난다. 태양의 그늘진 지역으로는 산들의 검은 실루엣들이 도열해 흘러간다. (바래봉 정상에서의 일출이 못내 아쉬워 같은 날 우리와 동일 구간을 산행한 산악회 카페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다 몇 장 퍼온다. 역기 사진 고수들은 다르다.)
< 아름다운산행에서 퍼 온 사진(바래본 정상 일출) > |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아! 하는 함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광활한 고원 위로 울긋불긋 꽃과 지난 겨울의 잔재 억새, 그리고 신록이 앙상블을 이룬 풍경이 펼쳐진다. 막혔던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다. 반대편으론 운봉평야가 옅은 아침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풍요로운 남원 땅이 멀리까지 조망된다. 이 땅을, 이 아침을, 이 풍경을 그리고 이 감동을 함께 하는 동지들에게 감사한다.
< 깨어나는 운봉 평야 / 바래봉 초원지대 원경 >
나무 데크 위에 올라선다. 가르마 같은 목책이 양분하는 초원이 넓게 펼쳐지고 그 넘어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인다. 초원만 있는 풍경보다 그 속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공존을 말 없이 한참 동안 바라본다. 이 고원이 한 때 호주에서 들여 온 양을 방목하기 위해 조성된 목초지였다는 사실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너른 대지의 풍요로움에 감사할 따름이다.
바래봉 정상에 선다. 스님의 식기 공양바리때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답게 펑퍼짐하다. 산정에 위치한 고원을 바라보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온다. 그 존재가 고마울 따름이다. 6명이 바래봉 정상에 도열한다. 주위에 있는 분에게 사진 부탁을 하려는데 낯이 익다. 한때 대간 동기였던 풀향기님이다. 반가웠다. 커다란 카메라 메고도 무척 산을 잘 타, 놀라움의 대상이었던 분이다. 잠시 서로의 옛 기억을 들추어 낸다. 인연이란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철쭉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자리를 뜬 바람님, 해운님, 산거북님이 초원 한 가운데를 노니는 모습이 멀기서 목격된다. 카메라 렌즈를 당겨본다. 팔랑골 위로 치솟은 산줄기의 녹음이 병풍이 되어 주고 그 밑으로 평원이 이어진다. 세 분이 초원의 주인이 되게 프레임을 구성한다. 구도가 멋지다. 아마도 오늘의 베스트 사진이 될 것 같다. 먼 풍경에 약한 연무가 감지되지만 그건 내 똑딱이의 한계다. 그래도 사진이 내 눈이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제대로 담아 주기를 바래본다.
< 바래봉에서 / 초원의 주인들 >
서둘러 나도 그 초원 속으로 몸을 섞는다. 내려 가면서도 하도 감동적인 풍경이 많아 카메라는 잠시도 쉬게 하지 않는다. 오늘 산행기는 글이 아닌 사진으로 써야겠다.
< 바래봉에서 세걸산 >
아이넷님과 아카님이 초원을 내려오는 모습이 멋지다. 아카님이 꽃 속에 파묻힌다. 최고의 모델이다. 아침 볕에 선글라스가 빛난다. 온갖 포즈를 취하며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평원 길, 공지선이 만나는 지점에 일행들이 도열해 있다. 얼른 순간을 포착한다. 자연과 동화된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오래 기억될 추억들이 만들어진다. 오늘 아침은 매 순간이 감동, 또 감격한다. 이름하여 ‘바래봉에서 찬란한 아침을 맞다.’
< 바라봉에서 찬란한 아침을 맞다 >
데크 전망대를 내려선다. 고운
나무 계단 길이 이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멋진 나무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마치 VIP를 위한 산정 나무 카펫을 연상시킨다. 그 멋진 길을 바람님과 산거북님이 내려가고 있다. 모습을 담는다. 얼굴에 그분들의 마음이 투영되고 있다. 환한 미소가 멋들어지다. 데크 위에 선 해운님, 아이넷님,
아카님의 실루엣을 잡아본다. 오늘은 멋진 사진이 풍년이다.
07:05, 바래샘을 지난다. 물 맛이 시원하다. 시원한 물까지 샘 솟은 곳, 바래봉은 복 받은 곳이다. 이제 바래봉과 이별한다. 누런 황톳길을 따라 걷는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길 도처에 커다란 삼각대가 놓여 있다, 오가는 이들 목에는 하나 같이 값 비싼 사진기가 메어져 있다. 주변에 좋은 풍경이 있나 보다. 아마도 운봉 평야의 아침과 먼 철쭉 군락이 그들의 타킷인가 보다. 운봉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서 우리도 단체사진을 한 장 찍는다. 전문가의 손길을 기대해 본다.
< 철쭉 동산에서 >
시간을 잃어버렸다. 굳이 현재 시간을 알고 싶지도 않다. 꽃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뒹군다 한 말이 딱 맞다. 무리 지어 꽃 구경하고 연신 그 모습을 마음과 사진에 담고…. 신선이 따로 없다. 한산하던 길에 사람들이 몰린다. 출발지는 달라도 목적지는 하나같이 바래봉이다. 모두 그 속에 섞여 감동을 공유한다. 바래봉 일대의 철쭉은 도심에 인공으로 가꾼 그것과 많이 달랐다. 우선 잎이 크고 생기가 돋아 색이 선명한 게 특징이다. 멀리 팔랑치 방향으로도 군락이 목격된다. 가야 할 길에 대한 희망이 솟는다.
작은 언덕을 내려선다. 양지 바른 잔디 위에서 걸음을 멈춘다. 작은 식당이 차려진다. 유부초밥, 김밥, 계란, 계란빵, 닭강정, 떡 등에 맥주와 막걸리가 합쳐져 풍성한 식탁이 만들어진다. 역시 해운님과 아카님이 오시니 맛 난 음식이 풍년이다. 시원한 맥주가 목에 청량감을 준다. 아이넷님이 얼려 온 막걸리도 제 맛이다. 웃고 떠들고, 주거니 받거니, 모처럼 산에서 포식을 한다. 이 순간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길을 나서질 잘 했다. 동행이 있는 산행의 풍요로움에 감사한다.
팔랑치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인파가 조금 뜸해진다. 멀리 철쭉의 군락이 목격되고 저절로 그리로 발길이 옮겨진다. 팔랑치의 철쭉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길 자체가 풍성한 철쭉 밭이다. 공원 산책 가듯 데크 길로 올라선다. 바래봉까지는 1.5km 라 한다. 바래봉이 고원 지형에 넓게 흩어져 핀 꽃이 인상적이라면 팔랑치의 철쭉은 농밀한 군락이 특징이다. 무리 지어 핀 분홍의 화원은 요염한 몸짓 그 자체였다. 그 규모와 화려한 색에 취한다. 바래봉과 팔랑치 일대의 철쭉은 목초지에 형성된 것으로 세석고원에 피는 은은하고 화사한 빛깔의 천연 고산 철쭉은 아니지만 고운 붉은 빛깔만은 천하제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분홍에 흠뻑 취한다.
< 팔랑치의 철쭉 속에서 >
1123봉 헬기장에 올라선다. 사방이 확 트인 개방감이 시원하다. 멀리 산거북님과 바람님이 앞서 간다. 든든한 두 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1123봉을 지나면 철쭉동산도 끝이라 했지만 내려서는 길에도 분홍 꽃이 만발해 있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듬성듬성 무리 지어 핀 꽃을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언덕을 내려서자 마지막 철쭉 군락이 나타난다. 산거북님과 아카님이 편한 등로를 버리고 능선을 타고 넘어 온다. 만개한 꽃밭에 그들이 들어서는 모습을 담는다.
08:50, 작은 동산에 올라선다. 지나온 팔랑치와 바래봉이 멀리 보인다. 이제는 철쭉군락과는 이별이다. 바래봉에서 약 2.5km 천상의 화원에서 호강했다. 아름다운 자연에 감사한다.
< 마지막 철쭉동산에서 >
어느 순간부터 길이 황량해진다. 꽃 대신 산죽이 호위하는 숲이 이어진다. 흥겨운 잔치는 끝이 나고 순간적으로 공허함이 밀려드는 느낌이다. 09:11. 부운치를 지난다. 뜬 구름이라는 이름과 평범한 고개다. 인적이 드물어진다. 호젓한 숲 길을 걷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이후 세동치까지의 2.1km는 무척 지겨운 등로였다. 우선 풍경 없이 반복되는 숲 길에 쉬이 지친다. 한 시간 넘게 걸었지만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걸 보면 인상적인 풍경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그저 묵묵히 걸었을 뿐이다. 일행들이 흩어진다. 선두는 앞서 가고 아카님과 뒤쳐져 걷는다. 걸음에도 동조 현상이 있나 보다. 속도가 아카님에 맞춰진다. 오랜만에 산에 왔으니 오죽 힘겹겠는가? 그래도 포기란 없다. 서로가 동행이 되어 준다.
작은 오르내림의 반복이 끝 없이 되풀이 된다. 맥이 풀릴 즈음 세동치에 닿는다. 부운치에서 2.1km 거리를 70분 넘게 걸었다. 생각과 다르게 속도가 영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제 날까지 더워진다. 지리산 특유의 ‘지리한’ 능선이 끝 없이 이어진다. 무념무상으로 걷는다. 세걸산까지는 0.5km 그리 멀지 않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성삼재와 정령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산객과의 조우가 잦아진다. 처음엔 반가웠으나 좁은 소로에 엉겨 붙는 사람들이 점점 혐오스런 존재로 나가왔다. 세동치~세걸산 0.5km를 걷는데 40분 넘게 걸렸다. 고도표상 완만하게 이어지는 높낮이는 시각의 오류였다. 넓게 펼쳐 놓고 보면 평탄해 보이는 직선 사이에 무수히 많은 작은 오르내림이 존재했고, 기대와는 다른 길 상황에 쉬이 지쳐갔다. 길가에 핀, 평소 같으면 시선이 오래 머물 ‘바람난 여인’ 얼레지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카님에게 농을 해도 반응이 없다. 인간은 몸이 힘들면 마음에도 여유가 사라지나 보다.
10:48, 세걸산에 도착했다. 힘들게 도착한 세걸산은 기대와는 달리 밋밋했고 조망도 화려하지는 않았다. 고도는 1216m 꽤 높다. 오랜 만에 사진기를 꺼낸다. 단체 사진을 찍고는 이내 길을 나선다. 날머리 정령치까지는 3.8km다. 최소한 2시간은 가야 할 게다.
< 길가에 핀 얼레지 / 세걸산에서 >
< 세걸산에서 정령치 >
피로가 몰려오고, 간간이 나타나는 작은 바위지대도 속도를 늦춘다. 어느 순간부터 반대방향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체 산꾼들과의 만남은 가뜩이나 좁은 길에서 짜증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양보란 쉽지 않다. 팔도 사투리가 다 들린다. 바래봉 철쭉을 기대하며 길을 나섰을 게다. 인파에 제대로 꽃 구경이 가능 할지…. 부딪기며 내 길을 간다. 길섶의 조릿대가 제 설 곳 모르고 탐방로까지 웃자란 탓에 폭 좁은 외길, 걸음에 속도가 영 나지 않는다. 간간이 바라본 하늘 밑에 솟은 반야봉의 뒤태를 바라보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12:08 정령치가 2km 남았다는 이정표와 마주친다. 세걸산에서 고작 1.8km 거리를 오는데 무려 80분이 소요되었다. 오면서 온전한 평지 길은 없었으니 힘겨움이 배가 되었다. 당초 너무 일찍 정령치에 도착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쑥 들어가 버렸다. 아이넷님 입에서도 이제 성삼재란 단어는 사라졌다.
다행인 건 길이 조금씩 넓어지고 좌측으로 지리 주능선의 전망이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반야봉이 높다랗게 솟아 있고 멀리 천왕봉도 선명하다. 쏟아지는 햇살을 안고 묵묵히 흐르는 지리산이 우람하게 다가온다. 지리는 큰 산이다.
여전히 높낮이가 반복된다. 선두가 후미를 기다려준다. 남은 음식을 나눈다. 과일, 빵, 강정 등 많이들 준비해 오셨다. 찬물에 탄 커피까지 얻어 먹고 나니 힘이 좀 난다. 이제 큰고리봉이 멀지 않았으리라. 한 굽이 오름을 치고 오른다. 아카님의 몸 상태가 대간 모드로 변해 비탈도 큰 어려움 없이 올라선다. 작은 전망대에 올라선다. 지나온 서북능선이‘온순’하게 흐른다. 저 순한 능선에 그리 많은 굽이가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가야 할 고리봉은 지척이었다.
12:33 마침내 큰고리봉에 섰다. 높이가 1300미터가 넘는다. 사방 조망이 시원하다. 당초 계획한 만복대가 높다랗게 올려다 보인다. 미련은 없다. 그곳은 여러 번 다녀온 곳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큰고리봉을 내려선다. 만만치 않은 비탈이다. 내려가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내 숲으로 들어서고 잠시 더 가니 정령치 주차장이 내려다 보인다. 만만히 보았다가 호되게 당한 꼴이다. 15km 남짓한 거리를 9시간 넘게 걸었다. 큰 산은 거리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나 보다. 주차장에 선 차들이 오늘 따라 반갑게 보였다. 단체사진을 찍고 계단을 내려선다. 웬 일인지 무거웠던 다리에 다시 힘이 솟는다. 뒤늦게 ‘이건 뭐지?’ 하는 기분이 든다.
휴게소 건물 2층에서 작은 맥주 파티를 하고, 뒤편 수도에서 몸을 씻었다. 시원한 물이 꽐꽐, 작은 행복이었다. 버스로 성삼재까지 이동하고 다시 산삼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힘들었던 기억들은 어느새 날라가 버렸다. 행복한 알딸딸함으로 버스에 오른다. 이후는 어찌 서울로 왔는지 모를 만큼 곤하게 잤다. 이 행복한 노고함은 경험해 본 자만이 안다. ^&^
< 에필로그 >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철쭉과 편한 능선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선 길,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 철쭉은 기대이상이었으나, 서북능선은 만만치 않았다. 바래봉에서 1123봉까지 황홀한 철쭉 군락을 본 이후 걷는 큰고리봉까지의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매번 가지고 다니던 핸드폰이 없어 길 정보가 부족했고, 마음이 이미 정령치까지로 정해져 있어 더욱 그랬는지도 몰라도 산행 후반기가 유독 힘겨웠다.
그래도 정령치에 도착해 맥주 한 잔 하고 몸을 씻고 나니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남는다. 인간에겐 경험과 기억이라는 자아가 존재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경험은 희미해지고 강렬한 짧은 기억만이 남는다 한다. 오늘 서북능선 산행이 바래봉 철쭉의 화려함과 지도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작은 높낮이로 대변되는 ‘지리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부디 행복한 기억이 우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리산은 역시 큰 산임을 새삼 확인한다. 지리를 장엄한 산이라 말할 때는 비할 바 없이 큰 덩치로 뻗어 내린 주능선만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지리산의 장엄미는 주능선 하나만으로 싱겁게 채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내가 오늘 걸은 서북능선도 지리산의 장엄함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외곽능선이었다. 큰 산은 작은 굽이의 합이요 그 큰 산 안에는 수 많은 상황과 존재들이 공존함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산행이 끝난 다음날 오후, 또다시 졸음이 봄볕처럼 다가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나른한 기쁨입니다.^^
< 지리산 서북능선 산행 궤적 >
첫댓글 철쭉이 정말 장관이였네요.. 수고하셨어요..^^
느리게 때문에 가고 싶었던 태극종주1구간 완주 못해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