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꽃이 되어
1. 영화 소개
영화 <시>는 이창동 감독의 2010년도 작품이다. 칸 영화제 각본상 등 많은 상을 받은 예술 영화이고,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 주인공 양미자의 시 <아네스의 노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줄거리는 간단히 이렇다, 서민아파트에서 외손자와 살아가는 양미자는 동네 문화센터의 ‘시’ 강좌를 듣기 시작하면서 시상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며 메모를 한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자 종욱이가 친구들 5명과 같은 학교 중3 여학생 박희진을 성폭행하였고, 결국 희진이가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미자는 시상을 찾아가는 가운데, 희진이의 죽음에 대해 아픔을 느낀다. 가해자 부모들이 희진 엄마에게 위자료를 주는 것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손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그녀의 시 <아네스의 노래>가 낭송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2.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 미자
영화를 보고나면 상쾌함이 없다. 영화를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웃게 하는 재미도, 가슴 훈훈한 따스함도, 서늘한 공포도, 눈물 펑펑 쏟는 슬픔도, 가슴 벅찬 감격도 없다. 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여중생 시신을 바라보는 꼬마 아이의 표정에 전혀 놀람이 없다. 동네 슈퍼에서 양미자가 마을 여중생 자살 사건을 말하는데 슈퍼 주인도 주변 누구도 듣지 않는다.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도 분출되지 않고 막혀있다. 엄마로서 가해 학생들이나 그 부모에게 ‘내 딸 살려내라’며 욕 한마디 할법한데 그러지 않는다. 양미자의 인사말에 들은 척도 않던 동네 노인은 나무를 바라보며 시상을 느끼려는 양미자를 헛한 눈으로 보고 지나칠 뿐이다. 종욱이를 비롯한 가해 학생들에게서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반찬 투정을 하고, TV를 보며 낄낄거리고, 동네 꼬마 아이들과 천진난만하게 놀아준다. 여중생 성폭행과 자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파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극히 서민적이고 평범한 모습이 어딘가 불편하고 어색하다.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은 흡사 감정과 도덕이 거세당한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 양미자는 어릴 적부터 꽃을 너무나 좋아해서 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한다. 화사한 꽃무늬 옷을 즐겨 입는 66세의 멋쟁이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예쁘다는 말도 왕왕 듣는다. 그의 이름도 미자(美子). 그는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이다. 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는 강사 김용탁 시인의 말을 좇아 일상의 삶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시상을 얻고자 애를 쓴다. 설거지통을 들여다보고, 꽃을 관찰하고 나무의 속삭임을 들으려 귀를 기울인다. 미자가 시를 쓰려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고 싶은 그녀의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지 않는 시대. “시를 왜 쓰세요?”라는 묻는 기범이 아버지의 말처럼, 시를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시대, 삶이 무엇인지, 살아야 하는 이유, 삶에서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 시대. 그런 걸 묻는 것이 비정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3. 아픔을 보는 사람, 미자
문학 강좌 시간에 수강생들은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저마다 고백하였다. 그런데 들어보면 이상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 처녀뱃사공 노래를 불러드린 순간, 출산의 순간, 고생고생하다 겨우 임대아파트에 입주하였을 때, 성당의 나뭇잎을 매만지는 순간, 유부남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현재, 아기였던 자신을 이뻐해주었던 언니에 대한 아픈 기억 등. 흔히들 아름다웠던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성공, 화려함, 감격스러움, 가슴벅참과는 거리가 멀다. 그 속에는 슬픔, 아픔, 가난함, 그리움 등이 괴로움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꽃, 나무 등을 찾아다니며 시상을 떠올리며 메모하던 미자는 어느 순간부터, 죽은 희진이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희진이가 죽은 강가에서 그녀는 아무 것도 메모할 수 없었다. 빗물이 눈물이 되어 빈 메모를 채웠다. 시 낭송회 모임에서 음담패설이나 하는 박형사를 보며 시의 아름다움을 모욕한다고 비난하였지만, 실상 그는 경찰 내부 비리를 고발한 대가로 지방으로 좌천된 아픔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움을 찾아 시를 쓰려는 그가 눈 뜬 것은 ‘아픔’이었다.
양미자는 사람들의 가슴 속 아픔을 보지 못한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깨달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황홀한 밤이에요!”라고 말하는 나르시시즘적 눈빛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희진이의 아픔을 외면하는 마음에서 시는 나오지 않았다.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 이전에 사람이기에 갖는 아픔을 보아야만 했다. 진료차 만난 의사의 방에 있었던 동백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미자에게 의사는 말한다. 그 꽃은 조화라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닌 경우도 많다. 그것에 생명이 없을 때 특히 그렇다.
생명은 환희만을 느끼며 살 수 없다. 반드시 고통이나 아픔이 동행하기 마련이다. 아픔의 흔적을 지니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없다. 타자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볼 수 있을 때, 겉으로 웃고 있으나 속은 깊은 울음을 울었던 가슴을 느낄 수 있을 때 ‘아름다움’은 저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의 고통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진주처럼 참된 아름다움은 깊고 무겁다. 고난은 축복의 변장한 얼굴이라는데, 아픔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인가보다.
4.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의 첫 장면은 자살한 여중생이 강물에 떠밀려오는 것이었다. 강물에 얼굴을 묻고 떠내려온 시신, 그러나 영화 끝부분에 희진이가 다리에서 자살하기 전 뒤돌아서고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 키 작고 못생긴 여자 아이라고 그의 죽음조차 외면당하였지만 그의 아픔을 알아준 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미자로 인해 그는 죽지 않았다. 시신을 안고 흐르던 강물은 이제 많은 물소리를 내며 재잘거리며 흐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8.1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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