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이란 무엇인가
향강 / 장정문
1. 서론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회답은 학교의 문학교재나 안내서로서 문학개론, 문학입문서 등에서 취급하지만 그 定義들은 확실치 않습니다. 문학이란 글로 된 美的예술이고 연구, 평가라고도 말합니다. 더 넓은 의미로 문학은 언어와 문자로써 표현한 인간의 사상과 학문, 다시 말하면 자연과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등을 제외한 학문의 총칭이라고도 말합니다. 歷史學, 哲學, 언어학 등의 학문도 문학이라는 뜻이고 이런 맥락에서 神學도 문학이지요. 실제로 종교들의 경전과 그 역사적 문물들에는 시와 소설의 이야기들이 많고 그리스도의 성서에는 聖文學 ,Sacred literature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들어있습니다.
문학의 개념과 의미는 시대와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일컬어집니다. 고대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 poetics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고대, 중세를 거쳐 근세와 현대의 고전문학, 낭만주의문학, 사실주의 문학, 실존주의문학, 해석학적 문학 등 그 시대적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왔어요. 그 중에서도 더 심한 정치색의 문학으로는 20세기 초기부터 공산주의 소련을 중심으로 정치와 당을 선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socialistic realism 문학입니다. 8.15조국해방 이후 북한의 문학이 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문학을 모방하며 강조했어요. 사회주의와 그 문학에 동조하면서 그 권력화 된 공산주의 정치의 실체를 잘 모르고 자진 월북한 임화 이태준 안막, 김남천 등 한국의 중진문인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던가. 북한권력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후에는 거의 모두 살해 혹은 숙청당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럼 자유민주의 남한에서 글을 쓰며 활동한 문인들은 어떠했는가. 간단히 말해서 순수문학, 참여문학, 외국어번역문학이니 post modernist 脫現代 등의 논쟁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의 문학적 공헌들이 있어 오늘의 한국문학이 서서히 자리매김을 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필자자신의 문학연구와 경험을 토대로 이 문학평론(혹은 문학비평 literary criticism)을 논하려고 합니다. 제한된 시간의 강연이라서 내용을 대폭 줄여서 그 요점을 강조해서 말하겠습니다.
2 본론, 현대문학의 해석학적 비평(hermeneutical literary criticism)
문학은 영어로 literature이고 그 어원은 글을 읽고 쓴다는 뜻의 라틴어 litteratura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럼 글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에 속하지만 언어, 즉 말을 하는 특수존재로서 다른 자연이나 생물들과는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정신 혹은 靈的기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知情意로 된 靈性的인격은 문화를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불을 발견하고 집을 짓고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등 인간이 편하고 잘 살 수 있도록 머리를 써서 노력하는 삶입니다. 일반 동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저 본능대로 음직이고 새끼를 낳는 반복이지요. 인간은 문화(culture, 라틴어 culturare 갈다, 경작이라는 뜻)적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존재가 글자와 글을 지어 읽고 써서 전달하면서 그 문화는 더 속히 넓은 세계와 역사를 창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문화 중에서도 더 특이한 발전은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작품을 산출하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문학은 인생을 아름답고 즐거운 삶으로 이끌어 갔어요. 그렇다고 문학작품이 모두 즐겁고 행복한 삶만을 취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은 喜怒哀樂, 아프고 슬픈 경험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런 곡절 가운데서도 문학은 이 비극들도 의미 있게 시와 소설 혹은 극으로 표현합니다. 희랍의 고대문학이나 영국문학의 현대초기,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의 작품들을 생각해 보세요. 즐거운 이야기들이 아니지만 그 비극 안에서 인간내면의 곡절들을 보며 감동하는 표현과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프랑스 낭만주의문학의 거장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그 제목자체가 비극적 이야기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시아의 레오 톨스토이의 문학도 다르지 않아요. 그의 대표작 소설 ‘부활’은 한 여인 카츄사의 비극적 인생을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문학은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인간의 다양한 삶을 글로 그려내고 혹은 해석하는 작품들입니다. 자연을 보고 사회를 경험하며 인간관계 특히 남녀 간의 아름다운 애정과 사랑을 담는 글로 표현합니다. 시, 수필, 소설, 희곡 등 장르는 달리해도 그 문학의 내용들은 인간의 삶과 곡절들을 작가의 눈으로 해석하며 전달하는 작업입니다.
20세기와 오늘의 세계문학은 인간을 더 깊이 통찰하며 해석하는 문학작업을 수행합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문학은 상당부분 현대철학, 특히 실존사상과 언어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어요. 프랑스의 까뮈는 실존주의적 견지에서 소설을 썼고 독일의 실존, 존재론적 철학자 마틴 하이덱거는 詩야 말로 언어의 진수라며 시를 칭찬했습니다. 미국의 윤리적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인식론적 입장에서 문학예술인이 철학적 지성보다도 더 높고 깊은 진리를 깨닫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인식론이나 문학관은 철학, 신학적이면서 넓고 깊은 해석학적 지성의 표현들입니다.
오늘의 문학비평은 문학을 읽고 감동받는 독자들의 지위와 역할을 중요시 합니다. 오랜 과거의 전통문학은 그 작가의 역할에 치중했어요. 시와 소설을 쓴 작가의 창작동기, 그 사건들과 언어구사, 그 진행을 중요시하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문학 특히 실존주의 문학의 등장 이후로 문학은 그 작가만이 아니라 독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문학작품은 작가가 독자와 더불어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는 인식으로 발전함으로써 더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같은 소설인데 읽는 독자들의 사정과 인식에 따라 그 소설의 내용들이 다르게 혹은 더 깊게 가슴에 닿는 것입니다.
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소설가가 소설을 써서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고 그 작가와 자리를 함께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독자들이 각각 감동받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소설가는 놀랐습니다. 자신은 전혀 그런 생각이나 느낌으로 쓰지 않았는데 독자들은 그들대로 어떤 장면에서 새롭게 깨닫고 감동받았다는 것입니다. 글은 작가가 써서 세상에 내놓으면 더 이상 그의 점유물이 아닙니다. 독자들이 그들 나름의 문화적 배경과 환경에서 읽고 부딪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입니다. 내가 1992년 자전소설 ‘머나먼 고향길’을 써서 서울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했어요. 국내외의 많은 독자들이 애독했습니다. 내 고향 친구 하나는 나의 고향길 묘사를 읽고 그 정든 산천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고......, 캐나다 토론토의 여성 한분은 서울 정동, 예술고등하교 출신으로 음악인인데 내 소설을 읽고 가곡 ‘고향의 노래’가 생각나 불러보며 울었다고 말해요. 또 토론토에 사는 지성인 중년 여성은 내 소설의 종교적 내용을 읽고 그가 가르치는 원불교의 사상을 더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그 글을 집필할 때 전혀 생각지 않았던 부분인데 그런 반응을 보게 된 것입니다. 현대해석학은 철학과 신학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해석학적 평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해석학은 현대의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작가로 시작되는 text와 이에 접하는 독자의 해석학적 기능과 작업, 얼마나 중요합니까. 글의 독자는 단순히 작가의 작품을 읽는 대상만이 아닙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하는 관계, 그 상호작용을 중요시 합니다. 문학은 독자에게 읽혀져 해석됨으로서 더 깊고 새롭고 가치 있는 문학으로 창조되는 해석학적 작업입니다.
3. 나 자신의 문학지식과 경험
나는 초등학교 유년시절부터 시를 좋아하고 소설과 수필을 즐겨 읽게 되었으며 매일 문학일기를 썼습니다. 레미제라블, 몬테 그리스도하꾸伯, 톨스토이의 소설 등 명작들을 일본어 ‘세계문학전집’애서 읽었습니다. 그 시절 나의 소원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중학교의 문학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답니다. 나는 한국전쟁 중, 3년 간 유엔군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유엔 CIE에서 실시한 교육에서 국어와 문학교사가 되어 2년간 중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문학교재들 중의 하나인 ‘작문법’의 글짓기도 가르쳤어요. 내 나이 21-22세 때입니다. 나는 자유민주의 한국사회에 나와서 살게 될 때 대학의 문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하늘의 뜻이었는지 신학과 철학을 배우는 신학대학으로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대학문학과의 기회도 오게 되었습니다. 국문학이냐 영문학이냐의 선택을 생각하다가 영문학을 택했어요. 미국인 선교사Herold Voelkel 옥호열 박사님의 학비원조로 숭실대 영문학과에 편입했습니다. 당시 숭실대의 영문학과 교수들은 주로 서울대, 고려대들의 교수들이 강사로 오셔서 가르쳤어요. 그 중에서도 서울대 영문학과의 박충집교수, 고려대의 이호근 영문학사교수와 영미희곡과목의 여석기교수는 더 내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충집교수의 19세기 영시강의 시간에는 내가 자주 지명을 받고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셸리Percy Shelley, 키츠John Keats 등의 영국 낭만파 詩들을 해석했고 경희대의 문과대학장인 윤영춘교수(윤동주시인의 당숙)는 미국의 현대시를 가르치면서 역시 내게 시해석을 시켰습니다. 모두 잊을 수 없는 은사님들이지요. 그리고 우리 숭실대 영문학과에서는 국문학과목도 있었는데 김현승 시인이 강의했어요. 그는 한국어 가운데 感性的인 형용사가 풍부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한국문학의 작가들은 더 아름답고 좋은 표현을 할 수 있다고요, 그는 한국문인들 중에서 서정주시인과의 친우지정 이야기와 서시인이 처음으로 ‘뒤안길’ 같은 참신한 어휘를 발견했다며 그의 문학적 공헌도 말했습니다. 한번은 내가 방과 후 교실에서 김현승교수와 단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내가 번역한 미국시인 윌리엄 롱펠로의 시 두 편을 보여주며 읽었습니다. 김교수는 나의 영시번역을 보고 놀라며 칭찬했습니다. 그는 평양의 숭실중학과 숭실전문학교 문과출신입니다. 고향은 전남이지요. 1960년대 초기 나의 대학 영문학시절의 문학경험은 이 정도로 그칩니다.
결론
나는 지금까지 오랜 세월, 문학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문학도로서, 훗날에는 문학작품을 써서 발표하는 작가로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만이 아니라 북미주에서 문학의 작품 활동을 했고 넓은 세계를 여행 다녀 그 지식과 경험들을 시와 수필 혹은 소설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참말 많은 독서를 했고 한국어 문법, 표준어 공부, 문학의 습작도 했습니다. 글을 쓰려면 먼저 많은 생각, 깊은 사색과 명상을 해야 합니다. 나는 20대 중반에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면서 문학작품을 집필할 때마다 더 기도를 합니다. 하늘의 도움심이 있기를 기원하지요.
다행히, 아니 하느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셔서 지금까지의 내 작품들은 빛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소설작품은 더 내게 보람을 안겨줍니다. 확실히 소설의 창작은 그 구성과 언어선택 등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수일 전에는 캐나다에서 한국을 방문 중인 교민 한분을 만났어요. 토론토 한국일보에 연재된 나의 장편역사소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읽고 감동받았다며 70대 중반이 되어 그 자신의 회고록을 내고 싶다고, 사례한다며 내가 도와달라고 글 부탁을 해요. 짧은 글도 아닌 긴 이야기의 글을 돕는다는 것은 이제 나로서는 쉬운 작업이 아니라서 응락을 못했습니다.
나는 요즈음에도 거의 매일 여러 분야의 글을 쓰고 있지요. 신문의 논설들과 신학자칼럼의 글을 계속 집필하고 여러 문예지의 요청으로 시, 수필, 소설 등의 글을 써야합니다. 즐거운 비명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하지만 어렵고 힘이 들어도 나는 최선들 다해 요청받는 글을 씁니다. 나의 인생은 하늘의 뜻으로 글을 쓰도록 운명 지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학문작업이나 문학의 문필작업은 인생의 해석이라는 소신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의 설교, 나의 전공학문인 언어와 철학, 신학의 해석학도, 그리고 문학의 창작도 깊은 의미에서 인생과 사랑의 해석이라고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