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시학
친구여, 창문을 열라, 3월이 아닌가.
햇볕이 들지 않아도 바람은 이미 녹색의 향내를 품고 있다. 응달진 어느 산골짜기에 차가운 얼음이 남아 있다 해서 누가 그것을 한탄할 것인가? 혹은 친구여! 당신의 작은 뜨락에 심어놓은 목련이 지금껏 잠들어 있다고 너무 근심하지 말라, 손바닥을 펴보면 햇병아리의 잔 솜털 같은 3월의 감촉이 당신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낄 것이다.
서두르지 말아라. 남해를 건너온 따뜻한 바람들은 때 묻은 당신의 솜옷을 벗길 것이고, 사흘 동안이나 내리는 가랑비들은 닫혔던 들판을 다시 열 것이다. 다만 친구여, 노래가 서툰 것을 한할 것이다. 꽃보다 아름답지 않고, 어린 새순처럼 참신하지 않고, 봄비처럼 부드럽지 못하며 다시 열기를 내뿜는 태양이나 제 자리로 돌아온 성좌처럼 정직하지 못함을 서러워하라.
당신의 언어는 제철처럼 절로 눈을 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여, 삼월이면 봄이 오는 그 순서와 죽어 있던 대지가 어떻게 생기를 되찾는 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굴뚝에서 매운 연기가 나오지 않아도 방이 절로 더워지는 이치를 알아야 하며,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청순한 바람이 대청마루를 가득 채우는 그 비법을 익혀야 한다. 만약 당신의 언어가 한 포기의 풀처럼 저 광활한 자연의 열매에 맞닿아 있다면, 언젠가는 구근(球根)처럼 싹이 돋을 것이다. 봄을 믿는 자보다는 봄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하다. 봄을 느끼는 사람보다는 봄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 더욱 행복하다.
친구여. 지금은 서툴지만, 어느 땐가는 우리의 노래가 철새들이 비상하는 율동처럼 자유롭게, 공간을 날 수 있게 하라. 지금은 향내가 없지만, 목련처럼 노래가 이 공간을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친구여, 3월이 아닌가? 동면하던 언어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저 간지러운 유혹을 당신은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운명선(運命線)처럼 손바닥에 뚜렷이 그러지는 저 봄의 촉감을 움켜잡아라.
지은이: 이어령
출 처 : 『문학사상』 1973. 3
짝퉁 화가 한 획 긋기
동양화에 입문한 지 3 년째다.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먹을 간다. 교수이신 송 신부님께서 시연한 대로 선을 그어가며 수묵화를 그린다. 붓의 물기를 최대한 빼낸 후 붓 끝에 진한 먹물을 살짝 묻혀 접시에 문질러서 연하게 한다. 화선지에 윤곽을 희미한 선으로, 다시 근경과 중경은 진하게 표현하고 원경은 옅게 그린다. 마음대로 선이 그어지지 않아 생각 따로 그림 따로다. 풍월을 읊을 만한 3년 세월이건만 붓칠한 먹꽃 세계는 아직도 설다.
붓을 들어 획(劃)을 긋는다. 획은 글씨나 그림에서 한 번 그은 줄이나 점이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이 운필*이다. 붓으로 한 일(一)자를 쓸 때 시작은 역입(逆入)하여 수평으로 긋고서 마지막은 도출(倒出)*해야 선이 힘 있게 보인다. 춘란 잎을 하나 하나 그릴 때 바로 적용된다. 때로는 붓을 누인 채로 박박 긁어주기도 한다. 말은 쉬우나 획의 크고 작음, 붓에 가하는 힘의 강약을 터득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운필의 속도나 먹의 농담이 어우러진 조형미를 찾기까지는 부단한 붓 터치가 필요하다. <세한도>나 추사*가 그냥 나왔겠는가. 추사는 칠십여 년 먹을 갈아서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천 개의 붓을 몽땅하게 닳게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뜩해진다.
칠십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몽당붓 하나 가지지 못했으니, 수묵산수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언감생심일지라도 꿈마저 접기는 아쉬움이 클 터. 화선지를 붙여놓은 캔버스 앞에서 자못 진지해진다. 머릿속으로 구도를 잡고 어디에서 선을 그을까를 생각한다. 가끔은 의제 허백련*이나 아산 조방원* 선생의 도록을 넘기고 또 넘기면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보거든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그리셨을까? 작가의 정신세계를 더듬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강산을 살펴보고 시를 낚는 화가의 세계가 기기묘묘하다. 형상 속에는 마음을 맑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고 보기만 해도 자연과 하나 되는 무위의 여유를 찾게 한다. 그림에는 한 시대의 사회상과 그 성쇠를 들러내고 있으니 세월이 흘렀어도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을 화(畵)에 칼 도(刂)를 합치면 새길 획(劃)이 된다. 바로 획(劃)은 칼로 새긴다는 뜻이다. ‘한 획(劃)을 그었다’라는 표현은 뛰어난 업적이나 성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했다는 거다. 남도 화단에서 의제나 아산은 학 획을 그은 분이다. 산수화로 한 획을 긋는다는 것은 턱도 없을지라도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고 흉내라도 내 보고 싶다.
지난날을 돌이켜보건대 나는 식물학자로서 제자와 동료들과 함께 우리나라 국립공원을 오르내렸고 크고 작은 산과 강, 섬들의 자연 자원을 조사했다. 애환이 큰 만큼 성과도 있었다. 보호족인 ‘히어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히어리*의 생태, 분류, 유전 및 육종까지 연구하여 전술한 것은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 식물학자로서 큰 획은 긋지 못하였을지라도 오직 한길을 순탄하게 걸었으니 다행으로 여긴다. 이름난 자만 한 획을 긋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분야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열매를 맺을 때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 가사에는 현모양처의 애환을 실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나의 어머니는 며느리이고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일인 삼역을 하면서도 가정을 지키고 번성시키셨으니 우리 가문에 한 획을 그으신 분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이름이 어머니다.
내가 그린 산수화, 산줄기는 힘이 없고 물줄기는 애매하니 고백하자면 기운차지 못한 졸작이다. 그림에는 여섯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만이라도 갖추고 싶은 마음에서 덧대본다. 첫째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이요, 두 번째는 골법용필(骨法用筆)이다. 셋째는 응물상용(應物常用)이요, 넷째는 수류부채(隨類賦彩), 다섯째는 경영위치(經營位置)요, 여섯째는 전이모사(轉移模寫)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운이고 다음은 골법이다. 작품이 도약하는 힘이 있고 기품이 넘치며 주제가 명확할 때 기운생동이라고 말한다. 기(氣)는 생명의 근원이다. 조화와 질서가 있는 생명의 기가 바로 기운이고 그 역동성이 생동이다. 붓을 사용하여 대상의 뼈대를 세우는 것이 골법인데 인물 묘사에서 골육(骨肉)이라고 말하면 골(骨)은 육체미의 선(線)이요, 육(肉)은 색(色)이므로 이것을 용필이라고 한다. 바로 골법은 기운을 생동하게 하는 수단이다.
남은 삶은 마음을 비우고 산천을 관조하는 관산청수(觀山聽水)를 제일로 여긴다. 고요에 스며들어 강산과 풍경이 된 채 즐기는 수필가이고 어설픈 짝퉁 화가이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붓 가는 대로 쓰는 수필이나 붓칠하는 대로 형상이 드러나는 수묵화도 생각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동류다. 텅 진 마음, 맑은 정신으로 한 획 한 획을 덧대어 하품(下品)일지라도 나만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속내가 스며든 기운이 생동하는 자연을 차경(借景)하고 싶다.
천만 번 붓칠하면 그토록 갈구하는 먹꽃 피우러나 멋꽃이 될 터인가.
*운필(運筆):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붓을 움직임.
*역입(逆入):
*도출(導出): 판단이나 결론 따위를 이끌어 냄.
*추사 세한도:
세한도(歲寒圖)〉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표작으로, 그가 1844년(헌종 10)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린 작품.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는 ‘세한도’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는 글자와 낙관이 있다. 그림의 왼쪽 부분에는 김정희가 해서체로 그림의 제작 이유를 적어놓았다. 이를 통해 〈세한도〉가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제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 진도 출생이다. 호남 지역 남종화(南宗畵) 화맥을 계승, 발전시키며 광주 화단을 이끌었다. 연진회(鍊眞會)의 여러 서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허백련 스스로도 다양한 화풍을 남종화와 접목하였다. 특히 실경(實景) 산수화, 청록(靑綠) 산수화를 제작하면서 다양한 기법적·재료적 활용의 폭이 확대되어 갔다. 연진회는 중앙 화단과 차별화된 광주 화단의 특수성과 그 풍토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광복 이후 허백련춘설헌(許百鍊春雪軒)으로 거처를 옮긴 뒤, 허백련을 대표하는 창작 활동 시기에 접어들었다. 일생에 걸쳐 고수하였던 남종화에 대한 철학으로 허백련은 '최후의 남종화가'라고 불리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1926~ 2014).
1945부터 남농 허건에게서 그림을 배우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1953년 제 2회 국전에 입선, 1955년 제 4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수상. 국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히어리:
송광납판화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높이 1∼2m이고 작은가지는 황갈색 또는 암갈색이며 피목(皮目)이 밀생한다. 겨울눈은 2개의 눈비늘로 싸여 있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의 원형이며 밑은 심장형이다. 잎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가 있으며 양면에 털이 없다. 꽃은 3월말에서 4월에 피고 연한 황록색이며 8∼12개의 꽃이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꽃이삭은 길이 3∼4cm이지만 꽃이 핀 다음 7∼8cm로 자란다.
[네이버 지식백과] 히어리 [Korean winter haze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기운생동(氣運生動): #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생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골법용필(骨法用筆): #선인의 필체의 품격이나 골법의 습득을 비롯한 붓놀림에 관한 기법을 말한다.
응물상용(應物象形·容):#명사 미술 동양화에서 쓰는 육) 물체 자체의 모습, 특성 따위를 잘 알아 그 형상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수류부채(隨類賦彩): #그리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채색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경용위치(經營位置): #화면을 살리기 위한 배치법이다.
전이모사(轉移模寫) :# 선인의 그림을 본떠서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미술 동양화에서 쓰는 육법의 하나)
관산청수(觀山聽水): 산을 보고 물소리를 듣다(풍류를 즐기다)
지은이 : 임동옥 <꿈꾸는 굴렁쇠> <무등산은 하늘이어라> 등 4권의 수필집을 출판. ‘무등산은 하늘이어라’를 통해 2020 광주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한 국환경생태학회 회장역임, 생물학자
출 처: 『수필과 비평』2025. 02월호
<봄비>
박 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삼십 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와서
젖은 담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 솟으랴
슬픈 꿈처럼.
『죽순』 동인지 창간호 1946
<봄비>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려 ─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같이
떨리는, 보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봄비>
이 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삼월입니다.
삼월이, 꽃들이 피어나는 삼월이 왔습니다.
행여 늦추위가 몽니를 부린다고 해도, 이빨 빠진 추위가 어쩌겠습니까. 봄이 왔는데......
지난 겨울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경악과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인정, 불면과 우울증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었지요.
이제 봄입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생기발랄한 계절인데,
모든 어두운 기억과 의심은 몰아내고,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천진성과 낙천성을 끌어올려
내일은, 모레는 좀더 긍정적인 날들을 펼쳐나가도록 합시다.
유정독서모임, 3월 첫주의 목요일( 3.6) 오후 6시부터 커먼즈필드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삼월의 인사'와 봄시, 노벨문학상에 관련된 이야기들,
그리고 2차시에는 김유정의 < 연기> 와 <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올 3월부터는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 강의 소설작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도서 선정에 대한 것은 이번 첫 만남에서 의논하여 결정합니다.
3월 6일 오후 6시 커먼즈필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2025. 02. 28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