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훈장
이경자
무료할 때면 가끔씩 손을 쳐다본다. 열 개의 손가락 중 왼손 넷째 손가락만 온전할 뿐 다른 아홉 개의 손가락은 모두 제 본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부분은 손이었다. 외할머니는 “시집가기 위해 선을 볼 때 손만 쏘옥 내밀어라”고 말씀 하실 만큼 곱고 예뻤다.
손이 커야만 시래기 한 줌이라도 더 쥘 수 있고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작고 예쁜 내손이 좋기만 했다. 공기놀이를 할 때 작은 손등 위에 두 세알도 올라앉질 않아서 손등이 덕석만큼 컸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그 때 뿐이었지 작은 손과 손가락을 보면 볼수록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할 때였다. 의상학과는 가정대학 소속이어서 옷 만드는 법 뿐만 아니고 수예, 영양학, 요리, 가정관리 등 여러 과목을 익혀야 했다. 많은 과목들을 다 배웠지만 똑 부러지게 한 과목만 파고 들 수는 없었다. 대학이란 그 학문의 전체 틀만을 가르치는 곳이지 세부적으로 내 것을 공부하기에는 부족했다. 졸업을 하고 양재학원에 들어가 재단과 재봉 공부를 다시 했다. 그때부터 내 두 손은 길고 긴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파계한 스님은 시중에서 잿빛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가슴이 서늘하게 저려온다고 했다. 그것은 승복에 대한 연민이자, 그리움의 찌꺼기가 마음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 큰애가 돌이 되어 갈 무렵부터 나에게도 한 쪽에 잠재워져 있던 그 불씨가 발동을 했다. 그냥 남편 잘 만나서 아이나 키우고 살겠다는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무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심지를 더욱 깊이 박힌 데는 다분히 남편 탓도 있었다. 남편은 더러 ‘무관의 제왕이며 사회의 목탁’이라고 말하는 언론인 이었지만 그 시절 박봉으로 사는 것이 팍팍했다. 게다가 융통성이 없어 세상 살아가는 방법도 잘 몰랐다. 동물의 세계에 비유하면 풀만 먹고 사는 사슴이나 양 같은 초식동물과 같았다. 그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었고 삶의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둘째를 갖고 남산만한 배를 안고 병풍 수를 놓기 시작했다. 온종일 앉아서 아래만 쳐다보고 수를 놓으니, 다리는 저리고 얼굴은 술 단지 같이 퉁퉁 부었다. 그 일은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보겠다는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큰 아이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두 번째 도전을 했다. 피아노 교습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피아노를 배웠을 때는 시대상황이 지금과는 달라 피아노에 일생을 걸어보겠다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꿈은 항시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터였다. 어린 초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좋은 스승을 만나 피아노 공부를 계속했다. 경력이 쌓이면서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했다.
차츰 명문학원이라고 칭송을 듣는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수를 놓던 두 손가락이 이제는 열손가락을 동시에 사용해야 했다. 수백 명이 넘는 제자를 손으로 가르쳐 세상 밖으로 내 보냈다. 꼬박 30년이란 긴 세월을 하루같이 피아노와 같이 했다. 그 기간 동안 내 삶의 터전은 견고하게 만들어졌고 두 아들도 땅에 뿌리를 굳건히 내렸다.
세 번째의 도전이 한 쪽 손만 필요로 하는 ‘그림 그리기’였다. 손가락이 점점 더 혹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늦깎이이지만 미술대학에 입학을 하고 대학원을 마쳤다. 10여 년 넘게 쉬지 않고 맹렬하게 그림을 그렸다. 팔과 어깨가 고장이 났다. 이제 팔 전체를 원활하게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오른 손 엄지와 검지, 중지만으로 할 수 있는 작가의 길로 전환했다. 내 손의 유전(流轉)은 ‘오른 손 수놓기’에서 ‘양손 피아노 치기’ 그리고 ‘오른 손 그림그리기’로 갔다가 다시 이제는 ’오른 손 글쓰기‘로 변천 하였다.
나의 손은 긴 세월동안 생활의 어려움에 벗어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 다음 나 자신을 위함이기도 했지만 하루도 쉴 새 없이 모질게 혹사를 당했다. 그러는 사이에 팔도, 어깨도, 목도, 허리까지 고장이 났다. 그 중에도 손이 가장 많은 고통을 당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오른쪽 검지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는 차례차례로 하나씩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열 손가락 중 왼손 약지만 빼고 아홉 개의 손가락 끝이 성난 코브라 뱀 머리같이 불거졌다. 몸 전체에서 가장 자신 있고 예뻤던 손이 이렇게 망가질 줄은 몰랐다.
한번 씩 열손가락을 펴고 유심히 볼 때면 손가락 하나하나 망가질 때의 세월이 눈앞을 스친다. 손가락이 차례로 하나씩 아프고 아려 오다가 둥그렇게 꽈리 같이 부어올라 물집이 생겨 바늘로 찌르면 누런 액체가 흘러 나왔다. 내 몸의 진액이 빠져 나오듯 고통스러웠다. 그 다음 점점 흉하게 뼈가 휘어지는 과정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다. 모든 손가락이 그랬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오른 손 엄지와 검지, 중지는 가장 혹사를 당했다. 왼손 약지도 아직은 휴화산 같이 가만히 숨죽이고 있지만 언제 활화산이 되어 솟아오를지 모를 일이다.
나는 손가락 끝에 아홉 개의 별과 같은 훈장을 달고 있다. 휘어져 흉하게 부풀어 오른 손가락은 어찌 할 수 없는 삶의 훈장이 아니겠는가. 휴화산 같이 고요한 왼손의 약지마저 부풀어 오르는 날 열 개의 훈장을 단 내 손에다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이다.
<작가 노트>
생각해보면 지난 날 단 한 번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살아보질 못했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뒤쫓아 와 옥죄게 했는지 모른다. 나는 인물 좋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오빠 셋과 언니를 위로 두고, 외모도 머리도 그저 그런 꼴찌로 태어났다. 맨 끝물로 태어 난 나는 열등한 위치에서 존재감 없이 자랐다.
꼴찌나 끝물은 낱말은 다르지만 내포된 뜻은 비슷하다. 끝물이란 농작물중 마지막에 달린 열매로 영글지 못해 모양이 볼품이 없다. 나에게 이 꼴찌와 끝물이란 두 단어가 쌍둥이 같이 평생 따라 다녔다.
볼품없고 못난 끝물인 나는 제대로 된 열매를 맺기 위해 부단히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다. 이제는 쫓기듯 살아 온 긴 시간들과 이별하고 싶다.
나는 지금이 좋다.
<작가의 서가>
작은 꿈이거나 큰 꿈이거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 그것이 더러는 이루어지기도 하고 중도에 포기해 버리거나, 평생 무지개를 쫓듯이 헤매기도 한다.
지난 날 꿈을 이룬다는 것은 거룩하고 거창하게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순서로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지만 작은 꿈들이 하나씩 이루어져 왔다.
젊은 날 내 마지막 꿈은 칠십살이 되었을 때쯤이면 수필집 한권을 썼으면 했다. 그런데 벌써 어쭙잖은 글로 세 번째 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작가 이력>
숙명여자대학교, 경성대 미술대, 동대학원 졸업. 경성대 미술대 외래교수, 동아대 회화과 강사역임.
‘창조문학’ 2007년 등단.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한국에세이포럼 회원. 한국미술협회, 부산미술협회 회원. 전 정은음악학원 원장.
부산문학상, 부산여성문학인협회 우수상
수필집 ‘우리둘이서 살살 써보자’ ‘물수제비를 뜨다’ ‘붉은 장미꽃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