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2026년 3월 7일 (토)
2. 날씨: 맑음
3. 경로: 물금역 - 용화사 - 황산강 베랑길 - 서룡공원 - 원동역-매화공원(순매원) - 가야진사 - 작원잔도 - 삼랑진역
4. 거리: 약 22.1km
5. 소요시간: 5시간 15분
6. 코스정보 : 물금역, 용화사, 임경대, 황산강 베랑길, 원동역, 원동매화축제, 순매원, 가야진사, 작원잔도, 삼랑진역
7. 지역: 경남 양산시, 밀양시
8. 트랙:
9. 코스지도
[용화사]는 1471년(성종 2) 통도사의 승려 성옥(性玉)이 창건하였으며, 미륵당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창건 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1990년대에 산신각을 새로 짓는 등 불사를 일으켰다. 용화사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이 용화사로 오게 된 사연이 전해온다. 600여 년 전인 14세기 무렵 강 건너 김해의 고암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물체를 건져 내니 이 불상이었다고 한다. 그때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에 있는 옛 절터에 모셔둔 것을 이 절을 창건한 성옥이 옮겨왔다고 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낙동강변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1947년 용화사의 법당을 중수하면서 옮겨와 주존으로 봉안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용화사가 물금과 낙동강 건너편인 김해 상동 방면을 연결하는 나루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산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임경대]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로 유명하다. 고운대, 최공대로도 불리는 임경대는 통일신라 때 지은 정자로 낙동강 서쪽 절벽 위에 자리해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 고운 최치원이 즐겨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지금도 한쪽 벽에 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바람에 깎여 실제로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임경대 산책로를 따라 5분여를 걸어가면 한반도 모양의 신기한 풍광이 펼쳐진다. 한반도 모양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이 정자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김해와 원동을 이어주는 매리교도 오히려 절경에 볼거리를 더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산강 베랑길]은 조선 시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대표적 길인 양산의 황산 잔도(黃山棧道)를 복원하여 낙동강 종주 자전거 길 양산 구간에 시민들이 산책과 자전거를 탈 수 있게 재탄생시킨 길이다. 잔도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을 말한다. 낙동강의 옛 이름인 ‘황산강’과 벼랑의 양산 방언인 ‘베랑’에서 착안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산강 베랑길 주변으로 보물 제491호인 양산 용화사 석조 여래 좌상이 있는 용화사가 있고, 낙동강 2경으로 꼽히는 임경대가 있어 양산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며 낙동강을 만끽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 코스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파대]는 양산을 흘러가는 황산강(黃山江, 낙동강) 연안의 한 암벽에 ‘경파대(鏡波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절승지다. 조선 말기 고종 때 양산향교 대성전(大成殿) 중수에 연금(捐金)했던 사인(士人) 정임교(丁壬敎)가 만년에 양산에 복거(卜居)하면서, 문창후(文昌侯)와 최치원(崔致遠)이 유상(遊賞)했던 임경대(臨鏡臺)를 간간이 올랐다가, 우연히 임경대의 수백 보(步) 아래쪽에 위치한 한 암벽을 차지하고 ‘경파대’라 이름한 뒤 날마다 수삼(數三)의 벗들과 함께 상영(觴詠)하였다. ‘경파대’라는 명칭은 당시(唐詩) 「채련곡(採蓮曲)」에 “거울 같은 물 바람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鏡水無風也自波)”고 한 즉경(卽景)을 상기해서 붙인 것이다. 정임교는 이곳에서의 창화(唱和)를 매우 즐겨 “만년의 낙(樂)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경파대의 주인이라 자서(自署)하여 「경파대기(鏡波臺記)」를 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제석교비, 1739년(영조15년)]는 황산도(黃山道),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 가운데 양산 화제천에 있던 다리로 원래 **토교(土橋)**였던 다리를 석교로 고쳐 세우면서 이를 기념하여 만든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에는 화제천을 건너기 위한 토교가 잦은 수해로 반복하여 무너지자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큰 돌을 모아 홍예석교(무지개다리) 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비에는 다리의 이름과 위치, 세우게 된 내력과 당시 감독한 관리의 이름뿐 아니라 이 다리가 영남대로의 중요한 통로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교통로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진사]는 나루터신[津神]을 모시고 있는 제당으로,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곳에 자리하고 있다. 김해시 상동면과 양산시 원동면 경계의 낙동강 동쪽에 있다. 원래는 용당리의 비석골에 있었으나 196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앞면 1칸 옆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옆면에서 볼 때 지붕 선이 사람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맛배 지붕을 올린 목조건축물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상이 있고, 그 위에 머리가 셋인 용을 그려 놓은 그림이 놓여 있다. 현재의 사당은 1406년에 세운 것으로 전하며, 옛 건축물로서 민속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진사에는 [용신설화]가 있다. 옛날 양주 도독부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길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꿈에 용 한마리가 나타나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멀리하니 첩용을 죽여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전령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다음날 첩용을 죽이기 위해 용소에 갔는데, 실수로 남편용을 죽이고 말았다. 슬피 울던 본처용은 보답으로 전령을 태우고 용궁으로 갔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 재앙이 그치지 않아, 사당을 짓고 용 세 마리와 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작원잔도] 영남대로 구간 중 잔도(棧道)라는 명칭이 붙는 곳이 있다. 이는 말 그대로 험한 벼랑에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 도로를 내었는데 이 길을 조선왕조실록에는 잔도(棧道)라 하였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작천(鵲遷)이라 불렀다. 영남대로상에는 황산잔도, 작천잔도와 토끼벼루(점촌~문경) 가 대표적이다. 황산잔도는 현재 물금읍의 황산역에서 원동에 이르는 낙동강변의 절벽에 만들어진 길이고, 작천잔도는 양산 원동(용당리)의 하주막에서 밀양의 삼랑진(더 정확히는 까치원 혹은 까촌)에 이르는 벼랑길을 지칭한다. 근현대기 문헌에서는 작원관과 잔도를 합쳐 작원잔도(鵲院棧道), 작천잔도(鵲遷棧道)로 부르기도 하였다. 작원잔도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잔도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부편에
"작원잔도는 밀양부에서 동쪽으로 41리(16Km 정도)에 위치해 있다. 작원으로부터 5~6리쯤 내려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매우 험한 길이다. 그런데, 그 한 굽잇길은 돌을 깨뜨려 길을 만들었는데 천길이나 되어 보이는 짙푸른 빛을 띤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다닐 때는 모두들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다닌다. 예전에 한 수령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 후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원추암이라 불렀다." (안내판)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지]는 과거 영남 지방의 동·서와 남북의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작원관(鵲院關)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여행하는 관원의 숙박소 기능과 왜적을 공격에 방어하는 기능, 작원진이라는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기능을 하였다. 즉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한 곳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철도 부설로 인해 철거하였다가 1995년에 원래 자리 인근에 작원관을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이 동래성 함락 이후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해 벌인 작원관전투에서 희생한 군사들의 위령탑이 있고, 주변 기차길 밑에 있는 터널 밖 낙동강변은 낙동강 자전거종주길의 밀양 하남~양산 구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는 밀양 [처자교]의 건립 경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작원관(鵲院關) 근처의 작은 절에 한 승려가 살았는데, 근처 마을에 사는 미모의 처자를 연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에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걸고, 통행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다리 놓기 시합을 벌였다. 승려는 행곡천(杏谷川)에 다리 놓기를 맡고, 처자는 우곡천(牛谷川)에 다리 놓기를 맡아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처자의 연약한 노동력을 깔본 승려가 교만에 빠져 있는 사이에 처자가 다리를 먼저 완성하였다. 이에 부끄럼을 느낀 승려가 낙동강에 빠져 죽자, 처자도 따라 죽었다. 이후 승려가 만든 다리는 ‘승교(僧橋)’, 처자가 만든 다리는 ‘처자교(處子橋)’로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