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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몸을 드리라
롬 12장 1절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대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보았습니다.
구원은
개인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으로 마무리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원을 이야기하다가
그 구원이 찬송으로 변하면서
삶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로마서 12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원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원받은 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그 구원받은 대로 사는 삶
이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먼저 ‘그러므로’ 라는 말을
생각해 봐야합니다.
이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로마서 1-11장과 12-16장을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뜻은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자로서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또 로마서 5장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섰다면
당신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면,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사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의 구원의 핵심은
이런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온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실패케 하셨고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인하여
온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구원의 대 드라마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에는
‘당신이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면’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이 ‘그러므로’ 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삶도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열심히 살면
허무와 후회만 남습니다.
인생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합니다.
이 해답을 가진 자만이
그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형제들아’입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성경도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택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고
행동하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은혜받으면
“그래 이건 아무개가 들어야 해”
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내가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깨달은 사람에게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와서 실망하고
설교를 듣고 실망하고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서는
아멘, 할지 몰라도
집에서는
날마다 신경질을 내고
말이 거칠고 이기적이라면
그 사람을 보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가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구원은 있지만
구원받은 삶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토록 타락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숫자가 많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참된 진리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만이
구원받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구원받은 자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나가서
전도하지 않아도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삶에 신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보여준다면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아도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이원론적인 삶을 삽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천국을 독점한 것같이 행동하다가도
교회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세상 사람으로 변합니다.
세상의 방법대로 삽니다.
그러면서
‘다 그런거지’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교회에 들어와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외로운 존재들입니다.
박해받고
인기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입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영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이야기하고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이야기 하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얼마나 겸손하게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진리를 다 아니까
내 말을 따르라” 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야단을 치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비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많은 설교자와
윤리운동 실천가들은 꾸짖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꾸짖고 싶다면
여러분이 꾸짖지 말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꾸짖게 하십시오.
내가 꾸짖으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모두
정죄를 받아야 하는 죄인인 것입니다.
심판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정죄를 통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통해서 변합니다.
충고하고 야단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만 나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싸주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들을 야단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얼마든지 야단치실 자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야단치는 것을
많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십시오. 이해하십시오.
격려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
을 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예수믿는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법을 가지고
크리스천의 삶을 설명합니다.
아주 독특한 설명입니다.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제물 없는 제사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은 음식도 하고
돼지도 잡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물입니다.
제물이 무엇입니까?
바쳐지는 것입니다.
희생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소나 양을 잡아 죽여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피를 뿌려서 내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죽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내 죄가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물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제물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왜 제물이 되냐?”
라고 하면 안됩니다.
제물은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희생을 당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구원은 없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을 위한
희생 제물입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고
제물이 되는것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축복을 받는 것만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참된 모습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가리켜
‘구원받은 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또 이사야 53장 5절에는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그’를
그리스도인 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구원받은 자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찔림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리스도인의 상함은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받음으로
세상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세상사람들이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그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빛’ 혹은 ‘소금’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왜 믿음의 사람들이
목말라 할까요?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어딘가 외롭고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몸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몸’ 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을 드린다 는 것은
내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어떻게 몸을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원하십니다.
‘몸’ 은 시간이요. 은사입니다.
우리 몸이 움직일 때
신앙의 실체가 보이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관념적이 되거나 이성적이 됩니다.
현실이 없습니다.
몸이 없는 사람은
받을 축복도 없습니다.
참된 예배란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몸이 가면 마음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몸이 건강해 집니다.
하지만 몸이라고 같은 몸이 아닙니다.
어떤 몸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몸을 받지 않으십니다.
제사에서
흠 없고 티 없는 제물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깨끗한 몸을 원하십니다.
헌금이라고 같은 헌금이 아닙니다.
땀 흘리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고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돈을 통하여
기적과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바쁘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다가 우선순위를 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이 내 대신 가서 예배드리고 와'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형식이나 관념에 있지 않습니다.
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직업도 중요합니다.
봉사가
교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현장은
여러분이 봉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이 예배의 처소요
그곳이 예배입니다.
교회에 와서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삶이 예배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그 곳을 변화시키라고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제물이 안 된 사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제물이 되십시오.
희생양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곳이 변합니다.
세상이 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게 됩니다.
몸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헌금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기도하는
돈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를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죽은 제물은 냄새가 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제물은 영향을 줍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이제 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 이라는 말은
온전하다 는 뜻입니다.
예배는 봉사입니다.
참된 예배란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헌신과 봉사가 없는 사람은
예배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질로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헌신할 때
진정한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제물되어 살게 하옵소서.
제물 되었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게 하옵시고
희생하는 기쁨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