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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비석과 계자조부님 비석 이야기
내가 사는 노원구 하계동에는 한글 고비묘(古碑墓)가 불암산 등산로 주변에 있어서 몇 번 가봤는데 이번에 전주 쇠용터에 있는 계자 조부님 묘를 이장한다고 하니 불암산 고비묘가 생각납니다.
이윤탁 한글영비는 이문건(성주이씨)이 서울 노원구 태릉 산속에 있던 아버지 이윤탁의 묘를 이전하여 어머니와 합장하면서 480년전에 세운 비라 합니다.
원래 태릉 원자력 병원 뒤에 있었는데 도로공사에 저촉되어 지금의 하계동으로 이전하면서 보물 제1524호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묘비 전면과 후면에는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전면에는 승문원 부정자 이윤탁과 부인의 합장묘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대충 부모님 은덕을 깊게 새긴다라는 뜻으로 흔한 일반묘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묘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측면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지 90년 된 시기에 최초로 한글 고문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지금은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왼쪽 측면에는 “이비는 신령스런 비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라고 당시 한문을 모르는 일반백성이 비를 훼손시킬까봐 묘를 지키려고 그 당시 한문은 글이고 한글은 언문이라 하여 한글은 글로 취급도 안하던 시절인데 양반이 한글로 새겼다고 하니 대단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비문에 힘 입었는지 5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잘 보전되고 있으며, 실제로 주민들에 의해 신물(神物)로 여겨져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이 비석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다고 합니다.
쇠용토 계자 조부님 묘도 순수한 한글묘는 아니지만 초기에 세운 낡은 비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이장되는 쇠용토 계자 조부님 묘는 1733년(1783년 배위 여산송씨와 합장)에 돌아가셨으니까 280년 전에 처음 묘가 조성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 새만금~전주간 도로공사 구간에 걸려 이장되는 묘지는 계자 조부님 묘를 포함하야 11기 정도가 이장 되는데 이곳은 목사공 집안의 집단묘가 형성된 곳입니다.
쇠용토 계자 조부님 묘는 전에도 시제 모시러 여러번 가본 적이 있지만 깊은 산속에 있어서 도로공사 저촉 등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새만금 가는 도로가 이 곳으로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서있는 계자 조부님 비석은 94년도 보상금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깨끗한 새 비석입니다.
도로공사에서는 계자 조부님 묘를 처음에는 도로 지장묘로 지정하지 않고 목사공 집안 10기 묘만 이장묘로 지정해서 공사하다가 계자 조부님 묘도 도로에 직접 접촉되지는 않지만 도로에 너무 인접해 있어서 추가로 지정하여 부득이하게 이장을 하게 된것이라 합니다.
계자 조부님 비문의 내용을 보면 조부님의 벼슬이라든가 조상님의 파조인 시중공의 내력 등 우리 족보에도 없는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보면 280여년 전에 세워졌던 초기 옛 비문의 내용을 참고하여 만든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94년도에 전주 서곡로 보상금으로 새로 비석을 세우면서 옛날에 세웠던 비석이 없어져서 아쉽기는 하지만 당시 한문으로 새겨진 원문을 쉽게 이해한다고 한글을 삽입한 것 같습니다.
한글 삽입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다행히 원문이 그대로 있어서 34세 계자 조부님 벼슬이나 시중공 단신 조부가 이씨왕족의 형이라는 기록 등은 족보에도 없는 글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34세 계자 조부님은 전주 산정리 35세 초흥 조부님보다 바로 윗대이니까 그 위로 이장하는 것은 잘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이장 등이 별 문제 없다 하니 괜찮지만 산정리 동네 입구 한가운데 세워지기 때문에 앞으로 동네를 개발하게 되면 또 이장해야 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이번에 쇠용토 공사구간에 저촉되어 이장되는 묘는 추가된 계자 조부님까지 11구가 되는 것 같은데 대부분 우리 목사공 후손들의 집안 묘인 것 같습니다.
11개 묘지 중 35세 익흥 조부님과 전의이씨 조부님 그리고 우리 계자 조부님만 비석이 있어 묘지가 확실하고 나머지 묘는 누구 묘인지 추측은 가능하지만 비석이 없기 때문에 서곡 제각 무연묘로 모시는 것 같습니다.
34세 계자 조부님도 31세 인회(麟會) 조부님이 서곡에 있으니까 서곡으로 모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목사공 이사들 특히 진희 감사와 병오 이사가 반대해서 전주 산정리로 이전한다고 합니다.
서곡 종토가 부족해서 무연묘를 빼고는 전부 서곡 이장이 안되기 때문에 35세 익흥 조부님도 못 옮긴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34세 계자 조부님만 서곡으로 이장이 안되다면 목사공 종중에서 우리 종중을 우습게 대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에 묘지가 남는 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있던 묘지가 이제부터는 무연묘가 되니까 비석 때문에 남는 묘는 제사 밥이라도 얻어먹어 다행이지만 무연묘는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계자 조부님 비석을 보니까 부사과 종6품으로 되어 있는데 무관이니까 지금 군인 계급으로 보면 영관급인지 위관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벼슬을 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비석이라도 세워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금 비석을 보면 “始祖諱의 十四世孫諱宮璡有二男長諱端信은 侍中公이시니 派祖이시다”라고 되어 있는데 280년 전에 세워진 원비석이 없어 져 알 수가 없으나 한자로 된 원비석이 낡아서 94년도에 세울 때 한글을 삽인 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원비석에는 始祖諱翰이라 새겨져 있을 것 같은데 翰이 빠진 것 같고 기왕 한글을 삽입할 바에는 “十四世孫諱宮璡의” 의를 삽입했으면 시조 휘한의 14세손 휘 궁진의 두명중 큰 아들 단신은 시중공이시니 파조이시다로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 같습니다.
가능한 원비석 한자를 그대로 살리려 한 것은 이해가 되나 원비석이 없어진 것이 참 아쉽습니다.
옛 비가 낡아서 세로 새길 때에도 가능한 옛비를 보관하던데 탁본이나 하다못해 사진이나 한장 남겼으면 후손들이 참고가 되었을 텐데 아쉽지만 이번에 이장하면서 주변을 찾아보면 혹시 옛비석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족보에도 없는 계자 조부님의 벼슬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다음에 족보 만들 때는 반드시 조부님 벼슬이 수록되었으면 좋겠고 족보에는 시중공 단신이 나라집 용부의 동생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비석에는 형이라고 기록된 걸 보면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시중공이 원래 전주이씨 큰집이지만 이씨조선 왕족으로 나라집이기 때문에 용부를 형으로 기재한 것 아닌가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고 나도 어디서 어렴프시 그런 기록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족보를 보면 계자 할아버님은 엄밀히 말하면 주자집 큰손인 31세 인희(麟禧) 조부님 증손입니다.
31세 인회(麟會) 조부님이 후손이 없는 바람에 인희(麟禧) 조부님 차남 제(悌)를 입양하고 제 조부님이 천영을 낳았으나 천영 조부님 역시 후손이 없어 인희 조부님의 장손 만영의 차남인 계(堦)자 할아버님을 입양하고 게자 할아버님게서 35세 초흥 조부님을 낳게 되어 후손이 귀하고 좀 복잡합니다.
초흥 조부님께서 36세 ①양, ②이(儞), ③간(侃), ④정 등 네 아들을 두어 번창하는 것 같더니 ①양은 40세에서 무후가 되었고 ②이(儞)는 민성, 민보, 민섭을 낳았으나 민성은 38세에서 무후가 되었고 우리가 선조로 모시는 ③간 조부님은 후손이 없어 결국 ②이(儞) 조부님이 낳은 큰 아들 민보를 양자로 받았고 37세 민보 조부님은 성규, 성대, 성능을 두셨는데 성규 조부님은 43세 이후 기록이 없고 성능은 민성에게 출계하였으며 우리의 선조는 38세 성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가 36세 이(儞) 선조님의 큰 아들 민보를 입양했으니 우리가 큰집인지 이 집안에 남아있는 민섭이 큰집인지 애매하긴 합니다.
우리 공덕집은 피를 통한 엄밀한 선조를 연결한다면 민보의 아버지는 간이 아니고 이(儞)가 되고 계자 조부님의 친아버지는 천영이 아니고 만영이므로 우리 공덕집은 결국 31세 인회(麟會) 조부님이 아니라 인희(麟禧) 조부님이 되기 때문에 결국 우리 공덕집은 목사공 장손집으로 봐야 되겠지요.
입양은 왜 되었을까요. 족보를 보면 입양을 한 선조들은 대부분 큰 벼슬을 하거나 재산이 많아서 입양한 것 같습니다. 인경, 인후도 후손이 없지만 인희나 인회 조부님보다 큰 아들인데도 입양을 안하고 인회(麟會) 조부님만 입양을 하고 있고 33세 천영 조부님도 아들이 없는데 형(만형)의 아들인 계 조부님을 입양하였으며 36세 간(侃) 조부님도 무후인데 형 이(儞)의 큰 아들인 민보를 입양하는 등 집안에 가문을 지킬만한 분만 입양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피가 안 통하는 남의 자식을 입양하여 후손으로 남기는 동물은 인간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동물들은 철저하게 강한자만 즉 피를 통해 후손을 유자하고 약한 자는 도태되었는데 이게 자연의 원리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입양제도가 없이 우리 공덕집이 큰집이라면 계자 조부님 이장문제야 당연히 우리가 신경 써야 되겠지만 36세 이(儞)집안(후손 민섭)이 우리 선조 간(侃)집안(후손 민보)보다 큰집이니까 오산집에서 이장해야 되는데 우리 공덕집에서 이장하고 있습니다. 뭔가 좀 잘 못 된 것 같지 않습니까.
36세 이(儞)집안(작은 아들 37세 민섭)은 38세 성삼, 39세 시운, 40세 41세 의식 42세 성근, 43세 병세, 44세 준규, 45세 진민 등으로 이어져 현재 오산리에 30여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이신 간(侃)선조는 이(儞) 조부님의 큰 아들 민보를 양자로 받아 38세 성대, 39세 시영, 40세 도식, 41세 존현, 42세 성근, 43세 병철, 44세 인규, 45세 진오로 이어져 공덕에 뿌리를 내려 80여명의 종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장을 주관하더라도 참석하던 안하던 오산집에 이장내용은 알리고 이장을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침 공사업체인 고려개발에서 이장 보상금 내역을 보내왔으니까 잘 되었습니다.
회장단에서 이장을 준비 중이니까 수고를 많이 하시는데 기왕 수고하시는 거니까 비용이 얼마나 들지는 몰라도 공사업체인 고려개발에서 보내온 보상금 내력과 향후 이장 공사비 추진 내역도 투명하게 기록 공개하고 이장 사진 등 장면을 촬영하여 공개하면 이 다음에 후손들이 참고가 되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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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복조카의 계자조부님 비석이야기는 물론 계자조부님 묘지이장문제가 야기되던이후 여러 안건 내지 의견을 상세하게 제시 해 주어 종원 모두에게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또한 이번 묘소이장에 대해 회장단모두의 열열한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매번 응신은 못하더라도 뜻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고 더욱 열심히 노력해주기를 부탁합니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영복이 형닙께서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종사에 많은 관심과 성의를 갖고 족보연구까지 하면서 다른사람이 깨닫지 못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알려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래도 제가 해야할일 들이었는데. . .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요.
윗글에서 설명하신 비석 읽기라던지, 언문비석의 보물지정 이야기 등 좋은 내용이었다고 보구요
다 좋은데 한가지 짚고 가야할 부분이 있어 글을 씁니다. 전화로 하면 빠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글을 쓰는게 더 깊은맛이 있는거 같네요 ㅋ
내용은 우리선조님 35세 초흥, 36세 양,용,간,정으로 알고있었는데 양,이,간,정 즉 둘째를 용(傭)이신데 이(儞)라고 표현하시기에 글짜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