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날에 태어나다 / 김창남 1
1. 오늘이 내 생일이다.
2. 며느리가 미역국을 끓여 왔다. 아들이 분가한 뒤로는 생일 미역국은 언제나 며느리 몫이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에는 생일 축하를 겸해 가족 외식을 하잔다. 번거롭다고 집에서 간단히 먹자고 했더니 아내가 “출근하는 며느리 고생시키려고 그러느냐” 하며 펄쩍 뛴다. 정작 내 생일인데도 내 의견은 늘 뒷전이지만, 그렇다고 서운함을 드러낼 나이도 지났다. 내 생일을 핑계로 온 가족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3 내 생일은 본래 음력 섣달그믐날이다. 그해 음력 섣달은 스물아홉 날로 끝났고 나는 그 마지막 날에 태어났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큰어머니 댁에서 설 차례에 쓸 전을 부치던 중 해거름에 산통이 와, 아래채 할머니 방에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세상에 나오던 순간부터 나는 늘 ‘차례 준비 중’에 끼어든 존재였던 셈이다. 태어나는 날부터 남의 손이 바쁘고 집안이 분주했다는 사실이 훗날까지 내 생일의 운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4.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어머니는 고향 큰아버지 집으로 피난 와서 얹혀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해, 어머니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 무렵 할머니는 유난히 어머니를 편애했다고 한다. 아들 없이 딸만 낳은 큰어머니는 자연스레 할머니 눈 밖에 나있었고, 형에 이어 나까지 아들을 둘이나 낳은 어머니에게 할머니의 정이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집안의 정과 미움이 그렇게 갈라지고 섞이는 와중에 나는 조용히 태어났다.
5. 그해 설 명절은 어머니의 출산으로 큰어머니가 명절 준비와 차례를 도맡게 되어, 불평이 잦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큰어머니에게 미움을 산 셈이 되었다. 방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산후조리는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아들만 쑥쑥 낳는 며느리가 복스럽다며, 아가 얼굴이 너무 예쁘다고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태어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부담이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명절의 소란 속에서 호불호가 섞인 존재였던 셈이다.
6.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생일이면 고깃국을 먹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내게 생일은 나만을 위한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점심을 거르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명절 선물로 여기저기 청주를 한 병씩 보냈고, 그 심부름은 늘 내 몫이었다. 심부름을 가면 집집이 부치고 있던 전 쪼가리나 썰다 남은 가래떡을 조금씩 맛보라고 내주었다. 그게 점심이었다. 어머니도 명절 준비에 바빠 점심을 따로 차릴 겨를이 없었고, 이것저것 주워 먹어 배도 고프지 않았다.
7.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생일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궁핍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날이 생일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일이었다. 별난 추억이었다. 아이들 생일상을 차릴 때마다 그 얘기를 꺼내면 아내는 “또 그 얘기냐”라며 이제 그만하라고 손을 내젓는다.
8. 결혼하고 첫해 맞이한 생일은 어머니가 생일상을 차려주셨다. 명절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새며느리를 본 기쁨 때문이었는지 상은 제법 그럴듯했다. 온 가족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으며, 나는 처음으로 ‘생일다운 생일’을 누렸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평소 혈압이 높던 어머니는 내 생일을 지내고 열이틀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아내와 나는 곧바로 분가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생일상은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였던 셈이다.
9. 분가 후 처음 맞이하는 설 전날이자 내 생일날, 설을 쇠러 형님 집에 갔다. 형수와 아내는 차례 준비로 분주해서, 내 생일은 자연스레 잊힌 듯 넘어갔다. 오후, 무료해진 나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낮술을 했다. 저녁 무렵 돌아와 마루에 오르다 댓돌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형수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생일인데도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 서운해서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나는 다친 데도 없고, 술 때문도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집안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형수는 얼굴을 들지 못했고, 아내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생일은 그렇게 또 한 번 집안의 골을 만들었다.
10. 결혼 후 세 번째 맞이하는 생일을 앞두고 아내가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때는 인터넷도 없어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하니 양력 생일은 해가 바뀐 51년 2월 5일이었다. 그해는 음력 생일보다 보름이나 앞서있었다. 바꾸고 보니 좋은 점이 많았다. 처음으로 아내와 둘이 오붓하게 외식을 하며 생일을 보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생일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생일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11. 내친김에 아내 생일도 양력으로 바꾸었다. 아내의 양력 생일은 공교롭게도 결혼기념일과 겹쳤다. 아내는 두 번 축하받을 일이 하나로 줄어,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라 했지만, 나는 경사가 겹쳐 더 뜻깊지 않으냐고 달랬다. 사실은 아내 생일을 잊어 혼났다는 친구 얘기가 떠올라, 겹치면 잊을 확률이 줄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아이들까지 모두 양력으로 생일을 지낸다.
12. 언젠가 “꽃은 그저 꽃일 뿐인데 미우니 고우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게 무어냐”고 일갈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문득 생일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3. 그렇다. 생일은 그저 태어난 날일 뿐인데, 명절과 겹치면 어떻고 꼭 제날이 아니면 또 어떤가. 그동안 나는 생일이라는 이름의 작은 의식에 너무 많은 마음을 써 온 것은 아닐까. 이제는 안다. 생일은 축하받기 위해 존재하는 날이 아니라, 그저 여기까지 살아왔음을 조용히 돌아보고 고마워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첫댓글 김창남 선생님
섣달 그믐날에 태어나셔서 생일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겠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양력에 생일상을 받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 일어난 풍습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축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조용히 뒤돌아 보는 것도 참 좋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살아오면서 소소한 에피소드를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은 추억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