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 속에서도 썩지 않은 염주
나의 할머니는 종육매(鍾六妹)라고 하며, 대만 병동현(屏東縣) 인락향(麟洛鄉) 인락교(麟洛橋) 부근에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에게 붙잡혀 남양(南洋)으로 끌려가 군부(軍伕)로 일하게 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그 뒤 40여 년 동안 수절하며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데리고 몹시 가난하게 살아가셨다.
할머니는 비록 경전을 읽어 본 적은 없었지만 부처님께 예배하고 아침에는 채식을 하였으며, 불법을 정신적인 의지처로 삼으셨다. 할머니는 매우 자비로운 분이어서 가족들이 살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내가 기억하기로 형이 어렸을 때 새총으로 새를 쏘곤 하였는데, 할머니께서 못하게 하셨다. 또 우리에게 밤길을 걷다가 무서울 때에는 그저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어렸을 때 나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늘 병동에 가서 할머니를 뵈었다. 할머니와 가까이 지낸 덕분에 아주 어릴 때부터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할머니가 계셨으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았다!
할머니가 왕생하시기 한 해 전, 병이 위중하여 병동 공군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나는 마침 학교 기말고사 기간이라 할머니를 뵈러 갈 수 없었다. 시험을 마치고 서둘러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병원에서 집으로 모셔 온 뒤였다. 할머니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의사는 연로하여 신체 기능이 쇠퇴하였고 폐(또는 간)에 물이 차서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나는 위독한 사람을 위해 7일 밤낮으로 끊임없이 염불하면, 병을 낫게 하지 못하더라도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아마 참운(懺雲) 장로에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를 위해 향을 피우고 염불하기 시작하였다. 부득이하게 쉬어야 할 때에는 염불기를 틀어 염불이 계속 이어지게 하여 명호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다음 날 밤, 나는 집 안마당에서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절을 하며 할머니를 위해 부처님께 기도하였으며,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쉬러 갔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부엌에 가 보니 물통 안에 살아 있는 큰 물고기 세 마리가 있었다. 외숙모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할머니의 몸보신을 위해 먹으라고 가져다준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물고기들을 방생하자고 부탁하였다. 외숙모의 동의를 얻어 사촌 오빠가 나를 절까지 데려다주었고, 그곳에서 물고기들에게 귀의를 시킨 뒤 강가로 가져가 방생하였다. 세 마리의 물고기는 물속으로 헤엄쳐 갔다가 다시 모두 물가로 돌아와 마치 우리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하더니, 그제야 깊은 물속으로 헤엄쳐 갔다.
그날 오후, 할머니가 깨어나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
“배고프다!”
할머니는 일어나 잠시 앉아 있고 싶어 하셨고, 우유도 마시고 싶어 하셨다. 우유를 다 마신 뒤 말씀하셨다.
“무슨 음악이냐? 참 듣기 좋구나!”
알고 보니 할머니는 염불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침대에서 내려와 몇 걸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력이 점차 회복되었다.
그날 오후 나는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할머니, 정말 나으셨어요. 이제는 염불하셔야 해요!”
나흘째 되는 날, 할머니는 일어나 앉으셨다. 이모가 할머니가 믿던 신단(神壇)에 가서 신령에게 물어보았는데, 부처님께서 할머니의 수명을 늘려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일주일 안에 할머니는 건강을 회복하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부처님께서 염불하시라고 시간을 더 주신 거예요. 오래 살고 싶으세요?”
“싫다! 오래 사는 것은 늙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나는 이미 눈도 귀도 다리도 성하지 않으니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미타불을 따라가서 수행하시면 어떠세요?
“그야 좋지! 하지만 나는 글을 모르잖아!”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좋지! 나는 아미타불을 위해 마당도 쓸고, 물도 끓이고, 밥도 지어 드릴 수 있다.”
나는 할머니에게 손에 차는 염주 하나와 작은 돌 열 개를 드렸다.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여 염불 횟수를 세기 위한 것이었는데, 200번 이상까지 셀 수 있었다. 할머니가 염불하며 왕생을 구하시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매우 기뻐하시며 매일 염불하셨고, 몸도 점차 건강해지셨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뒤, 나는 여름방학 동안 북부 지역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를 뵈러 갔는데, 할머니는 아주 즐겁게 염불하고 계셨으며 염주와 돌은 손으로 하도 만져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할머니는 며칠 전 어느 이른 아침에 아미타불을 꿈에서 뵈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미타불께서는 할머니를 보며 미소를 지으셨고, 양옆에는 아름다운 두 여인이 서 있었다고 하셨다. 두 여인은 모두 연꽃을 밟고 서 있었는데 신발은 신지 않았고, 하늘에는 용이 날아다니는 것도 보았다고 하셨다.
내가 물었다.
“아미타불께 할머니를 데리고 가 달라고 여쭤 보셨어요?”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잊어버렸지!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보고만 있었어.”
할머니는 또 다른 날 아침에는 꿈에서 연꽃이 가득한 연못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연못가의 땅은 매우 청정하고, 근처의 집들도 모두 보기 좋았으며, 아이들이 땅에서 꽃을 줍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곳에는 닭이나 오리를 기르는 집이 하나도 없더라!”
이번에는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 광경을 계속 보았다고 하셨다.
내가 말하였다.
“정말 잘됐네요! 그곳이 바로 서방정토예요. 다음에 또 아미타불을 뵙게 되면 꼭 기억하고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라고 말씀하셔야 해요.”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
내가 타이베이로 돌아온 지 2, 3주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왕생하시는 꿈을 꾸었다. 또 꿈에서 내가 참공(懺公) 장로에게 물었다.
“저희 할머니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셨습니까?”
꿈속에서 참공 장로가 대답하였다.
“염불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곳에 왕생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꿈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는 듣고 말씀하셨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할머니는 잘 계신다!”
그런데 3, 4일이 지난 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정말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몸이 조금 불편하셨을 뿐이어서 그날 저녁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다음 날 아침 7시경 누군가 할머니를 찾아가 보았을 때에는 이미 편안히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그 뒤 어머니는 꿈에서 할머니를 뵈었는데,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염불하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앞에서 수행하니 정말 좋구나!”
할머니가 왕생하셨을 때는 마침 여든 살이었고, 당시 나는 꼭 스무 살이었는데, 나와 할머니는 띠도 같았으며 생일도 같은 달 같은 날이었다.
나는 병동으로 돌아가 할머니를 위해 염불하였고, 봉산불교연사(鳳山佛教蓮社)의 연우들을 청하여 할머니를 위해 조념하도록 하였다.
할머니를 입관할 때, 어머니와 이모의 띠가 할머니의 띠와 상충한다는 이유로 관습에 따라 두 분은 곁에서 할머니의 옷을 갈아입히고 입관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관을 닫은 뒤 두 분은 마음이 몹시 슬펐다. 모두가 할머니를 위해 염불할 때, 두 분도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관 속에서 미소 짓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는데, 마치 관이 투명해진 것 같았다. 두 분은 “엄마!” 하고 부르며 손을 뻗어 할머니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두 분이 손을 뻗어 관을 만지는 모습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나는 사촌 오빠에게 말하였다.
“오빠도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하면 관 속을 볼 수 있어요.”
사촌 오빠는 반신반의하였지만, 마침내 자신도 관 속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정성껏 염불하였다. 관을 바라보자 뜻밖에도 관 너머로 할머니의 상반신이 보였다.
할머니는 평생 사람들을 인자하고 후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장례를 치를 때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조문하러 왔다. 할머니가 여든이 넘도록 장수하셨기 때문에 풍습에 따라 장례에 쓰는 흰색 물품은 모두 붉은색으로 바꾸었다. 할머니의 장례는 불법에 따라 치르고 음식도 모두 채식으로 마련할 수 있었지만, 유해는 화장할 수 없어 풍습에 따라 관을 땅에 묻어야 했다.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나는 몹시 슬펐다. 노쇠한 할머니의 몸도 60년 전에는 지금의 나처럼 젊었을 것이다! 60년 뒤에는 나도 할머니처럼 늙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나는 결혼하여 나중에 늙은 할머니가 되느니 차라리 일찍 출가하고 싶었다. 생로병사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며,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해탈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할머니가 왕생하신 지 2년 뒤인 민국 69년(1980년), 나는 출가하였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나를 제도하러 오신 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출가한 지 16년이 지난 뒤에야 병동으로 외삼촌을 찾아뵈러 갔다. 외삼촌은 서운경(徐雲鯨) 선생으로, 고향 마을의 인장(鄰長)을 맡고 있었다.
외삼촌은 매우 기뻐하며 나와 함께 채식 국수를 먹은 뒤 거실로 가서 벽에 걸린 할머니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액자 아래의 고리에는 염주 하나가 걸려 있었다.
외삼촌이 나에게 물었다.
“이거 기억나니?”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외삼촌이 말하였다.
“이게 바로 네가 할머니에게 염불하시라고 드렸던 그 염주다. 할머니를 매장하고 8년이 지난 뒤, 풍습에 따라 관을 열어 유골을 수습해서 항아리에 모셨다. 관은 이미 썩어 있었고 할머니의 몸도 모두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갔는데, 손뼈는 무언가를 한 덩어리로 꼭 쥐고 있었다. 그것을 꺼내 깨끗이 씻고 보니 바로 할머니가 사용하시던 그 염주였다. 단향나무로 만든 염주알은 조금도 썩지 않았고, 염주를 꿴 줄조차 끊어지지 않았다.”
외삼촌이 말하였다.
“이 염주는 이제 우리 집안의 가보가 되었다!”
나는 할머니가 우리에게 이 염주를 남겨 주신 것은 우리 모두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라는 뜻임을 알았다!
(『법운잡지(法雲雜誌)』 제5기, 자탁(自鐸) 법사 구술·주성의(周聖儀) 기록, 1998년 9월)
생각건대:
서방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모시며
마당 쓸고 밥을 짓고 물을 끓이려 하였건만,
서방에는 그런 일이 없고
도리어 아미타불께서 나를 보살펴 주심을 어찌 알았으랴.
옷이든 음식이든 때맞추어 마련해 주시고
내게 지혜를 주시고 신통을 주시니,
그 나라 이름처럼 즐거움이 끝이 없어
마침내 성불하여 열반을 얻으리.
첫댓글 출가하신 스님의 역사가
할머니를 통해 기록 되었네요
참으로 훌륭한 인연과
수승한 사례 찬탄합니다
부산의 어느 연우님께
들은 화장장에서 타지
않은 아미타불 목걸이가
생각 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 치매 이모의 극락왕생
작성자:극락행(소보살)
작성시간:2024.05.09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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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향전칭(一向專稱)일향전념(一向專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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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念佛真好)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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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또 다른 날 아침에는 꿈에서 연꽃이 가득한 연못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연못가의 땅은 매우 청정하고, 근처의 집들도 모두 보기 좋았으며, 아이들이 땅에서 꽃을 줍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이 부분도 너무 좋아 그렸습니다
나무아미타불!감사합니다
수희찬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합장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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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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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관에 108염주를
넣어드렸던 기억이 새롭게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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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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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왕생, 수희찬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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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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