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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고발하는 자
본문 : 누가복음23:1~12
돌림기도
말씀 나눔
무리의 고발
(눅 23: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눅 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A) 상황이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기도 하고 그 분이 행하신 많은 기적과 병 고침을 보았던 무리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당시 로마로부터 파송 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그 고발내용은 ① 민심을 현혹(眩或)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②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며 ③ 자칭(自稱)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점입니다.
B) 무리들이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자기 민족을 로마의 학정에서 구원에 줄 정치적인 Messiah관(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저들이 얻고자하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무리들은 실망을 하고 예수님을 고발하기에 이릅니다.
2. 내면(內面)세계 돌아보기
Q1. “일어나” “고발하여” “끌고 가서” “하더이다”라는 행위의 표현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Q2.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라는 고발 내용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눅 20:25)“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음에도 저들은 거짓으로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Q1.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기도방향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실망하여 주님을 등지고 세상의 권세 앞에 나가는 나의 모습은 없는지를 살펴봅시다.
빌라도의 질문
(눅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눅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 23: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눅 23:6) 빌라도가 듣고 묻되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눅 23: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A) 상황이해
빌라도는 식민지 백성인 예수님이 왕이라고 자처(自處)하였다는 고발내용을 따라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이 “옳다”라고 답변하자 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시대의 통치에 대한 개념은 식민지의 정치적인 자율권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기에 로마의 법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럼에도 백성은 소동을 하게 되니 골치가 아픈 빌라도는 헤롯의 관할에 속한 예수님을 그곳으로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2. 내면(內面)세계 돌아보기
헤롯의 질문
(눅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눅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 23: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눅 23: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본문∥ 누가복음 22:24~38
누가 크냐
(눅 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눅 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눅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의 자기 확신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눅 22: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
제자들의 문자적인 해석
(눅 22: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눅 22: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눅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눅 22: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찬송∥ 343장(시험을 받을 때에)
◈ 핵심구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1. 마음열기
나는 나의 롤 모델(role model) 로 삼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2. 본문이해하기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자신은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들의 것임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것을 고백하지만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제자들에게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3. 말씀으로 나눔하기
① 누가 크냐(24절~30절)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思考)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다른 사람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Q.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 분 덕에 크고자했던 야망을 없었는지 살펴 봅시다.
A. 저는 4살 때 자식이 없어 외롭게 보내시던 고모 댁으로 보내졌습니다. 방학 중에는 집에 다녀갔지만 12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집에 오니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밑에 있는 여동생은 저에게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고 형들은 밥상에서 밥을 빨리 먹고 식탐(食貪)이 있었던 저를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동네를 다니면서 일어났던 사건들의 소식을 재미있게 각색해서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은 집에서는 동네이장으로 불리었습니다.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우두머리가 되려고 노력을 해서 제법 공부도 잘 하고 늘 반장을 하였습니다. 이런 성향이 다분히 있었던 제게 17살 때 서대문에 소재하고 있었던 순복음 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님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설교에 큰 충격을 받고 나도 저런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 후로는 성공적인 목회자의 이상(理想)은 설교를 잘하는 큰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서도 임원으로 활동하며 늘 수다스럽고 남을 곧잘 웃기는 말재주로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란 평판아래 더욱 자신감을 갖고 개척을 하게 되면 목회가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농촌목회 4년 서울에서 부목사 3년 반을 거치면서 크게 성공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맨 땅에서 개척하는 것이 더 좋게 보여 일산 백석동의 지하 40평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금세 성장할 것 같은 기대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고 장소 탓으로 돌려 지하에서 상가 2층으로 옮겼지만 여전히 교회는 마음먹은 대로 성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개척 7년 만에 시도하여 이뤘습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돈을 빌려 건축한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결국 경매로 넘어가게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저의 야심은 그것으로 만족 못하고 언제나 쫓기듯 목회를 하였습니다. 크고자 하는 야심에는 섬김의 정신이 고갈(枯渴)된 상태를 말합니다. 전혀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을 수 없고 나의 야심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모습으로만 비춰질 뿐입니다. 목회의 진정성은 섬김에 있고 사랑에 있습니다. 이런 목회자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랜 시간을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하게 하셨고 작은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세워가는 것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누구를 섬기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이용당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어찌 사람들이 올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면서 오늘까지 주의 종을 낮은 자리에 머물게 하셔서 참사랑을 실천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② 베드로의 자기 확신(31절~34절)
예수님은 31절에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라고 하십니다. 여기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는 옛날 이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시몬을 만나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게바는 아람어이고, 헬라어로는 베드로입니다. 시몬이 옛 성품을 대표한다면 베드로는 새 성품을 대표합니다. 물론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다고 해서 아예 시몬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다시금 실수 하거나 실패 할 때면 예수님은 재미있게도 베드로를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의 이름인 시몬아, 시몬아라고 두 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 엄숙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베드로의 옛날 이름인 시몬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를 마치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단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시몬을 청구하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너희들 바로 제자들 끼지도 요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곡식을 까 불고 다음을 때 이리 저리 흔드는 것과 같이 사단이 베드로 한 사람을 이리 저리 던지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를 다 유혹하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집어 삼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미 사단은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유다를 집어 삼키었습니다. 누가복음22:3절에서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사단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다른 제자들까지도 다 집어 삼키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개인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하나만 넘어지면 다른 제자들 역시 다 넘어지고,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베드로 하나만 바로 되면 베드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집중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개인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은 계속 무엇이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 22:32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장차 베드로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에게 사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당장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족할 것이라는 것을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돌이키고, 회개한 후에는 네 형제를 더욱 굳세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큰 소리 쳤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눅 22:33-34 ). 예수님 말씀하신 그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들어갈 때 멀찍이 따라가면서 거기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니 닭이 울었습니다. 그때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목양의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는 다시 일어났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훌륭한 사도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이방 선교의 문이 열리는 역사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넘어지고, 부인하고, 실수하지만, 장차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고 돌아와서 수많은 형제들을 굳게 하는 사명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넘어지지만 곧 회개하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세게 해주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누가복음이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장차 그렇게 되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기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베드로가 깨닫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형제들을 믿음을 북돋아 주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넘어짐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붙잡아 주며 더욱 굳게 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편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Q. 내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면서 요구한 사건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벗어난 경험이 있습니까? 이 과정에서 이기게 하시는 주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A. 교회예배당이 경매로 넘어가고 저는 구치소에 수감되면서 모든 소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앞길이 캄캄하여 목회에 대한 소명(召命)의식도 사라지고 Vision도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고, 더욱 심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환상을 통하여 주신 것이 거짓이 아닌가하는 의구심(疑懼心)도 가졌습니다. 목회자로 삶을 지탱할 것이 아니라 사업가로 변신하는 것이 맞지 않나하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구상하고 이리 저리로 방법을 찾아 헤맸던 적도 있습니다. 사단이 저를 말 까부르듯 하여 내 안에 담겨 있는 목회자의 소명감도 잃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도 헛된 곳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수치와 모욕이 채찍질치는 것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나의 초라한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기도하던 중 나의 이런 어리석음이 통곡과 함께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다시금 소명감을 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목회의 원리를 깨닫도록 우리들교회 Seminar를 참석하게 하였습니다. 천국을 여는 열쇠가 회개이며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작정한 축복을 누리는 것이 회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나의 약함을 드러나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므로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회개함으로 거룩에 이르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③ 제자들의 문자적인 해석(35절~38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삶에 뭔가 심상치 않은 전환의 때가 왔음을 느끼게 합니다. 전에는 제자들끼리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에도 전대나 배낭이나 여벌 신발도 가지고 가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전대도 갖고 배낭도 준비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칼을 지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서 무장봉기나 무력저항을 명하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과 핍박과 시험의 때가 이제 곧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닥칠 것이며 이에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주의시키고자 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전대나 배낭이나 여벌 신발 없이 다녀도 부족한 것이 없던 때와는 전혀 다른 고난과 시련의 때가 되었으므로 그 고난과 시련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였던 것입니다.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는 것은 이제 닥칠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숨을 잃는 일이 있더라도 그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검이 육신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도구로서의 칼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지키기 위한 영적 능력으로서의 칼임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Q.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말씀합니다. 믿음생활이란 십자가를 외면하고는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어떻게 내 사람에 적용하시겠습니까?
A. 저는 일반대학을 나왔기에 대학 때 만난 친구들은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군 장성, 은행 지점장, 기업의 임원들로 나름대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껏 살면서 이사를 수없이 다녀야 했고 전세는커녕 매월 집세를 내야 되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노후대책을 위한 연금도 없고 재산도 모아둔 것이 없습니다. 저의 상황을 아는 지인(知人)들은 많은 염려를 해주며 생활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냐며 충고들을 합니다. 제 나이가 환갑을 넘기니 저에게는 가망성이 없는 듯 보였는지 아내를 내보내서 생활비를 벌어 오도록 해야 되지 않겠냐며 사회복지사를 추천하는가 하면 보험설계사로 일해보라고 권유(勸誘)들을 합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정신이 버쩍 들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게 지워진 십자가는 생활고(生活苦)입니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의 환경 속에서 주님을 절대 의지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없는 것이 저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내게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의 적용은 생활에 얽매이는 것에서 벗어나 믿음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위에 믿음을 건축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4. 구속사로 해석하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제자들 간에 누가 크냐에 대한 논쟁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기는 자로 오신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으로 이뤄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 역시 주님과 함께 고난의 시련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됨을 말씀하시면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활의 염려 또는 시련으로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믿음을 온전히 지킬 것을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
개 인∥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주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도 실현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은 겸손하고 낮은 자리에 스스로 앉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고 주님을 따른데 필요한 희생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공동체∥ 주님의 때가 가까운 이 시대에 사람들은 더욱 음란하고 강퍅(剛愎)해 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김포우리들교회는 깨어 기도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배처소가 순조롭게 마련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