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울주군 천전리 각석 [주요 텍스트 자료] <화면 번호> < 내용 > 3.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에 대하여 5.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신라인의 기록 9. 발견 경위 12. 천전리각석 암각화 성격 20. 서석곡 24. 기미명 ; 심맥부지(진흥왕) 방문 기록 26. 법흥왕에 대하여 27. 진흥왕에 대하여 1. 천전리 각석있는 대곡천. 개울 반대편 공룡발자국이 있는 곳. 반석 위에서는 신라시대 화랑들이 와서 수련을 하였다. 2. 대곡천 공룡발자국 장소, 화랑들의 수련장소 3.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 * 공룡발자국 화석은 공룡의 종류, 이동경로, 행동패턴, 생활방식을 알 수있는 자료다. * 화석은 약 1억년전 전기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 *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중생대 퇴적분지 중 울산은 경상분지 하양층군 대구층에 속하며 이암과 셰일이 반복되는 층에 공룡발자국이 포함되어 있다. * 이 곳 공용발자국 화석은 약 1,750㎡ 너비의 바위에 분포하며 총 131개가 확인되었다. * 대형 초식공룡인 한외룡과 용각룡 십여 마리,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이구아나룡에 속하는 고성룡 한 마리의 발자국 등이다. * 조각류는 24~40cm, 용각류는 60~80cm 크기(길이)를 보여 대부분이 중형 또는 대형에 속한다. * 공룡들이 걸어간 발자국 길은 보이지만 평행한 보행렬은 확인할 수없어 공룡들이 일대를 평화롭게 배회했던 흔적으로 짐작된다. * 울산지역 중생대 자연환경과 자연사 연구에 주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4. 1억년전 백악기 시대 공룡 발자국. 이 지역에서 131개가 확인됨. 5. 선사인과 신라인의 기록 울주 천전리 각석 *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은 태화강 상류 대곡천 강가에 있는 높이 약 2.7m 너비 9.5m 되는 바위로,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신라 말까지 새긴 많은 그림과 글씨가 있다. * 1970년 12월 24일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반고사 터를 찾으러 왔던 동국대학교박물관 불적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 울주 천전리 각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이며, 울산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보(제147호)이다. * 바위 그림은 윗단에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등이 새겨져 있으며, 아랫단에는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 그림 등이 있다. * 명문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바위 중간부분 하단부에 있는 을사명(원명, 525년)과 기미명(추명, 539년)이다. * 525년 (법흥왕 12년, 을사년) 6월 18일(음) 새벽에 사부지갈문왕(법흥왕의 동생) 이 어사추여랑과 이곳에 놀러와서 이 골짜기 이름을 서석곡이라 하였다. * 그로부터 14년 뒤인 539년 (법흥왕 26년, 기미년) 7월 3일(음)에 지몰시혜비(법흥왕의 딸)가 남편인 사부지갈문왕(법흥왕 아우, 삼촌)을 그리워하여 심맥부지(진흥왕, 아들)와 부걸지비(법흥왕비, 어머니) 등과 함께 천전리 각석을 방문했다. * 천전리 각석 계곡은 선사인들 뿐만 아니라 신라 왕족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였다. 이밖에도 각석에는 신라 귀족, 승려, 화랑 등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글자는 마멸이 신해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신라 역사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6.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천전리 계곡 대곡천 천전리 각석 현장 7. 대곡천 천전리 각석 현장 * 천전리 각석 계곡은 선사인들 뿐만 아니라 신라 왕족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였다. 이밖에도 각석에는 신라 귀족, 승려, 화랑 등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글자는 마멸이 신해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신라 역사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8. 대곡천 천전리 각석 현장 * 이 계곡은 사부지갈문왕이 방문해서 명문을 새기고 서석곡(書石谷)이라 칭했다. 9. 대곡천 천전리 각석 발견 경위 * 1970년 12월 24일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반고사 터를 찾으러 왔던 동국대학교박물관 불적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10. 울주 천전리 각석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이며, 울산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보(제147호)이다. 11. 문화해설사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너비 약 9.5m 높이 약 2.7m 정도로 길게 네모난 형태이며, 위쪽이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12. 국보 제147호 *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너비 약 9.5m 높이 약 2.7m 정도로 길게 네모난 형태이며, 위쪽이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 바위 좌측에는 쪼기 기법으로 새긴 사람과 동물그림을 볼 수 있으며 그 위에 갈기 기법으로 덧새긴 마름모, 등근무늬, 나선무늬, 물결무늬 등의 추상적인 문양들이 바위 전면에 걸쳐 확인된다. * 이런 기하학적 형태의 문양은 청동기시대 동경이나 동검같은 유물에 표현된 문양이나 고인돌 덮개돌에 새겨진 암각화와 유사하여 청동기시대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 새긴 가는 선 그림은 바위 아랫부분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람의 옷차림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행렬, 돛을 단 배, 용 그림 등을 볼 때 신라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13. 천전리각석 원시인들이 새긴 문양 *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은 태화강 상류 대곡천 강가에 있는 높이 약 2.7m 너비 9.5m 되는 바위로,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신라 말까지 새긴 많은 그림과 글씨가 있다. 14. 천전리각석 문양 15. 천전리각석 문양 16. 천전리각석 문양 * 바위 좌측에는 쪼기 기법으로 새긴 사람과 동물그림을 볼 수 있으며 그 위에 갈기 기법으로 덧새긴 마름모, 등근무늬, 나선무늬, 물결무늬 등의 추상적인 문양들이 바위 전면에 걸쳐 확인된다. 17. 천전리각석 그림 18. 천전리각석 문양 * 바위 그림은 윗단에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등이 새겨져 있으며, 아랫단에는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 그림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기법이다. 19. 천전리각석 문양 *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 새긴 가는 선 그림은 바위 아랫부분에 집중되어 있으며, 사람의 옷차림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행렬, 돛을 단 배, 용 그림 등을 볼 때 신라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20. 천전리각석 문양 * 명문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바위 중간부분 하단부에 있는 을사명(원명, 525년)과 기미명(추명, 539년)이다. * 525년 (법흥왕 12년, 을사년) 6월 18일(음) 새벽에 사부지갈문왕(법흥왕의 동생) 이 어사추여랑과 이곳에 놀러와서 이 골짜기 이름을 서석곡이라 하였다. * 그로부터 14년 뒤인 539년 (법흥왕 26년, 기미년) 7월 3일(음)에 지몰시혜비가 남편인 사부지갈문왕을 그리워하여 아들 심맥부지(진흥왕)와 부걸지비(법흥왕비) 등과 함께 천전리 각석을 방문했다. 21. 천전리각석 신라인들의 명문 22. 천전리각석 신라인들의 명문. 왼쪽 부분은 사부지갈문왕이 방문했던 기록 오른 쪽은 갈문왕의 부인 지몰시혜와 아들 심맥부지(진흥왕)가 방문했던 기록 * 525년 진흥왕 부 사부지갈문왕이 천전리 각석 방문 * 539년 진흥왕 즉위 1년전 6세 때 어머니와 같이 천전리 각석을 방문. -모자가 남편과 아버지를 추모하여 그 흔적을 찾고자 함. 사부지 갈문왕이 이곳에 글을 새겨 두었기 때문이다. -어린 진흥왕의 이름은 심맥부지 23. 을사명은 사부지갈문왕 방문 기록 24. 기미명은 539년 지몰시혜비와 아들 심맥부지가 방문한 기록 * 처음 을사년 525년에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立宗)과 여동생 어사추여랑이 왔다, * 그리고 어느해 어사추여랑이 먼저 죽었다. * 정사년 537년에는 사부지갈문왕(立宗)이 죽었다. * 그리고 2년후 부인과 6세의 어른 아들 심맥부자가 사부지갈문왕을 그리워하며 여기를 방문한 것은 기미년 539년이다. 이때 법흥왕의 왕비인 부걸지비(지몰시혜비는 법흥왕의 딸, 부걸지비는 어머니)도 함께 왔다. 사부지갈문왕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때로부터 14년 후이다. * 이듬해 540년에는 법흥왕이 죽고 조카인 심맥부지가 7세의 어린 나이로 진흥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지몰시혜비가 당분간 섭정을 했다. 25. 두 명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역사자료 ; 갈문왕제도에 대하여. * 갈문왕은 초기에는 왕과 다른 족단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칭호다. 김씨 왕위 세습 확립 이후에는 왕의 동생이 갈문왕으로 임명됐다. 26. 두 명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역사자료 ; 왕호 법흥왕은 시기에 따라서 왕을 칭하는 명칭이 달랐다. 처음 매금왕-> 대왕, 태왕-> 무즉지 태왕 -> 성법흥대왕 법흥왕에 대하여 (제23대, 재위 514~540년) * 아버지 지증왕 개혁 정치 계승, 중앙집권적 개혁정치 완성 * 517년(4년), 병부설치, 왕의 군사권 장악 * 520년(7년), 율령반포, 백관의 공복 제정, 17관등, 골품제 등 * 522년(9년) 대가야와 혼인동맹, 이찬 비조부 누이동생을 대가야에 시집보냄. * 527년(14년) 이차돈 순교, 불교 공인. -528년(15년), 왕실 불법 봉행 , 말년에 법흥왕 자신 법호 法空 * 531년 상대등 설치, 귀족회의 주재시킴, 이찬 철부는 최초 상대등 * 532년(19년) 금관가야 멸망. 금관가야 마지막 국왕 김구해(구형왕, 양왕)가 세아들과 함께 투항. 신라에서 대우를 받음. 김구해-> 김무력-> 김서현- > 김유신(통일 대업에 큰 공로) (김서현 딸, 김유신 여동생 딸 문희는 문명왕후로 태종무열왕비 -> 문무왕 * 536년(23년) 독자적 연호 사용, 건원建元 신라의 연호 시작. * 540년 (재위 27년) 사망,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묻힘. 27. 두 명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역사자료 ; 진흥왕에 대하여 [진흥왕(제24대, 재위 540~576)] * 7세에 법흥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신라의 국위를 크게 떨쳤다. (법흥왕은 진흥왕의 큰아버지도 되고, 외할아버지도 된다. 아버지는 법흥왕의 아우, 어머니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딸) * 처음 어려서 어머니 지몰시혜비(지소부인, 법흥왕의 딸, 삼촌과 결혼)가 섭정 * 연호 3개 사용 ; 551년 연호를 開國(이 때부터 친정한 것으로 보인다.). 568년(大昌), 572년 홍제(鴻濟) ; 자주의식 * 545년 거칠부에 명하여 <국사> 편찬 * 대가야의 우륵 귀순(나라 어수선 음악활동 방해), 가야금 음악 장려 *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상류 차지, 성왕이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냄, 작은 왕비로 삼음. * 553년 백제를 쳐서 관상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고 한강하류 지역도 차지. 신주설치, 김무력(김유신 조부)장군 군주로 삼음. * 556년 비열홀주 설치(안변지역)성중을 군주 삼음. * 562년 대가야 멸망시킴. 565년 대야주(합천) 설치, 가야지역 통치 본거지로 삼음 * 561년 창녕비, 북한산비(연대 미상), 568년 황초령비, 마운령비 세움, 4개의 국경순수비 건립, 통일전 신라 최대의 영토 확보. * 화랑도 창설, 인재양성 * 흥륜사 준공, 황룡사 창건(장육존상 조성), 동축사 건립 등 -전설 ; 새 궁궐 짓는데 갑자기 황룡 나타나, 짓던 궁궐을 황룡사로 바꿔지음. *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단명했다. 만년에 법호 法雲 승려가 됨, 애공사에 묻힘. 28. 천전리 각석의 역사적 가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