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스님
스님은 산속에 산다. 속세와 단절을 위해 깊은 산속에 절을 짓는다. 정신일도하사불성 이라지만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아 인적이 드문 깊은 산을 찾는다. 안정적 수양처는 모름지기 맑은 지기라야 좋다. 나는 스님이 스승님에서 승을 생략한 약자라는 정의가 석연찮다. 나아가 스님이란 한없이 낮은 자세로 스스로 정진하는 중생이라 정의한다.
요즘에는 잘 다듬어진 도로와 다양해진 교통수단으로 산속과 도시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넓디넓은 절주차장엔 거의 항상 차량으로 붐빈다. 그럴수록 스님들이 공부하는 환경은 열악해진다. 그래서 자꾸 깊은 산으로 숨는다. 사람 냄새가 수련과는 이율배반이라 세상과 완벽한 단절을 시도하는 스님도 있다. 간장 한 종발도 시냇물 떠 마시듯 생기는 것은 아니다. 죽 한 사발, 밥 한 발우도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하루 한 끼든 세끼든, 밥을 먹든 죽을 먹든, 생존을 위해서는 속세와 단절 하는 데 한계가 있다. 여름엔 해충도 피해야 하고, 겨울엔 난방도 중요하다. 그래서 다들 생존과 공부 사이에 타협점을 찾는다. 산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름에서 가을까지 땔감을 준비해야 하고 논은 아니더라도 텃밭은 필수다. 혼자 살아도 살림살이는 다 갖추어야 한다. 전기와 가스가 없으면 원시 수준으로 살아야 하고 그러자면 의식주 해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프로판 가스를 배달받을 수 있으나 배달비만큼 가스를 감량하기에 속는 기분이 싫다.
자급자족하는 과정이 공부라고도 한다. 불경을 읽고 외우는 것만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두 시간 앉아 있으려면 대여섯 시간 움직여야 한다. 남새밭에서도 배우고, 해우소 에서도 배운다.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에도 지혜가 있다. 마지막 잎새도 차마 떨어져 내리지 못하는 인연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군자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무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무리를 지어도 다른 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종단이나 종파의 행태는 각각인 듯 한줄기다. 가장 현저한 차이를 들자면 대처를 허용하는 종파와 불용하는 종파다. 신앙은 하나지만 방법은 여러 갈래다. 피안은 한 곳인데 누구는 물을 건너고 누구는 산을 넘는다. 불교는 물리적 작용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앎을 발전시켜 인간을 변화시키는 종교다. 그러함에도 특정 경전만이 진실한 부처님 말씀이라며 제타 경전을 배척하는 종단도 있다. 불상을 우상으로 간주하는 종파도 있다. 역사, 환경, 인식이 제각각이다보니 성구聖句가 번역자에 따라 해설을 달리하기도 한다.
잘 지어진 절집에 머무르고 싶다면 나를 버리고 종단을 좇아야 한다. ‘우리 편’ 이라는 스크럼을 짜야 된다. 무리를 짓게 되면 ‘우리(we)’라고 하는 울타리에 얽매여 부처님 말씀을 거스르기 일쑤다. 2,500년 전 오늘을 예견한 석가모니의 능력을 좇아 행하면서 어떻게 그런 예지력을 갖게 되셨는지 탐구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나는 산으로부터 탈출하여 도심에 토굴을 장만하고, 종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여럿 속에서 나를 찾기도 어려웠지만 나 개인의 출가목적을 이해하고 이끌어줄 환경을 산속에서 찾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승가도 인간사회다 보니 관계유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부가 우선인 경우는 인간관계가 걸림돌이 되곤 했다. 처자식 다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의 특징 중 통일된 성품이 있다. 고집이 그것이다. 나도 그렇다. 고집과 주장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세계가 종교계다.
공부를 위한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유동인구가 적을수록, 교통은 불편할수록 방문자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교회와 멀리 떨어져야 전도사들의 훼방을 덜 받는다. 목탁 소리를 혐오하는 이웃만 없어도 좋은 환경이다. 고요하기보다 조용하기만 해도 좋은 동네다. 늦깎이에게는 독서량이 절실하다. 그러자면 노동시간과 취침시간을 줄여야 한다. 공부는 생활이고 노동은 생존이다. 생존과 생활을 동시에 이루자면 수련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이곳은 여러 가지 정황이 토굴 생활을 흉내 내기에 안성맞춤이다. 낮에도, 밤에도, 사람도, 자동차도 통행이 뜸하다. 조용하기가 적막 수준이다. 주민들도 대부분 연로하셔서 인사는 물론 대화도 조곤조곤하다. 나를 위함은 아닐 테지만 주변 누구도 개를 키우지 않는다. 도시가스가 땔감준비에 소모하는 시간을 절약해 준다.
소음 없는 천혜의 지리조건과 함께 법당, 서재, 침실, 주방, 욕실 등을 배치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광역시 지번이지만 목탁 두드리기에는 깊은 산속이다. 가로등은 매일 밤 보름달이다. 이기대를 품은 장자산을 타고 스치는 바람은 갯내음과 솔향을 머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에도 움츠리지 않는다. 이웃에 방해 주지 않고 애마를 세울 공간이 넉넉하다. 『법구경』 「광연품」에 ‘심락거수간(心樂居樹間 ; 마음을 즐겁게 하려거든 숲속에 살아라)’ 이라 가르친다. 『능가경』에 ‘법은 마음이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지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다. 법이 머무는 마음을 어떻게 간수 할 것인가.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없음은 아쉽지만 기름진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햇빛을 마음껏 받아 쟁인다. 깔고 앉은 지번으로 사찰 등록하고 기부금 영수증도 발행한다. 보시함도 뒤주도 텔레비전도 없다. 당파 지을 도반도 없다. 회주니 방장이니 상좌니 아무도 없다. 혼자 주지하고, 원주園主하고 다 한다. 그리고 고독한 심기心氣를 씻는다. 그래서 나는 공부방을 세심당洗心堂이라 이름 지었다. 남과 짝하지 않지만 완고하지 않다. 빈듯하면서도 채워가는 열락이 있다. 입은 옷 한 벌과 발우뿐이라 모자란 듯싶어도 당당하다. 권위는 애당초 내세울 가치가 없다. 환한 기운이 피어나고 조용해서 좋다. 한 줄 두 줄 읽고 쓰는 수련으로 시공을 메운다. 속가에서 쌓은 사회적 식견이 짧은 법랍을 덮어준다. 독거노승에게 도시 생활은 바쁜 듯 여유로워 산속보다 활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