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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흥김씨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자
한훤당문학 연구의 과거와 미래 | ||||||||||||||||||
Ⅲ. 한훤당과 문학 사장(詞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도학의 선구자였던 한훤당의 경우도 사장과 거리를 둘수록 도학적 철저성이 보장되는 입장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한훤당의 연보를 정리하면서 25세條에, “대저 선생의 시문 가운데 다행히 남아있는 것은 모두 젊은 시절에 지은 것이다. 만년에 덕이 확립된 뒤에는 다시는 문장에 뜻을 두지 않으셨던가?”*註10)라고 추측하였고, 한훤당이 순천부(順天府)로 이배되었던 49세條에서는 “매계 조위도 함께 귀양 와 있었는데, 언덕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왕래하며 시주(詩酒)를 즐겼다.
선생도 때때로 홀로 가서 거닐었지만 시를 짓는 일은 일삼지 않으셨다.”*註11)라고 하였다. 25세條의 언급은 한강의 추측이다. 젊은 시절에 지은 시문이 남아있다고 하였는데 그 수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몇 수에 불과하여, 장년기 이후로는 시를 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퇴계가 편정한 『경현록』.에는 남계서원(藍溪書院)에서 모래(模來)하여온 한훤당의 초서 유묵이 한 편 실려 있는데, 오언절구이다.
最愛梅兄節 매화의 절조를 몹시 사랑하노니
이 시는 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작자가 확인되지 않는 바, 아마도 한훤당의 자작시일 것이다. 한훤당의 문학을 다루고 있는 기왕의 논문들이 이 시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이 시는 한훤당이 귀밑털이 희끗희끗하던 만년에 지은 시이다. 한강의 언급과 달리 한훤당은 만년에도 시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문인인 이적(李績)이 지은 행장과 기대승(奇大升)이 지은 행장 및 많은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그러므로 연보의 대부분의 기록은 다른 문헌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출처를 살필 수 있는데 이 조목은 한강이 어느 기록을 참고하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혹 한강의 추측일 수도 있을 것이며, 혹 근거가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일삼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짓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처지로 시 짓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어투에 가깝다. 연보의 이 두 기록은 기왕의 한훤당 문학을 연구한 논문들이 한훤당이 시작(詩作)을 멀리하였기에 남은 작품이 적다고 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글인데 사실과 괴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말하였다. 이 사림들은 대체로 도학파들이며 한 시절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이 사장(詞章)에 힘쓴 것을 순정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한훤당과 일두 정여창의 문묘종사는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김종직의 종사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한훤당을 김종직과 차별하기 위해서는 한훤당은 시 짓고 글 쓰는 일과 거리가 멀어야 했다. 한강이 굳이 연보에서 이런 언급들을 한 것은 이러한 맥락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적의 행장에는 “일찍부터 문장의 명성이 있더니 경자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크게 분발하여 문장가의 공부를 하였다.”*註12)고 하였고, 장현광(張顯光)이 지은 신도비명에는 “조금 자라서는 발분하여 문장을 익혔는데 『창려집(昌黎集)』읽기를 좋아하였다.”*註13)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의 한훤당은 분명 한유(韓愈)의 『창려집』을 읽으며 대문장가가 되기를 꿈 꾸던 문학소년이었던 것이다. 시를 보고 “그대의 시를 보니 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하다.” 하였다.*註14) ‘옥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玉生烟)’는 말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금슬(錦瑟)」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뜻이 분명치 않은 말이다. 아마 점필재는 한훤당의 시가 옥(玉)처럼 온윤(溫潤)한 기상을 가지고 있음을 칭찬하여 말하였을 것이다. 44세의 대문호 점필재가 21세의 젊은 한훤당의 시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점필재는 다음 구절에서 “진번(陳蕃)의 걸상을 이제부터는 매달아 둘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동한 때 예장태수 진번이 그곳의 명사 서치(徐穉)가 앉았던 의자를 평소에는 매달아두었던 고사를 차용한 것이다. 점필재는 이제 한훤당을 위해 특별한 의자를 내 놓겠다는 말이다. 한훤당은 이처럼 점필재로부터 시재를 높이 평가받았던 것이다. 조선에 반포하는 사절을 보내며 조선의 시를 채집하여 오도록 하였다. 이에 사행의 일원으로 왔던 손치미(孫致彌)가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을 만들어 조정에 올렸는데, 왕사정(王士禎)이 그 가운데 ‘애송할만한(其可誦者)’ 작품을 골라 그의 저서 『지북우담』에 실었다.*註15) 여기에는 고려의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하여 조선의 임제(林悌), 백광훈(白光勳), 성운(成運), 김종직(金宗直), 정도전(鄭道傳), 권응인(權應仁), 이달(李達), 정사룡(鄭士龍), 최경창(崔慶昌), 임억령(林億齡), 이식(李植), 허균(許筠) 등 사절이 파견되었던 시기까지의 저명한 시인 31인의 시 41수가 실려 있는데, 한훤당의 시 「회포를 적음(書懷)」도 실렸다.
處獨居閒絶往還 한가롭게 홀로 사니 오가는 이 끊기고
자못 맑고 고상하여 속진(俗塵)을 벗은 이 시는 『경현록』과 몇 자가 다르다. 『경현록』에는 ‘淸寒’이 ‘孤寒’으로, ‘憑君’이 ‘煩君’으로, ‘萬頃’이 ‘數頃’으로 되어있다. 채집할 당시에 별본이 있었는지, 혹은 전사의 과정에서 수정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북우담』본이 결이 부드럽고 격조는 더욱 높아 보인다 있는 솜씨는 문학적 재능이다. 한훤당의 그런 시재(詩才)를 청초 문단의 영수였던 왕사정이 알아보았다. 한훤당은 이미 중국에까지 알려진 조선의 시인이었던 것이다.
Ⅳ. 한훤당문학 연구의 과거 한훤당의 시문 자료가 적다고는 하지만 연구의 양이 결코 많은 것이 아니며, 한훤당의 문학적 재능과 예술적 성취를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잘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기왕의 논문들은 다음의 세 부류로 정리될 수 있다. 「추호가병어태산부(秋毫可並於泰山賦)」를 다룬 논문 1편이다. 분석이라고는 하지만 번역과 해설에 치중한 소개 수준의 글도 있고, 대상 작품을 통해 한훤당의 도학적 삶이나 사상과 결부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한훤당 문학 연구의 한계가 잘 드러나는 경우이다. 문학세계를 통해 증명하려는 논문들이 있다. 이 경우는 문학이 한훤당의 본령이 아니었음을 전제로 문학을 도학의 부속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서술이 제한적이다. 한훤당의 학문적 성취나 실천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詩文을 활용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식’이나 ‘미학’적 탐구를 하는 독특한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도학자로서의 자아와 성리학적 미학을 다루고 있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연구의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지만, 후속 연구자들의 활용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한훤당 문학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이 논문이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한훤당의 문학 연구가 단계적으로 발전해 가지 못하고 산발적 연구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훤당의 시문이 많지 않아서 연구의 한계가 있다는 점과 한훤당은 시문의 창작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는 점 및 도학자 한훤당을 문학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한훤당 연구의 주류가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남계서원의 한훤당 친필 시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논문이 없거니와 최근에 발견된 담헌(淡軒) 김극검(金克儉)의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에 대한 텍스트 비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적다고만 탓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시문창작을 반드시 회피한 것은 아니다. 한훤당 자신이 시문을 짓지 않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후대에 한훤당의 도학적 위상을 담보하기 위해 시문을 멀리한 것처럼 묘사한 서술만 믿고 한훤당이 창작을 회피하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고려해 볼 일이다. Ⅴ. 한훤당문학 연구의 미래 지금까지의 한훤당 문학 연구는 『경현록』에 실려 있는 자료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한훤당의 유묵처럼 『경현록』에 있는 자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제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고증에도 주목해야 할 때다. 김극검(金克儉 1439~1499)의 『담헌선생시집(淡軒先生詩集)』에 실려 있는 한훤당의 시 7題9首가 전재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 시들이 만약 한훤당의 자작시라면 한훤당의 문학 연구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터이지만 아직 누구도 이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하지 않고 있다. 『淡軒詩集』은 『築隱退隱淡軒三先祖(生)詩集』*註17)이라는 제하(題下)로 간행된 2책의 제2책인 바, 우선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책 : 築隱退隱淡軒三先祖詩集序
『築隱先生詩集』과 『退隱先生詩集』및 『淡軒先生詩集』에는 본인들의 시가 실려 있고, 『築隱先生詩集ㆍ續集』과 『退隱先生詩集ㆍ續集』및 『淡軒先生詩集ㆍ附錄』에는 각각 동시대인들의 시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이 증시(贈詩)이다. 특히 『속집』과 『부록』에 실린 시의 작가들은 모두가 이름이 잘 알려진 당대의 명사들이며, 등재된 시의 다수가 처음 발견된 시들이기에 사실이 확인된다면 여말선초의시사(詩史)를 다시 써야할 형편이다. 5대에 걸친 조손(祖孫) 3인의 시집인 셈이다. 1802년에 간행된 『金海金氏壬戌譜』에 실려 있는 「宗簿寺事築隱公行狀」에 따르면, 축은 김방려는 문과에 급제하고 정몽주(鄭夢周)에게 배웠으며,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등과 뜻을 같이하여 사귀었다.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구도에서 친명파였던 그는 이인임의 모함으로 국문을 받았다. 권근(權近)이 지어준 시구에, “굳세고 곧아서 시대와 어긋남이 많았고, 회포를 갈무리하여 스스로 때를 알았다.(剛直多違世 懷藏自識時)”고 하였다. 퇴은 김계희는 세종 23년(1441)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 한성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455년에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김해로 낙향하였는데,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한강에서 지를 지어 전별하였다. 최항(崔恒)과 이영서(李永瑞)가 이때 지은 시가 남아있다. 담헌 김극검(1439~1499)은 이미 학계에 소개되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항목이 실려 있다. 급제하였다. 특히 시문에 능해 1469년 세조가 양성지(梁誠之) 등에게 명해 연소한 문신을 6문(六門)으로 나누어 배정할 때 성현(成俔), 류순(柳洵) 등과 함께 시학문에 선발되었다. 이어 예문관대교에 올랐으며, 발영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홍문관부제학, 전라도관찰사, 호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연산군 때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죽었다. 문장에 능했고 성품이 청렴 강직하였다. 이들의 자손은 전라도에 세거하며 전남 장흥군에 사현사(四賢祠)를 세워 이들 3인과 퇴은의 5대손 절옹(節翁) 김혼(金渾)을 함께 봉향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김방려는 여말의 명류였고, 김계희는 집현전 학사들과 시를 창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김극검은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동시대의 명류들과 창수(唱酬)할 처지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임술년인 바, 서문은 후손 김종섭(金鍾燮)이 썼고 발문은 안종학(安鍾鶴 1863~1923)이 썼다. 역대 명가들의 문집이 간행될 때 발견되지 않고 있다가 20세기 초에 간행된 것이니 의심이 없을 수 없다. 특히 한훤당의 遺作은 퇴계와 한강이 애써 찾았음에도 발견되지 않았던 셈이니 더욱 이상하다. 이 책의 서문에는 안타깝게도 이 책의 편찬경위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 없다. 오히려 족보의 간행과 관련한 내용이 대부분인 바, 족보의 서문으로 쓰여진 글을 일정부분 첨삭하여 이 책의 서문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나마 편찬경위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은 안종학의 발문이다. 발문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근래에 선생(築隱)의 후손 奉圭와 秉主가 끊어지고 이지러진 가운데 남은 시들을 수습하고 여러 문집에서 널리 수집하여 원집과 속집 두 권을 만들고 나에게 바로잡아 주기를 청하고 아울러 발문을 부탁하였다. 나처럼 견문이 부족한 사람이 어찌 감히 선현의 문자에 손을 대는 일을 할 수 있으랴! 굳이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삼가 의심스럽거나 잘못된 곳 수십 조를 추려 찌를붙여 보냈다.*註18)
이 발문에 따르면, 후손들이 교정과 발문을 부탁할 때 가져온 원고는 축은의 시들 뿐이었으니, 축은의 작품은 원집이고 타인이 축은에게 준 贈詩들은 속집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여기에도 ‘의심스럽거나 잘못된 곳’이 수십조나 되었던 것을 보면 안종학의 의심도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안종학의 교정을 받은 『축은시집』에 다시 『퇴은시집』과 속집 및 『담헌시집』과 부록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대상이 된 원고는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중심으로 제가(諸家)의 문집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지봉(支峯)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이건창(李建昌) 등과 깊이 사귀었다. 온화한 인품이었지만 의리의 분별에 엄격하여 김택영(金澤榮)의 『한사계(韓史綮)』의 오류를 질타하고 시론에 아부하는 무리들을 엄히 배척하였다. 지조가 고상하여 조선이 망한 후 비분을 못 이겨 병을 칭탁하고 동지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匪風」, 「下泉」*註20)의 노래를 슬피 불렀다. 문장과 행의(行義)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스스로 교정을 보고 발문을 적어 간행한 책을 완전히 불신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쯤에서 이제 한훤당의 시가 실려 있는 『담헌시집』의 부록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가장 많고, 칠언절구가 29수, 오언율시가 4수, 오언절구는 1수이다. 작가 74인은 한훤당을 비롯하여 金宗直, 洪貴達, 趙旅, 南孝溫, 金馹孫,鄭麟趾, 金時習, 金安國, 金正國, 鄭鵬, 河緯地, 兪應孚, 成三問, 朴彭年, 李塏, 首陽大君, 金宗瑞, 鄭昌孫, 申叔舟, 趙光祖, 韓明澮, 具致寬 등 조전전기의 명사들이 망라되어있다.*註21)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시가 실려 있는 사람은 점필재인데 29수이다. 이 29수를 현존하는 『점필재집』과 대조해 본 바, 7수는 원집에 실려 있고 나머지 22수는 실려 있지 않다. 이 가운데 5수는 ‘대담헌(代淡軒)’이라고 하여 담헌을 위해 점필재가 대작(代作)한 작품이기에 혹 점필재의 문집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나머지 17수는 원집에 실려야 될 시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작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어계(漁溪) 조여(趙旅)의 시도 10수가 실려 있는데, 1수를 제외한 나머지 9수는 원집에 실리지 않은 새로운 작품이다. 점필재의 원집에 실려 있는 7수의 시들은 『담헌시집』의 부록에 「贈淡軒六首」라고 題한 6수와 「三月」이라고 題한 1수인데, 「贈淡軒 六首」의 경우는 점필재의 원집에 산재해 있는 담헌과 관련된 시를 모두 모은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집에 4수인 작품 가운데 3수만 실었고 원집에 2수인 것을 1수만 실은 것도 두 차례나 된다. 정성을 다해 선조의 시편을 모은 후손들이 『점필재집』에 실려 있는 시를 빠트린 것이다. 심지어는 『어계집』에 실려 있는 조려의 시가 6수 가운데 끼워져 있기도 하고, 점필재의 시를 「文宗大王御札」이라고 題하여 문종의 하사시(下賜詩)로 적어두기도 하였다.*註22) 이는 가장(家藏)해 오던 원고를 1922년에 간행하면서 『점필재집』과 대조하지 않은 결과이다. 이 점이 오히려 신뢰가 가는 부분인데, 어쨌든 김해김씨 집안에서 전해오던 원고가 있었던 것이고, 전적으로 이 원고를 간추려 책을 간행한 것이다. 다만 이 원고의 진위여부, 예컨대 누군가가 습작으로 시를 지어 고인의 명호(名號)를 붙여 두었을 가능성 등도 배제할 수가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작품의 내용과 풍격을 두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한훤당 문학을 연구하기 위한 미래의 과제를 제시하는 목적으로 집필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쯤에서 그친다. 향후의 과제로 미루면서 다른 연구자들의 주목을 기대한다. 2. 한훤당의 문학적 성취 기왕의 한훤당 문학 연구가 ‘도학과 관계지우기’를 애써 추구해왔다면, 이제는 문학 자체에 대한 연구로 옮겨가야 한다. 왕사정이 『지북우담』에 ‘애송할만하다’며 실어두었던 한훤당의 문학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학자들은 한훤당의 문학적 성취에는 별반 주목하지 않았고, 지금도 주목하지 않고 있다. 한훤당의 작품이 적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작품이 많아야만 예술적 성취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왕사정이 한 수의 시만으로 한훤당 문학의진수를 보여준 것처럼 전정일련(全鼎一臠)격으로 한훤당의 문학적 성취를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細雨) 중에 호미 메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한훤당의 시조다. 출사하기 전에 지었는지 유배 중에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시조가 그리고 있는 회포는 왕사정이 뽑았던저 「書懷」의 그 회포다. '明月'과 '煙波'는 '細雨'와 '綠陰'으로 바뀌었지만 '數疊山'이 '山田'으로 남아 있고 그 한가로움은 매한가지다. 저 '淸寒'한 서생에게 생애의 일을 묻지 못하거니와 이 농부에게도 살림살이를 물을 필요가 없다. 저 서생이나 이 농부나 모두 이미 그 삶의 누추함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한훤당은 자신의 고결한 회포를 형상화하는데 칠언절구에서도 시조에서도 성공하였다.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 1437~1487)이 그 사람이었다. 성주의 가천(伽川)에 살고 있던 그를 찾았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시와 함께.
欲瞰先生道德藩 고고하신 선생님을 뵙고 싶어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이 시는 한훤당의 감성을 잘 드러내준다. 김맹성의 회포를 '도덕의 울타리(道德藩)'라고 한 것을 보면 그 고결한 회포가 한훤당과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뜻이 맞는 사람은 보고 싶은 법이다.
그러나 그리움 끝에 찾아간 그 사람은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바람결에 그이의 말울음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들리지 않는 그 한가로움이 오히려 밉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어느덧 달이 떴다. 이 땅에 어디 원숭이가 있었으랴만 자연과 하나 되어 고고하게 사는 사람에겐 원숭이도 나타나는가 보다.
그 원숭이가 달 보고 길게 우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여름에 접어드니 불어난 물에 개구리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불어난 냇물이 쓸고 간 자리에는 늙은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의연히 서 있다. 마치 이 집의 주인처럼. 달이 떴으나 차마 발길이 돌려지지 않는다. 그리움에 넋이 나가버렸다. 찾아갔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안타까움을 이리도 절절하게 그린 시편도 많지 않을 터이다.
말울음, 밝은 달, 개구리 소리, 뿌리가 드러난 나무, 흐르는 강물, 소재 하나하나에 모두 그리움이 묻어있다. 인적 없는 곳에서 달을 보고 우는 원숭이 소리가 절정이다. 한훤당의 예술적 감각이 잘 드러나는 시다. 일구(逸句)로 남아 있는 다음의 두 구절도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古亭琴濕野雲宿 들구름 자고 간 정자, 거문고 젖고
이런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그래서 한훤당의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논문들이 나와야 한다. 단, 이 일구(逸句)는 작자시비가 있어 고증도 필요하다.*註26) 한훤당의 산문 가운데, 친한 벗 매계 조위(曺偉)를 애도한 「祭梅溪文」도 절창이다. 잔잔한 슬픔이 쌓여 파도가 되어 밀려와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왜 사람들은 이런 글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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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출처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제22호(2012년 12월)
이세동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전자우편 mokjae@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