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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두오모(Duomo)
‘꽃의 도시’ 피렌체(Firenze)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두오모(Duomo)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에 있는 중앙 성당이기 때문에 ‘돔’의 이탈리아식 이름인 두오모(Duomo)로 불리지만, 정확한 이름은 ‘꽃의 성모 교회(Basilica di Santa Maria del Flore)'다. 애초 프로렌티아라는 도시의 이름을 염두에 두고 꽃의 느낌을 갖도록 건축된 것이다. 정말 흰 대리석을 주조로 칼라, 마렘마, 트라트의 세 지역을 의미하는 분홍, 초록 대리석을 장식하여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백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아닌가 싶다. 그 화사함은 최고의 성당인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초라해 보일 정도다. 건축물이라기보다 도시의 한 가운데 피어난, 영원한 구원의 꽃이리라.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질리지가 않는다.
피렌체 여행은 바로 이 두오모에서부터 시작된다. 두오모는 피렌체 문화의 상징이자 총체이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중앙역)에 내려서 10분만 걸으면 바로 두오모 성당이 나타난다. 하긴 도시의 어디에서 보아도 두오모는 눈에 잘 띈다. 백색 대리석 건물 위에 올려진 붉은 돔은 마치 화려한 꽃봉오리처럼 도시의 어디에서 보아도 우뚝하게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우리도 두오모 성당으로부터 여정을 시작했다. 하긴 피렌체는 그리 넓지 않아서 미켈란젤로 언덕을 제외하고는 차를 탈 일이 없다. 한번은 피렌체 시내가 아닌 변두리에 민박을 잡은 적이 있는데 두오모 성당까지 걸어오는 데만 30~40분이 걸렸다. 그래도 두오모는 어디서도 잘 보여 이정표로 삼을 만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성당은 1296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무려 140년이 걸려 1436년에 완성되었다 한다. 길이가 150m나 되어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성당이다. 이 성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105m의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커다란 지붕 큐폴라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20년에 착수하여 1434년에서야 완성됐다고 한다.
그 무렵 15세기 전반기에 피렌체는 경제번영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피렌체의 주산업인 면직물이 매년 16,000필씩 베네치아로 수출되었고, 이 일을 위해서 피렌체는 그들이 정복한 피사 항구 외에도 1421년 10만 굴덴을 주고 리보르노 항구를 사들이기도 하였다. 피렌체는 경제번영의 최정점에서 승리감에 도취되었고, 사업에서 돈을 벌어들인 상류층은 그들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려고 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만들기 시작하여 성당의 건축을 완결지었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브루넬레스키와 지붕을 건설하는 경쟁에서 패한 기베르티(Ghiberti Lorenzo,1378~1455 )가 1425년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문을 만드는 일을 착수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세심한 기베르티가 무려 27년이나 걸려 1452년에야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틀이 없는 10장의 동판에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창조>를 비롯한 10가지 이야기를 부조로 새겼다. 정교하게 다듬고 금박을 입혔을 분만 아니라 원근법적 구성은 물론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여 50년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이름 붙였을 정도로 탁월하다. 바로 당시 최상의 번영을 구가했던 피렌체의 얼굴인 셈이다.
두오도 성당도 아름답지만 이 산 조반니 세례당은 더욱 정교하고 기베르티가 만든 청동문으로 인해 그 화사함이 눈이 부실 정도다. 더욱이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 친밀감마저 든다. 그러기에 단테가 “나의 아름다운 산 조반니”라고 정겹게 부르지 않았던가.
산 조반니 세례당과 단테
이 세례당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을 위해 헌납된 것으로, 피렌체로 들어오지 못하고 망명지를 떠돌던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가 1321년 라벤나에서 『신곡(神曲)』의 <천국편> 25곡의 첫머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노래한 곳에도 등장한다.
하늘과 당의 모든 이야기를 담기 위해 오랜 세월
내 몸이 야위었지만 이 거룩한 시가,
어린 양이었던 내가 아름다운 우리에 덤벼들어 나를 몰아낸
이리들의 그 잔혹함을 이겨낼 수 있다면
지금은 목소리 바뀌고 몸의 털도 달라졌지만
시인이 되어 나 그곳으로 돌아가리.
그곳 세례당 우물가에서 월계관을 쓰리.
하지만 피렌체 당국은 이 위대한 시인의 귀환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테가 꿈꾸던 산 조반니 세례당 우물가에서의 월계관 대관식은 끝내 이뤄지지 못하고 단테는 그해 9월 14일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하고 그곳에 묻힌다. 피렌체의 위대한 시인 단테가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마침 단테가 살았던 생가는 산 조반니 세례당에서 골목을 끼고 조금만 가면 나온다. 정말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그래서 두오모를 보고 나서는 세례당 골목을 따라 단테의 생가에 들러야 한다. 우리도 단테의 집을 찾았다. 생각보다 소박하고 모던하기까지 하여 단테의 두상이 없었다면 평범한 집으로 여겼을 것이다.
단테는 1265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아홉 살 때에 베아트리체를 처음으로 만나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사랑하지만 25세 무렵에 생사를 달리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1280년대에 토스카나의 기벨린당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고향에 봉사하였고, 1295년 이후에는 공직에 나가 도시 발전에 기여했다. 그리고 1300년에는 단테가 속한 백색당이 집권하면서 제1행정장관으로 선출되어 시의 행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302년 단테가 교황청에 파견 사신으로 로마에 가있는 동안 흑색당이 집권하여 그에게 국외추방을 명하고 “피렌체 귀환시 화형”을 선고했다. 그때부터 19년 동안 돌아올 기약 없는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정치 상황을 보자면 백색당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당이었고, 흑색당은 교황을 지지하는 당이었는데, 조선 후기 우리의 당쟁처럼 정치적 노선에 의해 패가 나뉘고 서로 싸웠던 것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피렌체 명문 가문의 일원이었던 단테가 망명자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 기나긴 망명의 과정에서 1304년 단테는 저 유명한 <속어론>을 집필하여 “시를 쓰는데 라틴어보다는 지방 토속어가 훨씬 낫다”는 내용의 ‘모국어선언’을 하였다. 그래서 『신곡(神曲)』을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어로 쓰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단테는 교황 중심의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어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전주곡을 울린 셈이었다. 『신곡』을 고향의 언어로 쓰면서 몸은 비록 피렌체를 떠났지만 자신의 영혼은 고향에 머물기를 바랐음이다. 그래서 <속어론>에서 “동정을 받아야 할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슬픈 사람은, 꿈에서나 볼까?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비참하게 떠도는 유랑자러니.”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단테는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여러 모로 17세기 우리의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과 닮았다. 서인(西人) 벌열(閥閱)의 일원으로 숙종과 장희빈을 둘러싼 당쟁의 와중에서 선천으로, 남해로 유배지를 떠돌아야 했고 저 유명한 ‘국문선언’을 통해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그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니 설령 십분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우리말과 글의 우수성을 알렸던 것이다. 또한 단테가 <속어론>의 토대 위에서 『신곡』을 집필한 것처럼, 서포 김만중도 국문으로 <구운몽>을 쓰지 않았던가. 그 내용 역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원받거나 가문을 창달하는 자신의 소망을 작품 속에 투사한 것이다.
단테의『신곡』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의 망향가이며,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가는, 사랑하는 여인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기이다. 거기에 피렌체는 “옛날의 성벽으로부터 지금도 세 시와 아홉 시를/ 가늠하는 피렌체는 그 안에서/ 평화와 절제와 정숙 속에 있었다.”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낙원의 상징으로 노래된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두오모의 북쪽에 있는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가 우선 도미니크 수도원에 있는 산 마르코 미술관에 들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1400~1455)의 <수태고지>를 보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그 감동을 천천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태고지>는 수도원 계단을 오르자 그 벽면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조를 잔잔하게 하여 엄숙한 숭고미가 느껴진다.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했으니 두려워 말라고 알리는 내용의 그림인데 미술사에서 하나의 하위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수많은 <수태고지>가 있다. <성모송>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라고 말하듯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처녀로서 임신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천사에게 들은 놀라운 사실에 대한 기쁨과 의구심이 교차하여 수많은 화가들이 그 그림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크라나우, 보티첼리, 마르티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은 그 수많은 <수태고지>의 맨 앞에 위치하고 있어 하나의 전형을 제시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대충 쓴 글에 꼼꼼하게 보완해 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덕분에 완성도 높은 글이 됐습니다. 예, 집사람 세례명이 바로 수태고지를 그린 화가의 이름을 따서 '프라 안젤리카'로 했습니다. 성인 중에 유일한 화가라서요. 또 '천사'란 의미도 있어 집사람 이름(仙玉)과도 통합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바오로'로 했습니다. 학자이기도 하고 비기독교인이었다가 가장 열성적인 사도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