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뜨는 젊은 배우 이광수와 동명이인인 원조 이광수 배우는 1990년대 활동했던 스턴트맨 출신의 무술배우다.
1969년 1월 23일 출생하였고 태권도를 수련하고 김청광 사부에게서 쿵푸와 김귀철 사부에게서 합기도를 수련였다. 군 복무전후로 대구제일모직에 근무하였다. 서울 상경전에는 일본격투기시합에 진출하게 되었다. 70kg급에서 일본 극진가라데 선수와 맞서 승리하였으나 토너먼트 진출을 포기해 기권패했다. 당시 우리에게 생소한 격투기 시합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2년 4월 4일 배우를 꿈꾸고 무작정 상경하여 갖은 고생 끝에 김귀철 씨의 mbc 스턴트팀인 무연회에서 소속되어 일하게 되었다. 무연회는 박성식 회장, 채관섭 총무로 이들이 드라마 출연을 정해주고 눈밖에 나면 일을 못하던 시절이다. 채 총무는 그에게 영화무술을 가르쳐 준 분이다. 다행히 그는 PD들에게도 인정받아 남들보다 많이 출연했다.
스턴트맨 일을 할 때인 1992년도 당시에도 중견급 연기자 등급인 10등급을 받을 정도였다. 보수는 위험수당을 포함하여 50분 드라마 한 편 촬영에 45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셀러리맨 한 달 보수였다.
그후 KBS의 <임진왜란>의 고명환 씨 밑에서 일하며 3층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등 위험한 촬영을 도맡았다. 요즘 드라마 <계백>의 서범식이 그의 제자다.
그는 16mm영화 출연의 기회를 갖게 되는데 당시 스턴트맨들의 최종관문으로 더구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예는 처음이고 그것은 배우를 꿈꾸는 이광수의 최종목표였다. 강용규 감독의 <용호의 권> 출연이후 권성용 사부의 소개로 신우철 감독, 봉만대 조감독의 영화에 출연했고 권일수 감독, 황정리 출연의 <인간 사표를 써라>에 출연했는데 보름만에 촬영을 마쳤다. 당시 출연료는 백 만 원이었다. 이어 조명화 감독의 <매춘 7>에 출연했고 <대형님>에 출연했다. 그리고 강용규 감독의 <언더그라운드>에 350만 원을 받게 된다. 1996년인데 일반 톱스타들이 2천만 원 받던 시절이다. 그만큼 한국액션영화는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이다.
이 영화는 베어엔터테인먼트사 제작으로 비디오 영화로 게약하고 극영화로 개봉된 영화다. 정진화, 김광수가 공연했는데 이 영화는 의외로 대박이 나서 비디오가 불티나게 대여되었다.
그리고 이광수 배우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꿈에도 그리던 홍콩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최정일 감독의 소개로 고비(필립 고) 감독의 <사이버전사>에 오디션 후 출연하게 되는데 선진 액션기법 등을 체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24 프레임으로 촬영되는데 18콤마나 21콤마로 촬영하여 액션씬의 느낌을 살렸다. 오토바이 폭발 장면은 종이 오토바이를 만들어 3대의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그후 <테크노 워리어>를 촬영하였는데 언더그라운드 인간사표를 써라 테크노 워리워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가 인상적으로 본 영화는 이두용 감독의 <오빠가 있다>다. 선 굵은 액션영화로 안태섭, 유지인, 신우철이 출연했다. 그외 장철 감독의 복수영화들이 기억에 남는데 그의 영화 인생에 계기가 된 영화들이다.
장일도 배우가 세운 효능엔터테인먼트에 전속되어 원규 감독 금성무, 조은숙 주연의 영화에 출연키로 했으나 불발되었다. 이때부터 출연료 500만원을 고수하는데 TV드라마 <아름다운 그녀>에 이병헌의 친구 역을 마다하고 결국 홍콩으로 가서 <테크노 워리어>에 800만원을 받고 출연하게 된다. 이중 30%는 매니져 몫이었다.
그런데 잘나가던 그에게 IMF는 위기였다. 그의 홍콩 출연작들의 국내 수입이 안되고 그는 최정일 감독 따라 필리핀으로 가서 생활하며 뜻하지 않게 한의원을 하게 된다. 그가 젊은 시절 배워두었던 비기, 비술인 침술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2년 정도 한의원 원장으로 지내다가 태국으로 옮겨 반 년 가량을 더하고 2001년 귀국하여 본격적인 한의학 공부를 결심하고 중국 유학을 떠난다.
중국 천진에서 중의대를 3년 다니고 하북의과대로 전학해 졸업을 하는데 6년이 걸렸다.
그동안 무도인으로서의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고 내공 수련을 하여 지금도 그와 마주하면 무도인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진다.
그를 빠른 시일내 KBF의 초대 스타로 모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