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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역사 스크랩 他人과의 융화정신 실천한 17세기 호서의 산림(山林) / 탄옹 권시(炭翁 權諰)
돌까마귀 추천 0 조회 174 18.05.04 23: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권시의 묘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1호, 서구 탄방동 239-1

탄옹 권시의 묘는 우암, 동춘당, 초려 이유태 등과 함께 이 고장의 대표적인 예학자 중 한분의 묘로 1700년(숙종 26) 11월에 지금의 탄방동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장을 거쳤지만 묘역의 석물들이 유래가 확실하고 보존 상태도 양호하며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생애 1604년(선조37)生, 1672년(현종13)卒

탄옹 권시(炭翁 權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기호학파로서 특히 예론에 밝았다.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권시의 선대가 충청 대전 지역에 대대로 살게 된 것은 그의 5대조 참의공 권령(權齡)이 공주 천내면 탄방리, 지금의 서구 탄방동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이다.

권령은 음서로 출사해 참의가 되었는데 그의 처가 호서지방 공주 천내면 유등천변의 유력한 재지사족이었던 충주박씨 박신함(朴信咸)의 딸이었다. 권령은 박신함의 딸과 혼임함으로써 당시 상속 관행에 따라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듯하다. 

이때의 분재가 권시가 대전 지역으로 입향하여 세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탄옹은 어려서부터 안자(顔子:공자의 수제자 ‘안회’를 높여 부르는 말)에 비유될 정도로 촉망받았다.
1618년(광해군10) 15세 되던 해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피해 서울을 떠나는 아버지 권득기를 따라 남양으로 이전하여 살았다. 18세에 박지계(朴知誡)의 형인 박지경(朴知警)의 딸과 혼인하였다. 권시는 혼인 후 처가가 있는 인천에서 오래 머물면서 처삼촌이었던 박지계에게 수학하였다.

1627년(인조5) 24세 때에 증광 초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고관으로 있던 조익(趙翼)이 칭찬하길 속유(俗儒)의 글이 아니다 하여 장원을 주려고 했으나 참고관(參考官)이 식(式)에서 어긋난다 하여 차석을 주었다. 이후로 과거 보기를 폐하고 도학에 전념하였다. 같은 해에 가족을 이끌고 탄방리에 온 이후 후손들이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
1636년(인조14) 33세에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에 의해 산림으로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추천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37세였던 1640년(인조18)에 다시 대군사부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봉림대군이 포로로 심양(瀋陽)에 있었던 어지러운 때였다. 이 난시에 이것을 피하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죽겠는가 하면서 수락하였다. 

42세(1643년, 인조21)에는 김집과 같이 저술한 30여조나 되는 조항을 질문 응답식으로 행한 예변(禮辨)이 있다.

1654년(효종5) 51세에 경상도도사에 제수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1656년(효종7) 53세에는 경연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당시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던 학풍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풍에 관심을 가져 다른 예설을 펼치기도 하였다.
1656년 이후 출사와 사직을 계속하다가 1660년(현종1) 대비 복제의 예송에서 3년 복을 주장하는 윤선도를 변론하였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던 중 광주(廣州)의 선영에 머물러 살았다. 

이로 인해 권시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은 “호서남인”으로 불렸다. 1668년(현종8) 65세 때 송준길의 주청으로 한성부 좌윤으로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이후 4년 뒤인 1672년(현종13) 정월 24일, 69세의 나이로 대전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현종은 의정부 좌참찬 겸 오위도총관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장지는 처음 보문산에 정하였으나 이후 1700년(숙종 26)에 지금의 서구 탄방동으로 이장하고 이곳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권시의 위패는 도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묘소도 그 역내에 있다. 문집으로는 ‘탄옹집’ 7책(유고 14권과 연보 1권)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장가인 만회 권득기와 그의 아들 탄옹 권시의 문집 판목으로, 모두 610판이다. 만회집은 328판으로, 인조 13년(1635)과 숙종 38년(1712)에 제작한 것이다. 목판은 배나무와 물오리나무의 양면에 조각하였으나 5판은 한쪽 면에만 조각되었다.
탄옹집은 282판으로 영조 14년(1738)에 제작한 것이다. 목판은 물오리나무로서 13판을 제외한 269판이 양쪽 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 목판은 그 내용이 당론가 예학을 담고 있어서 유교사상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도산서원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1987년 현재의 위치에 숭모각을 짓고 보관하고 있다.

 

사상

권시의 아버지 권득기는 항상 말하기를, “학문의 도는 다름이 아니라 오직 마음 속에 털끝만큼의 허위도 없이 바른 것만 찾으면 된다.”라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아버지의 친구 박지계(朴知誡)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박지계는 예(禮)는 본실(本實)을 귀하게 여기고 도(道)는 효제(孝悌)로부터 시작한다는 가르침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권시의 학문은 오로지 진실을 중시하였으며, 또한 심신(心身)과 언행(言行)을 이치에 맞도록 하고자 정진하였다. 그의 철학세계를 보면, 초반에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년에는 성리학적 문제에 냉담했으며 도리어 심학적(心學的) 학풍을 지향하였다. 그는 유학의 본령을 성기성물(成己成物), 즉 ‘자기를 이루고 만물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진리를 마음에 체득함으로써 자기를 완성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리를 사회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물아(物我)가 병립(幷立)하는 경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또한 권시는 유학의 본령을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보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 공(公)을 중시하였다. 공은 하늘의 본래 모습으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이것은 사욕을 극복하고 대아를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권시는 또한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을 수용하여 만물이 모두 하늘의 소생이므로 근원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수양법으로 경(敬)을 중시하였으며,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준수한 천품 위에 학문에 심취하여 높은 정신세계를 개척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이지만 성리학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었다. 그의 학풍은 충청유학의 색채를 더욱 다양하게 하였다고 하겠다. 

 

도산서원 (道山書院)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서구 탄방동 233번지

이 서원은 만회 권득기와 그의 아들 탄옹 권시를 추모하기 위해 조선 숙종 19년(1693)에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숙종 37년(1711)에 나라에서 내린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당 3칸, 묘문 3칸, 강당 4칸, 서재 3칸, 남재 4칸, 전사청 3칸 등 모두 23칸 규모를 가진 서원이었다고 하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그 뒤 1921년 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으며, 1968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안동 권씨 문중에서 복원하였다. ‘도산’이라는 이름도 탄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도학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대전과 탄옹 권시, 그리고 호서학파
안동 권씨는 탄옹 권시를 배출한 가문으로 조선 초의 인물인 권령이 가장동 충주 박씨 박진의 손녀사위가 되면서 탄방동 일대의 땅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그 후손들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다가 권시가 아버지 권득기로부터 땅을 물려받아 살기 시작하면서 탄방동 일대에 터를 잡게 되었다. 호서사림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이, 성혼, 송익필 등 기호학파의 학문적 바탕은 김장생에게 이어졌으며, 호서에 자리를 옮기면서 그 특성이 한층 더 깊어 졌다.
김장생에게 이어진 예학 역시 그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송시열에게 전해져 정통 성리학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호학파의 학통은 호서에 옮겨지면서 호서학 파를 형성하면서 학통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다.

충청도 지역은 집권당인 서인(노론)의 근거지였지만 학문과 정치적 성격을 달리하는 학자들도 거주했다. 권시는 예론에 밝은 성리학자였지만 다른 정치적 성향인 소론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을 정도로 관대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호서사림은 인조 반정 이후 나라의 부름을 받아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김장생(연산), 강학년(회덕, 연기) 등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김집(연산), 송준길(회덕), 송시열(회덕), 권시(공주), 이유태(금산, 공주) 등이 산림으로 부름을 받아 크게 활약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키웠다.

권시는 학문이 뛰어나 대군사부, 한성부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탄방동에 내려와 도학을 연마했다. 권시의 큰아들은 송준길의 제자였으며, 작은 아들은 송시열의 장녀와 결혼했다. 큰 딸은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둘재 딸은 윤휴(尹鑴)의 아들과 결혼했다. 결국 권시의 네 자녀는 노론 영수 송시열의 사위, 소론 영수 윤증의 부인, 남인 영수 윤휴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호서학파의 형성
호서사림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이, 성혼, 송익필 등 기호학파의 학문적 바탕은 김장생에게 이어졌으며, 호서에 자리를 옮기면서 그 특성이 한층 더 깊어 졌다. 김장생에게 이어진 예학 역시 그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송시열에게 전해져 정통 성리학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호학파의 학통은 호서에 옮겨지면서 호서학파를 형성하면서 학통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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