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살던 동네엔 공설 운동장이 있다.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하여 저녁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운동장 트랙을 돈다. 이사하기 전엔 나도 가끔 나가 산책을 하였다. 나는 주로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므로 운동장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에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100m가 넘는 산책로는 나무그늘 밑으로 나있어 산책하기엔 그만이다. 이사온 곳에도 공원은 있으나 산책을 하기엔 적당하지 않다.
오후가 되니 뿌옇던 하늘이 오랜만에 맑은 얼굴을 보여준다. 요사이는 가을에도 푸른 하늘 보기가 쉽지 않다. 큰맘먹고 그곳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산책로를 10번쯤 왕복하기로 마음먹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신이 나서 저만치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곤 한다. 전에 자주오던 곳이라 무척 좋은 모양이다.
저쪽에서 노부부 한 쌍이 이쪽으로 오신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보니 할머니는 중풍인 듯 걸음이 불편하시다. 한 손엔 지팡이를 짚으시고, 다른 쪽은 할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걸으신다. 겨우 한 걸음씩 떼어놓는 모습이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옆을 빨리 지나가기 죄송하여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걸었다. 전환점을 돌아 다시 그곳에 왔을 때 아직도 그분들은 거의 그 자리에 계셨다. 나는 또 속도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편 전환점을 돌아와도 그분들은 역시 그 자리이다.
나는 걷기를 그만두고 슬그머니 한쪽 벤치에 가서 앉았다. 두 분의 걸음마 연습은 필사적이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자욱이 눈물겹다. 할아버지는 그만 힘들어 쉬자고 하시는 할머니를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시며 애기 달래듯 하신다. 손수건을 꺼내 할머니 이마의 땀을 닦아 드린다. 그 손길이 자상하고 따뜻하다. 마치 나는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전에 보았던 한 결혼식 장면이 떠오른다. 친숙하게 지내던 이웃이 서울로 이사를 했다 몇 년 동안 소식 몰라 궁금했는데 아들이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왔다. 옛정을 생각하여 바쁜 일을 뒤로하고 참석하기로 하였다. 결혼식장은 춘천에서 찾아가기엔 꽤 복잡한 곳에 있어 길눈이 어두운 나는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선남 선녀가 주례 앞에 섰다.
"신랑 ㅇㅇㅇ군은 신부 ㅇㅇㅇ양을 아내로 맞아 어떠한 경우라도 항상 사 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으로서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신랑은 주례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하고 지나치게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하객들은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그 뒤 그들은 석 달도 채 못되어 내 상식으로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이혼을 했다.
결혼식 때 많은 하객들 앞에서 호기 있게 "네" 하던 외침은 공수표로 날아갔다. 그날,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달려가 그들의 새 출발을 축복했던 나의 수고도 물거품이 되었다. 결혼 절차가 복잡하기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라에서 .한 쌍의 부부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양가 부모들은 얼마나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가?
요 몇 년 사이 이혼율은 급상승을 하고 있다. 금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이혼율은 47,4%로 세계에서 3위를 차지했단다. 47%면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는 결과다.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1위도 불사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이혼대행 업체'라는 신종 직업이 탄생되어 성업 중이란다.
어차피 성공률이 절반이라면 결혼 문화도 하루속히 간소화되어야 할 것 같다.
한숨 돌린 노부부는 또다시 걸음마 연습에 돌입하신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행진하는 모습 같다. 할머니 손에는 부케 대신 지팡이가 들려 있을 뿐이다.
"신랑 ㅇㅇㅇ군은 신부 ㅇㅇㅇ양을 아내로 맞아 어떠한 경우라도 ... ..."
선택의 책임을 지고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시는 할아버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시다. 나는 경의에 찬 마음으로 그분들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본다. 곱게 물든 단풍 아래로 노부부의 뒷모습이 석양에 비껴 실루엣으로 멀어 진다.
첫댓글 이렇듯 좋은글 함께나누면 더욱더 좋겠지요 감사합니다
감동 받았습니다. 요즘 수필방을 오랜만에 들어와 봤는데 이런 좋은 글이 있었군요. 앞으로는 자주 들려야 겠습니다.
가슴에 잔잔한 여운을 던저주는 글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자주 좋은 글 볼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