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식 선생, 당신의 축구 영웅은 누구인가요
일제 식민지 시절 황해도 신천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 의식을 지녔던 김익두 목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13세에 경성으로 옮기면서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를 바랐지만 김용식은 공부를 싫어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축구선수의 길을 걸었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김용식은 YMCA에서 공부와 축구를 병행했고, 경신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1928년 11월 경신학교 재학 시절에 개최된 제9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실업전수학교팀을 8대 0으로 크게 이기는 데 큰 몫을 함으로써 축구선수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항일 시위였던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을 당한 그는 1년여를 숨어지낸 뒤 1930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보연전과 경평전을 숱하게 치르면서 많은 무용담을 남겼다. 그 후 제8회 메이지신궁경기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고, 그로 인해 소속팀이 우승하게 됨으로써 국제무대에 출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국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선수 생활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용식의 명성은 대단했다. 1936년 당시 마라톤에 손기정이 있었다면 축구에는 김용식이 있다고 할 만했을 정도였다. 본래 실력으로 베를린 올림픽 대표 자리를 꿰찼고[3] 일본 대표팀은 스웨덴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바로 다음 경기인 8강전에서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만나 8:0으로 대패하긴 했지만 김용식은 이 두 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나서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덕분에 김용식은 와세다 대학팀에 속하게 되었지만, 차별대우로 인해 김용식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체육 시스템을 모조리 파괴했다. 27세의 나이로 이제 축구 선수로 정점에 오른 김용식은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신문사 책상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록 사회부 소속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혼자 공을 다루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언제나 마음 속의 본업은 축구였다. 언제든 축구를 위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던 1937년, 일제는 보성전문학교 올스타를 꾸려서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4강전에서 일제가 내심 바랬던 대로 보성 올스타는 와세다 대학과 맞붙는다. 한때 김용식이 포함되었을 정도인 와세다 대학은 국대를 12명이나 보유한 실질적인 일본 국가대표였고 보성 올스타는 일제의 거듭된 억압으로 축구를 그만둔 사람들도 가득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35년 경성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인 36년 보성전문학교가 다시 준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 크게 일제의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제는 일본 제일팀이 조선팀을 뭉개기를 바랬다. 보성전문학교 팀은 분전 끝에 연장전이 끝날 때까지 2:2였으나 제비뽑기로 와세다 대학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야바위였다. 심판은 보성전문학교 팀에게 제비를 먼저 뽑도록 종용했고 김용식이 뽑아든 제비에는 敗가 적혀 있었으나 와세다가 뽑아든 제비에도 敗가 적혀 있었다. 즉 두 제비 모두 勝은 없고 敗만 있기 때문에 보성에게 먼저 뽑게 시킨 다음 발표하면 그만이었다.어쨌든 대표적 선수인 김용식의 등장 이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축구에서 만큼은 이겨보이며 실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을 대표로 받아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김용식의 등장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김용식의 실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대표로 발탁되었다.1940년대에 아버지가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아 다시 고향 신천으로 내려갔고 김용식은 경성축구단을 나와 평양축구단으로 소속을 옮겼다. 1945년 해방 이후에야 김용식은 다시 서울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용식은 이영민 감독[4]과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플레잉 코치 자격으로 출전함으로서 자신의 마지막 국제 대회에 참가하였다. 1948년 올림픽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으며 기세를 올렸지만 다음 상대인 스웨덴에 12:0으로 대패하였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공격편대인 그레놀리 트리오를 막아내지 못했던 것. 그레놀리 트리오는 우리나라 골문에 7골을 폭격하였고 우리나라 올림픽 팀은 그렇게 탈락하였다. 물론 이 당시에도 외국기자들은 '취재할 거 있어? 40:0으로 학살당하겠지...깨면 취재나 하자구' 이랬던 것. 되려 나중에 "겨우 12-0으로 이겼어?" 라며 기겁을 했다고.1952년에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를 하였고 감독 생활을 하면서 우리 나라 스트라이커 계보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최정민을 발탁해내기도 하였다. 1954년에는 최정민, 민병대 등을 앞세워 감독으로 스위스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5]. 애초에 세계의 벽이 높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용식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하지만 조편성에 너무나도 운이 없었던 대한민국. 당시는 물론 역대 월드컵을 따져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최강팀인 '매직 마자르' 헝가리를 만나 0:9로 대패하였다. 그리고 다음 터키와의 경기에서 진이 빠진 대한민국은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고 역시나 0:7로 대패하고 말았다.점수만 보면 실망스러울 경기였지만 세계 최강팀들을 만나 나름대로 선전했다. 그럴만한 게 당시 대표팀은 제대로 된 비행기도 타지 못 하고 화물기를 얻어타 구석에 처박혀 겨우 스위스로 와서 제대로 연습도 못하고 경기에 임했다! 이러다 보니 외국기자들은 '한 20:0으로 헝가리가 이기겠지?' 이랬고 실제로도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드러누워 잠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깨면 취재나 하자구' 이랬던 것.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 라며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헝가리는 이탈리아나 잉글랜드 같은 당대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7골씩을 때려박고 안드로메다로 보낸 전력이 있던 말 그대로 공포의 팀이었다. 별명이 괜히 '매직 마자르'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표팀이 한 자릿수 실점으로 막은 건 엄청나게 선전한 셈이었다.[6] 그 이후에도 김용식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양지축구단, 할렐루야 등의 축구팀 등에서 감독을 맡아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며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1951년 FIFA 국제심판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1985년, 향년 74세에 지병으로 타계한 후, 체육 훈장 맹호장이 추서됐다.
생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출생의 배경도 있고 해서 그는 성실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경신고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채금석 선생과 술, 담배, 도박, 여자 등 축구에 도움이 안 될 것들은 일절 멀리하고 40대까지 선수로 뛸 것이라는 약속을 지켰을 정도였고,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떠나는 배에서 우연히 '축구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구절을 읽고 그를 지키기 위해 '1만일 훈련 계획'을 세우고 그를 결국 지켜내는 근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한 틈만 나면 외국에서 나오는 축구 관련 전문서적을 구하여 탐독할 정도로 공부하는 축구인이기도 했다.김용식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한 평생 외곬으로 살면 얼마만큼 기량을 닦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의 정성과 집념과 헌신이 얼마만큼 빛나는 업적을 쌓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중략) 축구공과 피를 통하고 신경을 나누어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든 불굴의 의지, 끊임없는 수련으로 스스로의 도를 완성한 만인의 스승, 우리의 위대한 선배 김용식 선생김용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칼럼을 참조 바람. ###
• 2006년 대한민국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최초의 7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대한민국의 기록은 정확히 집계되지 않음[
3] 본디 김용식뿐만 아니라 김영근도 선발됐으나 차별대우에 불만을 표출하며 대표팀을 뛰쳐나갔다. 사실 진짜 실력으로 따지면 두 명도 적다고 국내에서 논란과 비판이 거셌고, 실제로 여운형 같은 사람도 조선인 축구선수들이 차별받았다고 분개하면서 김용식과 김영근에게 보이콧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4] 한국 야구계의 전설인 대타자 이영민 맞다. 이영민은 야구와 축구를 같이 병행해 선수생활을 했으며, 김용식과 같이 축구선수로 활약했었다.
[5] 다만 '최초의 월드컵 16강'을 이룬 감독은 아니다. 지역예선을 통과한 후 본선 16강부터 감독을 맡았기 때문에.[6] 여담으로 스위스에선 한국에 대하여 여러 사정이 방송 보도 되었고, 현지인들이 온갖 생활용품을 전해주었으며 홍덕영 골키퍼는 현지인들이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정말로 20골을 먹혀도 될 경기를 선전했다며.
etc 2010.06.25 10:43
당신의 축구 영웅은 누구인가요?” 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그런데 대부분의 답변이 비슷하다. “역시 저의 축구 영웅은 펠레죠.”, “마라도나를 존경해요. 그 작은 키에서 나오는 포스가 대단하죠.”, “요한 크루이프가 저의 영웅이에요.”, 뭐 자기가 존경하는 축구선수라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하지만 나는 이런 답변이 몹시 불편하다.‘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 선생의 생전 모습. 하지만 선생을 기억하는 축구인은 드물다. ⓒ연합뉴스왜 우리는 축구 영웅이 없을까과연 우리나라에는 축구인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영웅 대접을 받을 만한 축구선수가 그렇게 없을까. 스포츠가 가진 힘이 막강하거늘 왜 우리는 축구가 이 땅에 들어 온지 130여 년이 되는 동안 영웅 하나 만들지 못했을까.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얼 했는가. 대표팀 성적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 오다보니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버리지 않았나.지난 23일은 한국 축구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가 쓰인 날이다. 대표팀이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원정 16강이라는 대업을 이룬 날이다. 이날 세상은 온통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활약에 고취돼 있었다. 박수 받아 마땅하지만 그동안 한국 축구를 위해 희생한 선배들에 대한 조명은 전혀 없었다. 태극기를 두르고 거리로 몰려든 이들에게도 이날은 4년에 한 번 찾아온 축제를 즐기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나는 16강이 확정되고 날이 밝자마자 가장 먼저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 선생 묘소를 찾았다. 언젠간 한 번 찾으리라 마음먹었지만 매번 바쁘다는 핑계로 찾지 못했던 선생의 묘소를 이날만큼은 꼭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고 한국 축구를 이만큼 발전시킨 장본인의 묘소를 직접 뵙고 선생의 철학과 축구 사랑 정신을 한 번 더 되새기고 싶었다. 더군다나 올해는 김용식 선생 탄생 100주기가 되는 해다.지난 1961년 6월 도쿄에서 열린 칠레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작전지시를 하는 김용식 선생(오른족에서 세 번째)의 모습. 이날 한국은 일본에 2-0으로 승리를 따냈다. ⓒ연합뉴스‘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 선생일단 잠시 김용식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하려한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할 우리의 축구 영웅을 칼럼을 통해 소개한다는 자체가 무척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직 김용식 선생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선생의 일대기를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선생의 훌륭한 축구 인생은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무척 선생께 송구스럽다.1910년 태어난 김용식 선생은 기량이 워낙 특출나 일제하에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해 팀을 8강으로 이끌었고 광복 후 1948년 런던올림픽 때는 38세의 나이로 코치 겸 선수로 활약해 역시 8강 기적을 이뤘다. 1952년 현역 은퇴 후 1954년 스위스월드컵 대표팀 코치로 나선 선생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또한 경신중 시절 단짝이자 당대 축구 맞수였던 채금석 선생(이후 금석배 축구대회의 효시)과 술, 담배, 도박, 여자를 멀리하고 40대까지 선수로 뛸 것이란 약속을 임종 때까지 지켰을 만큼 축구를 위해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올림픽을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는 배 갑판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영국의 축구기술 서적을 읽고 축구는 체력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하는 이른바 ‘1만 일 훈련’을 한 일화도 유명하다. 선생은 1936년 11월 15일부터 70세가 되던 1979년 1월 15일까지 매일 두 시간씩 혼자 훈련을 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선생은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도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68년 양지팀, 1969년 국가대표 및 신탁은행, 1980년 할렐루야 감독을 역임하며 후진양성에 힘쓴 선생은 FIFA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로 참석해 수차례 영어로 연설을 하는 등 축구 외교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동료 선수가 놀려 주려고 톱밥을 꿀에 개서 먹으면 체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진짜로 톱밥과 꿀을 먹을 정도로 축구에 대해서는 순수할 정도로 철저한 인생을 살았다. 1985년 작고 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이 추서됐다. 최정민, 함흥철, 이회택, 김호 등이 그의 제자다.김용식 선생의 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안내 표지판 하나 없었다.김용식 선생의 묘를 찾다그런 김용식 선생은 현재 경기도 포천군 서능 공원 묘지에 묻혀 있다. 한국 축구가 원정 첫 16강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날 선생을 뵈러 간다고 하니 무척 설레고 떨리는 마음이었다. 아버지께 아침을 먹다 “오늘 김용식 선생 묘소 간다”고 하니 아버지께서는 향과 쌀, 접시, 돗자리 등을 챙겨주셨다. 나보다 내셔널리그와 WK리그를 더 챙겨보시는 아버지는 “가서 이런 거 사도 되지만 준비하는 정성이 더 중요하다. 축구 스승께 누가 되게 하지 말라”면서 한사코 만류하는 아들의 손에 이것들을 쥐어주셨다.포천까지 내달렸다. 하지만 김용식 선생의 묘소 찾기는 쉽지 않았다. 산 전체가 묘지인 곳에서 김용식 선생의 묘는 다른 이들의 묘와 구분될 것이 없었다. 미리 인터넷을 뒤져 선생의 묘 사진을 뽑아갔지만 산을 두어 시간 돌아도 김용식 선생의 묘를 찾을 수 없었다. ‘한국 축구 대부’의 묘가 이토록 찾기 어렵다니 서글플 따름이었다. 결국 관리소에 가 물어 겨우 선생의 묘를 안내 받았다. 선생의 묘로 가는 길에는 따로 길이 나 있지 않을 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수풀도 묘 위로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초라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분의 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그것도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날 맞이한 선생의 묘라는 생각에 덜컥 눈물이 나오려 했다. 나는 같이 간 후배와 함께 돗자리를 깔고 술부터 따랐다. 잔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속으로 되뇌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월드컵 원정 첫 16강에 올랐어요. 다 선생님 같이 훌륭한 선배님들 덕분입니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천천히 묘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 사람이 한 평생 외곬으로 살면 얼마만큼 기량을 닦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의 정성과 집념과 헌신이 얼마만큼 빛나는 업적을 쌓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기에 이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중략) 축구공과 피를 통하고 신경을 나누어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든 불굴의 의지, 끊임없는 수련으로 스스로의 도를 완성한 만인의 스승, 우리의 위대한 선배 김용식 선생’숙연해졌다. 비록 선생이 살아계시진 않지만 그래도 묘 앞에서 선생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한국 축구의 전설과 이리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영광이었다. 선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축구도 이만큼 발전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선생 같은 훌륭한 이들이 없었다면 월드컵 16강은커녕 월드컵 본선 진출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김용식 선생의 묘에 술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초라한 우리의 축구 영웅그런데 김용식 선생의 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왜 김용식 선생의 묘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입구도 없어야 하는가. 지나간 역사는 이대로 방치해도 좋은가. 우리는 보다 눈부신 미래만 내다보면서 지나간 역사는 헌신짝 버리듯 하고 있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에게 역사는 그냥 하품 나오는 오래된 옛 이야기일 뿐이다. 이래놓고 월드컵 16강 갔다고 축구 선진국이라고 하면 그건 도둑놈 심보다.현재 김용식 선생의 후손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나 한번쯤 들를 수 있도록 김용식 선생의 묘를 미국에 있는 가족과 상의해 이장하고 선생을 한국 축구의 정신적 지주로 삼는 건 어떨까. 대표팀 선수들이 월드컵 출정식을 마친 뒤 출국 직전 가장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김용식 선생의 묘였으면 한다. 그곳에서 전의를 불태우고 적지로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당신의 축구 영웅이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에 당당히 “김용식 선생이요”라고 말하는 젊은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김용식 선생이 펠레나 마라도나처럼 화려한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축구에 뿌리를 내린 공로와 한 평생 축구와 함께 한 열정적인 삶 만큼은 그 어떤 세계적 축구 스타에 뒤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펠레나 마라도나, 크루이프를 자신의 영웅이라고 한 이들의 무지도 아쉽지만 정말 더 아쉬운 건 우리의 영웅을 소홀히 대접한 이들에게 있다.대한축구협회는 명예의 전당에 김용식 선생을 헌액하고 서울월드컵경기장 한켠에 흉상 하나 세운 것 외에는 선생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한 것이 없다. 그것도 김용식 선생을 비롯해 홍덕영 선생, 김화집 선생, 이회택 축구협회 부회장, 차범근 감독, 히딩크 감독 등 5명의 헌액자 흉상을 먼저 세워놓고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장 흉상 제막식만 따로 열어 ‘정치쇼’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사진 왼쪽은 김용식 선생이 1975년 일본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축구 묘기를 선보이는 모습. ⓒ연합뉴스우리의 소중한 역사, 버려도 좋은가역사를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서울시는 얼마 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했다. 그곳에 월드디자인파크를 건설한단다. 펠레가 뛰었고 역사적인 프로축구 개막전이 열렸고 올림픽과 월드컵 아시아예선전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이다. 모스크바 3상 회담으로 촉발된 찬탁, 반탁 논란 집회와 1946년 노동절 집회를 비롯해,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와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하지만 이처럼 대한민국의 역사와 그 길을 같이 했던 동대문운동장의 푸르렀던 잔디는 어느새 콘크리트로 뒤덮여버렸다.또한 나는 얼마전 윤상철의 국가대표 출장 기록을 뒤지면서 놀라고 말았다. 대한축구협회의 자료를 뒤져봐도 최근의 대표팀 기록만 있을뿐 1990년대 초의 기록이나 자료 찾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윤상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후세에 윤상철의 흥미로운 국가대표 기록을 남겨주는 건 윤상철 본인이 아닌 현시대 축구인들의 의무다. 수십 년 전의 자료까지 공유하고 선배들의 뜻을 기리는 유럽축구의 현실과 비교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없는 역사도 포장해 만들어내는 외국과 달리 우리는 있는 역사도 제대로 포장하지 못하고 있다.나는 얼마 전 팔에 문신을 했다.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들고 갔더니 “이 사람 누구예요?”라고 타투이스트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 선생이에요. 아무도 이 분을 되새기지 않아서 제 팔에라도 새겨 넣으려고요. 저의 축구 영웅은 바로 이 분 김용식 선생이거든요.”우리의 축구 역사를 기리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출처: http://nikki99.tistory.com/153 [To infinity, and bey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