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길 : 축석고개길(천보산 능선을 걷는 즐거움을 체험하는 )
“이 고개(축석령)는 곧 백두산(白頭山)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漢陽) 도성을 지나는 협곡(峽谷)이다. 좌우의 산봉우리들이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빼어나고 윤택하여 마치 규장(珪璋) 같기도 하고 관패(冠佩) 같기도 하고, 층층이 공중에 핀 연꽃 같기도 한데,
벌떡 일어서기도 하고 잔뜩 웅크리기도 하고 달려가 치솟기도 하고 치달려 한데 뭉치기도 하여 지극한 정신(精神)이 모두 한양 한 구역에 모였으니, 곧장 사람으로 하여금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탁 트여 응접할 겨를이 없게 한다.
일찍이 듣건대, 감여술(堪輿術)을 하는 사람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기뻐 일어나 춤추고 싶어진다더니, 진실로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국고전 종합 db. 홍재전서176권)
광릉을 참배하고 축석령의 산세에대한 정조 대왕의 감상이다. 포천시 소홀읍과 의정부시 자일동 경계인 축석령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북정맥과 수락지맥과 왕방지맥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 백두산에서 달려온 그 힘찬 기세가 축석령에 이르러 주엽산, 불곡산, 도봉산. 북한산으로 뻗어간 한북정맥을 일으키고, 수도 서울인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수락지맥과 왕방산, 소요산으로 뻗어간 왕방지맥이 바로 축석령에서 분기하고 있는 것이다.
축석령은 한양에서 철원까지의 200거리를 잇는 고개라 하여 ’이백리 고개‘라고도 블렀는데 이 고개를 분수령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데 효자 오백주의 전설로도 유명한 고개이다.
경흥길 3길은 바로 축석고개 3거리에서 시작한다. 예전에 왕방지맥과 수락지맥을 종주하고자 찾아왔고 오늘은 경흥길을 걷고자 또다시 왔으니 세번째이다. 소맷자락 스치고 지나감도 백겁의 인연이라는데 버스를 타고 세 번씩이나 방문하였으니 만세의 인연일 것이다.
축석고개의 3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서울 방향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 보광사 150m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산기슭에 진입하니 천보산 등산 안내도와 경흥길 소홀복지센타 8.4km를 알리는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8km면 이십리길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부담으로 가슴에 와닿는 것은 따가운 햇볕때문일까 ? 아니다, 두 구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하늘마저 청명한데도 산의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쫒아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걸어간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없어 하나를 충족하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른 요구가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으니 언제 하나를 이루면 만족함에 이를수 있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가있을까 ?
자신에겐 가혹하고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면 세상에 보기드문 도덕 군자가 될 것인데 3살의 어린아이로부터 90살의 노인까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사람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일까 ?
그래서 일까? 산길로 진입하였지만 아직은 포장도로인데 바위돌을 부딪치며 흐르는 정겨운 물소리가 오늘따라 어떠한 순간에도 사람다움을 잃지 말라고 정녕히 들려주는 것 같다.
더위를 피하여 산으로 들로 휴가를 떠나는 한여름철에 산비탈을 오르는 길은 온몸에 땀이 베이는 다소 고통스러워도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고통은 즐거움으로 바뀐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온다. 앞, 뒤, 오른쪽, 왼쪽 사방 어디에도 푸른나무가 무성하고 흙덩이로 뻗어간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고마운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시원함 바람, 여름에 나뭇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란 동요가 절로 나오며 산에 오른 맛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산에서 부는 바람은 마냥 고맙기만한데 나의 행동거지에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느낄까? 베푸는 삶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생각에 이르니 지나친 욕심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능선을 걸어간다. 이 길은 예전에 왕방지맥을 종주할 때 다녀갔던 길이지만 예전의 기억은 없고 처음 올라온 것 같은 생각뿐이다. 축석령이 빚은 왕방지맥의 산등성이를 걸어간다. 좌측으로 보이는 도시는 양주시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도시는 포천시이다.
포천시와 양주시를 나뉘며 뻗어간 왕방지맥, 아직은 능선상의 무성한 나무들로 시가지를 조망할 수 없지만 언뜻언뜻 시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아니면 평일아기 때문인지 산등성이에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나와 같이 동행이 아닌 혼자의 몸이다. 이들은 천보산맥을 찾아 왓을 것이고 나는 경흥길을 걸으러 왔지만 산에서 만나기에 반가워 안녕하십니까 ? 라고 소리 높혀 인사를 주고 받는다.
경흥길은 과거 경흥대로가 오늘날 국도, 지방도 등 자동차 교통망이 되어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걸어 갈 수 있도록 자연친화적인 길로 걸어 갈 수 있도록 새롭게 조성한 길이다.
43번 국도가 경흥대로의 원형 노선이지만 자동차 도로가 되어 우회하는 천보산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경흥길 2길은 천보산 산자락을 연결한 고 43국도를 우회하였고 3길인 축석고갯길은 천보산 능선을 걸어가는 것으로 으로 43국도를 우회하여 걷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산등성이에는 천보산 가는길을 알리는 팻말은 여기저기 눈에 띠는데 경흥길을 알리는 표지판, 표지기 등이 전혀 없었다. 물론 산등성이가 외길로 연결되었을지라도 경흥길이란 인식을 하고 진행하는 것과 경흥길이 맞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걷는것은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천보산을 알리는 표지목에 경흥길을 알리는 스팈커를 부착하여 놓았으면 경흥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눈에 띠지 않는 표지판에 오로지 스마트폰상의 선행자의 따라가기에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서라 형승지에 와서 좋은 생각만 하여도 모자랄 진데 불평, 불만은 짜증으로 유발될 것 같아 축석고개에 대한 지명의 유래와 고개에 얽힌 오백주의 효자 이야기를 상기 하였다.
“축석령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전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吳伯周)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고향에 계신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벼슬을 버린 채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간호를 하던 중 석밀(石蜜)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에 온 산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가 죽으면 부친을 누가 돌본단 말인가" 하며 통곡하자 호랑이는 간데 없고 바위만 남아 바위틈에서 석밀이 흘러 나왔다. 이에 부친의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가호를 베풀어 바위를 호랑이로 변신시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범바위라고 불렀으며, 그 후 오백주가 매년 이 바위에 와서 고사를 지내고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 하여 축석령(祝石嶺)이라고 하였다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축석령 [祝石嶺,]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효는 하늘을 감동시킨다孝感動天 하였다. 不孝者이 나로서는 효에 대해 할말이 없고 오로지 ’ 부모님이 살아계실때에는 보이지 않으셨고, 돌아가신 뒤에 부모님이 보인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예전사람은 그의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또한 立身하여 道를 行해서 後世에 이름을 날려 父母를 드러내었는데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자식의 의무를 저버리었으니 씻을 수 없는 죄에 눈물지을 뿐이다.
천보산 자연 휴양림 10.2km알리는 이정표에서 경흥길을 알리는 스팈커를 보았다. 반가웠다. 어하고개를 향하여 진행할 때 포천시 방향으로는 무성한 나무들로 조망이 불가하였지만 양주시 방향은 트여 있었다.
산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두코스를 걷는 생각으로 쉴새도 없이 걸어왔는데 사방이 탁트인 이름없는 조망의 명소가 있었다. 미세먼지도 없는 푸른 하늘과 어울어진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뛰었다.
불곡산, 고령산, 소요산, 마차찬, 감악산 북한산, 도봉산, 노고산, 저멀리 북한땅의 송악산까지 뚜렷하게 볼 수 있었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산과 하늘이 주는 그 기운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하나된 자연의 향기로 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느낄 수 있었다.
뜻하지 곳에서 잊을 수 없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조망을 하고 내려서니 어하터널(고개)이었다. 예전에 왔을때는 허리가 잘렸는데 오늘은 터널 공사를 하여 생태 터널로 변모하였다 어하 고개는 .
” 경기도 양주시 삼숭동에서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조선 태조가 무악대사가 회암사(檜巖寺)를 찾았을 때 산세를 보려고 봉양리의 칠봉산[당시 어등산이라 했음]을 올랐다가 천보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이 고개로 내려와서 어하고개라 하였다고 전한다.
다른설로는 원바위 고개라고 하는데, 이는 미군이 전략상 필요에 의해 표시한 ‘1Y[원와이]’를 그대로 읽으면서 변한 이름이다. 으악고개라고도 부른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어하고개에서 목적지 소홀읍 복지센타까지 4km가 남아 하산의 길목인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산길이 되었지만 사람이 너무 없는 것도 두려움이다.
전보산맥의 등줄기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산은 사람이 있어 그 빛이 아름답고 사람은 산이 있어 그 삶이 빛나는데 아무리 여름날의 더운 날씨라지만 산이 이처럼 조용한 것은 이 땅에 인자仁者가 없기 때문일까 ?
아니다 어찌 사람이 없는가? 나의 당당한 발걸음이 산등성이를 타고 고스락으로 향하여 내달리고 있지 않은가? 사람을 만날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진행할때 벤치가 놓여 있었다.
12시35분이었다. 배낭을 낸리고 점심을 먹었다. 축석고갯길을 걸을 때처럼 오늘도 저심의 메뉴는 ‘단 호박, 수박, 토마토, 복숭아, 두유, 계란, 이다. 점심을 먹으니 더위도 가시고 힘이 솟는다.
남은 거리도 십리도 되지 않았기에 꺼릴 것이 하나없는 무대포 정신으로 진행할 때 첱보산 정상 1190m를 알리는 이정표에서 경흥길은 고스락으로 향하지 않고 우측의 하산길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언제나 산을 보면 오르고 싶고, 정상을 알리는 이정표를 보면 한점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지만 언제나 오르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실현할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아쉬워하는 어리석음을 경책하며 내려서니 또다시 물소리가 들린다. 배낭을 내리고 손에 물을 적신다. 시원하였다. 손이 차가우니 가슴속까지 시원하였다. 이것도 산을 찾는 즐거움의 하나일 것이다.
물소리를 듣고 시작한 경흥길의 첫 걸음이 3길이 다하는 순간에 또다시 물소리를 듣고 손을 씻고 하산하니 체육공원이었다. 한창 공사 중이었다. 읍내에서 체육공원으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태봉로에 이르러 종착지인 소홀읍 행정 복지센타에 이르렀다. (13시3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