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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나의 동무
박규원 작가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추운 날 먼 길을 간 일이 있고, 밤을 새우는 것도 예사였다. 찻주전자에 물이 끓고 방이 더우면 온 세상이 우리의 것 같았다.
-피천득 「이야기」
내 평생 피천득 선생처럼 상대방 말을 잘 이해하고, 온몸으로 느끼며,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처음 듣는 말로 응답해 말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피 선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이토록 마음으로 가깝게 느꼈던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저세상에 가서도 후회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든 것도 선생 글을 읽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선생 쪽에서 굳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 열네 살 때부터 만나고 싶은 마음을 십 년, 이십 년을 그냥 흘려보냈다.
어느 날 신문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큰 따님이 책을 출간한 것을 알리고자 서울에 왔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때 나의 외증조부 김필순과 안창호를 생각했다. 안창호와 김필순은 십 대 학창시절, 서재필 선생이 설립한 독립협회에서 주관한 토론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뜻과 포부가 맞는 친한 친구로 일찍이 의형제를 맺었으며 평생 같은 길을 걸어갔다. 평양 출신인 도산은 서울에 오시면 항상 김필순 집에서 기거하며 김필순이 형과 함께 세운 '김형제상회' 접견실에서 각처에서 올라온 대표들을 만났다. 그곳은 서울 지역 비밀 독립운동기지였다.
김필순은 우리나라 최초 서양 의사로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군의관으로 참여해 혁명 방법을 배워 잃어버린 우리나라 국권을 되찾으려 국경을 넘었다. 중국 만주지역 통화와 치치하얼에서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을 세우고 생계회를 조직해 장기적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해 만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조선 청년들을 모아 독립군을 양성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김필순 일가는 그의 두 처남 서병호, 김규식, 여동생 김순애(김규식과 결혼)와 조카 김마리아는 만주와 상하이, 도쿄 등 국내 외에서 일찍이 독립투사들과 연계해 활동하며 기미년 3.1 독립 거사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외에서 일으킨 독립선언 후에는 파리평화회담과 연동해 중국 독립지사 대표로 파리로 파견되어 활약한 처남 김규식과 연결해 조선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린 것이 일본 정보원에 발각돼 독살당했다.(1919년)
김필순이 뜻밖의 죽음을 당하자 그 자손들은 생존을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 속에서 자라나게 된다. 그중엔 중국 영화 100년 역사상 유일한 영화 황제이자 대표적인 항일사상 배우가 되어 영화로 전 중국인들 이상과 욕구를 표현하며 그들과 함께 항일 구국운동을 했던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김필순의 셋째아들 김염(본명 김덕린)이다.
이 이야기를 쓴 『상하이 올드 데이스』로 민음사가 제정한 ‘올해의 논픽션상’을 수상한 나는 용기가 생겼고, 피 선생이 스승으로 존경했던 도산 선생 따님을 어쩌면 만나고 싶어 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천득은 16살이던 1926년 춘원 제안으로 도산 선생을 만나 배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9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잔금 일부가 자신에게 들어오자 그것을 유학 자금으로 상하이로 갔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상하이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의 상하이 생활은 계속된다. 상해사변 때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와 있을 때를 제외하곤 그의 청춘이 상하이에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피 선생 글을 읽다 보면 명석함과 고아함, 고요한 가운데 찬란함이 느껴진다. 또 같이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느껴지는 행복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부러 물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10살 때부터 고아같이 자랐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글을 쓸 수 있으셨나요?"
"내가 춘원 이광수 선생 집에서 같이 살게 된 건, 초등학교 때 검정고시로 경기고보에 2년 월반해 들어가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등사한 문예지를 만들어 시를 발표했는데, 누군가의 이런 얘기를 듣고 춘원이 내 처지를 측은히 여겨 거두어주신 때문이죠. 애초 우리 집은 종로에서 그 집 땅을 밟지 않으면 목적한 곳에 다다르기 힘들다고 말할 만큼 부잣집이었지만 7살, 10살에 차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친척들이 매일 집에 와 재산을 추려 가려만 하는데 친할아버지는 손자인 나를 왜 거두지 않으셨는지 이해가 안 가요. 나는 아침밥을 굶고 학교 다녔어요. 그럴 때 춘원은 나를 데려다 상하이에 갈 때까지 키워주셨어요. 그때 내게 책을 주셨어요. 한 권 다 읽으면 다른 책을, 그 책을 다 읽으면 또 한 권을 주시길 계속하셨어요. 영어로 된 책도 읽으라고 주셨죠. 처음엔 사전을 찾아가며 겨우 읽어 한 달 넘게 걸렸는데, 나중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어요. 도산을 포함해 그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써라,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사람은 없지만, 계속해서 주시는 많은 책을 하루하루 읽다 보니 그 속에 길이 있는 것 같았어요."
만나볼수록 금아는 보통 사람과 달랐다. 존경하는 선생으로만 대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분이셨다. 진정으로 겸손하고 진실하였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감정을 94세에도 지니고 계셨다. 또 얘기할 때 전혀 어른인 체, 위대한 문학인인 체, 이미 경험한 채 않으시고, 마치 처음 그 말을 듣는 사람처럼 신기하게 들으시고, 또 처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듯한 감동을 하고 자기 마음을 얘기해주셨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는 참으로 부럽다. 이런 마음이 피 선생만 가지신 어마어마한 장점이자 시인으로서 자질이며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리라.
피천득 선생이 도산을 만나 뵙고 “친할아버지나 보호자 같은 느낌이었어요.”라고 하셨던 것처럼 나 또한 정이 많고 가진 것을 모두 베푸는 친할아버지나 다름없는 진정한 분을 만난 것 같았다. 아마 춘원도 도산도 어린 피천득에게 마찬가지 마음을 주셨으리라. 그래서 나에게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말없이 모든 것을 나누어주셨으리라.
그러다 보니 우리는 마치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꿉동무처럼 편안하게 수시로 가고 싶은 시대와 장소로 오가며 무궁무진한 얘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지나자 선생이 원하는 호칭도 '선생님'이 아니라 '천득아!'였다.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냐며 펄쩍 뛰어도 "그렇게 불러주던 사람들이 다 죽었어··."라고 하시며 마치 야단 맞은 어린이처럼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먼 곳을 응시하며 말끝을 맺지 못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나는 선생 마음을 알았다.
피천득 선생 청춘이 깃든 상하이는 내게도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시대이자 장소이며 꿈의 세계였다. 나의 많은 선조가 독립운동하느라 반평생을 보낸 곳이고, 상하이 고양기인 1930년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영화 속에서 나의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이 영화 황제가 되어 젊은이들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으니 나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는 100여 년간 세계의 활동 중심지였다. 서구 열강의 힘으로 강제 개항한 비자면제도시 상하이로 세계의 모험가, 사업가, 망명가, 각 분야 전문가, 혁명가, 건달들이 모여들어 동양 최대의 금융·무역·상공업과 교통 국제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중국 혁명가 손문은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안창호, 김규식 등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김염과 피천득은 공부하기 위해 상하이로 모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배후 인물 색출로 일본 특무요원에게 아버지가 독살당한 뒤 고모부 김규식 집으로 온 김염과 어린 나이에 홀로 공부를 하기 위해 상하이로 온 피천득은 1910년 서울 출생 동갑이었다. 상하이가 급격히 발전하는 1920년대에 두 사람은 감수성 짙은 사춘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유학하러 간 16살 피천득 눈에 이곳은 얼마나 신천지였을까. 이때 상하이는 중국 땅이면서도 중국이 아니었다. 외국인이 만든 조계(組界)제도로 지역마다 색깔이 다른 국제사회였고, 한때는 전 세계 58개국 사람들과 물건이 범람하는 동서양 문명과 문화의 용광로였다. 또 1920년대는 중국 사회가 신해혁명(1911년) 뒤에 급변하면서 상하이는 보수적인 북방과 대립하는 중국의 새로운 사회·경제·문화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때 상하이는 하루가 다르게 시민의식이 변화하며 이색적인 해피 문화가 싹트고, 이민이 가장 많은 국제적 대도시 상하이는 세계적인 상공업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피 선생은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시절 상하이는 매우 복잡한 사회였어요. 아마 미래에도 올드 상하이는 시사하는 바가 많을 거예요.”
상하이에서 “김염의 외손녀면 나의 외손녀와 같다.”라며 나의 외할아버지 역할을 해주셨던 올드 상하이 작가였던 션지 선생님은 그때 상하이를 ‘황금이 땅에 깔리고 기회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곳’이라고 했다. 김염과 피천득 두 소년이 자라던 당시 상하이는 중국 지식인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왔으며 수많은 종교, 정당, 단체가 모이고, 다양한 신문과 도서가 출판되었다. 신교육기관과 세계의 문학, 미술, 음악, 연극이 번영했고 근대 중국의 한 세대의 정치, 문화, 상공업, 예술의 엘리트들이 여기서 자라났다. 이 두 소년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
러시아혁명 때 망명 온 수많은 백계 러시아 사람들의 슬라브 문화의 향기가 높은 프랑스 조계지에서 살았던 김염은 집에서 고모들이 한국에서 온 학생들 하숙을 치며 와이셔츠 만드는 것을 돕고, 셔츠가 완성되면 양복점에 가져다주었다. 그 돈은 임시정부 항일 독립운동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석해 재정지원을 하는 김순애 고모는 와이셔츠 반응이 좋아지자 더욱 박차를 가해 와이셔츠 공장까지 운영했다.
Avenue Joffre에 있는 고급 양복점에 와이셔츠를 갖다 주러 가는 길에는 커피점, 복장점, 사진관, 장신구점, 각국 음식점, 아이스크림점 등이 많았다. 향긋한 음식과 빵이 막 만들어지며 풍겨내는 냄새가 유혹하는 거리를 어떻게 지나 양복점에 도착했을까. 가는 길에 쇼윈도에 비치는 유럽과 백러시아 귀족들이 가져온 유럽 생활방식 의상과 그림, 시와 소설을 파는 서점과 화실 등 그 길가에는 각양각색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음악, 무용, 교향악, 가극, 영화, 회화와 조각 등 세계 일류 수준의 가게와 극장들이 많아 눈을 뗄 수 없었다. 두 소년은 올드 상하이 길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꿈같은 어느 날, 비 오는 옛 조계지 거리에서 김염 할아버지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중국 대지와 상하이 거리가 자신을 키웠노라고. 피 선생 수필 속에 ‘물건을 못사는 사람들에게도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라는 글귀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쇼윈도를 바라보는 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진다.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피천득은 100년 뒤에도 빛나는 작가가 되었고, 김염은 민족의 영웅이자 영화 황제로 100년 중국영화사에 우뚝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십여 년 전 피 선생과 나는 생각날 때마다 올드 상하이로 날아갔다. 우리가 앉은 책상 위는 땅거미가 내리고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어느새 하나둘씩 불이 켜지는 그리운 상하이탄으로 변한다.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거리로 변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날아다니는 피터팬과 웬디처럼 피 선생과 나는 상하이탄 위를 유영한다.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환히 빛나는 반가운 거리엔 볼셰비키 혁명 후에 피난 온 복숭아빛 뺨을 가진 러시아 어린이가 거리에서 꽃을 팔고, 금발 머리 백러시아 영애가 발칸우유점에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한다. 정열적인 프랑스주의자 장뤄구가 즐겨 찾는 예술가 아지트다. 어스름한 뒷골목 어귀에선 행인에게 먼저 손을 들어 인사하는 하얀 수염이 덥수록한 구 귀족 백계 러시아 노인이 서투른 중국어로 “선생, 동전 한 잎만···감사해요." 하곤 수줍어서 손을 내밀었다 움츠렸다 한다.
그리워하던 장소에 다다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아쉬워했던 그 시절. 올드 상하이를 열망을 안고 쳐다본다. 피 선생과 함께 공부하던 새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던 같은 반 여학생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순간 궁금해진다. 아니, 아직 살아나 있을까. 이리저리 한참 살펴보다가 밑으로 같은 반 여동학이 지나가는 걸 발견한다. 미래에 대해 품었던 이상과 꿈이 그 거리에서, 여동학 이마에서 반사되어 다시 동급생 피천득 가슴으로 들어온다. 주말에 같이 극장과 식당을 다니던 주요섭 형. 모두 거리 불빛 속에서 우릴 보고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모두 나이를 먹지 않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오늘 영화 속의 글로리아 스완슨은 정말 매혹적이던데!”
요섭 형은 눈동자가 커져서 흥분된 어조로 말한다. 뤄쑹탕을 먹으며
“네. 정말 멋지던데요.”
피천득도 고개를 끄덕이며 전적으로 동의한다. 두 사람 눈동자를 바라보며 글로리아 스완슨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고 나와 여동학은 느낀다. 우리 넷은 예전처럼 고기와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간 게 시큼하면서도 달콤하고 짭조름한 뤄쑹탕과 버터를 듬뿍 바른 따뜻한 흑빵, 쌉싸름하게 개운하면서 달콤한 홍차까지 다 마시고 배를 두들기며 식당을 나선다.
믿음직한 요섭 형을 중심으로 천득과 나, 여동학은 인파 속을 유유히 걷는다.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곳, '상하이에서는 인물 자랑을 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조계지의 화려한 거리를 걷다 보면 가로수 밑으로 명품 가게 휘황찬란한 불빛이 인도로 쏟아지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그 불빛보다 더 화려하다. 무정부주의자나 사기꾼, 망명객, 러시아 볼셰비키 선전원과 기막히게 눈부신 기생으로부터 시작해 어떨 땐 아인슈타인, 채플린, 깡패보스 두웨이셩, 혁명가와 스파이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황푸강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며 여기가 상하이구나! 하고 느낀다. 또 황금 소비시대를 사는 사람답게 그들 눈빛은 자신감으로 빛난다. 어려운 처지인 사람이나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신분 그 자체 그대로, 그 시대 문화의 아이콘인 양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 문화다!’라고 외치고 싶다.
올드 상하이 황금시대가 우리들 어깨 위로, 겨드랑이 사이로,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 위로 넘실대며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 박규원(1952~ ) 작가. 서울 출생. 경기여고, 이화여대 미대 졸업
독립운동가 길을 선택한 외과 의사인 김필순(金弼淳 1878.6.25.~1919.9.1.향년 41세), 호 해사(海使)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중국 영화 황제가 된 김염(金廉1910.4.7.~1983.12.27.)의 자취를 따라 중국과 미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8년 동안 취재해 《상하이 올드 페이스》를 집필하여 민음사가 주최한 올해의 논픽션상 대상을 받았다.
2003, 2007년엔 올드 상하이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를 쓴 《불꽃 속의 나라》(작가)를 쓰고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서》(상하이 올드 데이스 중국판), 2006년과 2009년에 개정판을 냈다.
2009년~2010년엔 상하이에 살며 올드 상하이 희곡 작가, 극작가, 문사관 션지(沈寂)에게 상하이 역사, 문화, 영화, 사회 예술에 대해 개인 교습을 받아 저서 《아주 특별한 올드 상하이》(프리이코노미 라이프) 다큐멘터리형식의 20년간 모험기를 썼다.
2025년 11월부터 2026년 3월까지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김염 전시, 강연.
- (출처: 제14회 피천득 다시 읽기) 강의록에서 옮김

첫댓글 사진을 제공해주신 김의배 이사님께 감사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