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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하만물,영상.음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하만물
이는 [다시 생각하는 음악교육 제21호](서울:전국음악교과모임, 2003.10 발행) 104-106쪽에 실린 글의 초고임.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이동백과 송만갑 명창(제6편)
이동백 명창의 성격과 외모
글,자료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이동백은 성격이 호탕하고 쾌활했다. 일류 광대의 요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외모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풍채와 얼굴 생김새 등을 출중하게 잘 타고난 사람이다.
이런 이동백의 성격과 외모에 대해서는 이동백의 제자와 주변 인물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동백을 직접 만나 보고 묘사한 당대 언론사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문헌 기록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면모, 이동백의 호탕한 성품과 늠름한 풍채는 그의 판소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생긴대로 행한다'는 말이 어느 경우에나 들어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이 이동백의 경우엔 딱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말도 때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많다 보니 말도 많은 국악계에서 이동백이 여러 국악인들 단체의 대표를 맡았다는 점은 그의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또 당대 함께 활동한 동료들이 잘못된 행실로 신문지상에 이름이 자주 거론된 것에 비하면 이동백은 그런 그롯된 언행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고 아주 깨끗한 편이다.
그의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동백은 남을 헐뜯지 않고 점잖았으며 인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동백 역시 혈기가 왕성했던 젊은 시절엔 욱하는 성격도 있었다는 일화들이 여러 문헌에 전한다.
이동백이 말년에 고수 한성준과 대담을 나누다가, 사람은 늙으면 그저 소인 물러갑니다 해야 한다고 이동백이 말한 바 있고 이동백의 단가 <백발가>에 나타나 있는 가사 등으로 봐서 이동백은 꽉 막힌 성격이거나 독선적이거나 고집이 아주 센 사람 같진 않고 이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판소리 광대라는 예술가는 소리 내공, 내면의 예술성이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됐겠지만 그 외면, 멋스러운 장식, 포장에 해당되는 부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대한 가치 판단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외모를 일류 광대의 중요한 한 요건으로 꼽았던 것이고 성음 좋고 공력 단단하고 거기에다 멋진 인물까지 갖춘 이동백이 그러한 이유에서 당대 명창 중에서도 진정 왕명창으로 꼽혔던 것이라 하겠다.
그가 무대에 서면 우선 그 당당한 풍채와 빛이 나는 얼굴과 자신만만한 눈빛에서 관중의 시선을 모았다. 이와 같이 군중의 집중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이동백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소리에 관중을 몰입시킬 수 있었고 청중을 보다 자유롭게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남녀노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 그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잘난 풍채, 인물인 셈이다. 일단 소리는 둘째고 광채가 나는 그 빛나는 인물로서 관중의 관심을 끌고 나서 소리는 어떨까 궁금해 하는 관중을 향해 괴력에 가까운 엄청난 성량과 누구도 흠 잡지 못하게 만드는 공력으로서 재차 관중의 넋을 빠지게 하고 결국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게 이동백이다.
즉, 이동백은 내용물에서부터 겉꾸밈 포장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 잡기 어려울 만큼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하겠다.
이동백도 완벽한 이는 아니어서 외모에 단점이 있었다고 하는데 팔이 체격에 비례해 좀 짧았다고 한다. 허나 이는 보기에 어색하거나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동백을 비롯해 그와 어깨를 겨룬 동료들 대부분이 어전 광대를 꿈꾸며 거의 일평생을 왕을 비롯한 극히 몇몇의 소수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귀족 명품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 상품을 주로 추구하였다. 그것만이 신분 상승과 예술성 획득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길이라 여겼다.
그러다가 왕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신분 체제가 붕괴되면서 어전 광대의 명품 판소리를 사주는 귀족 소비층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생과 자존심을 걸고 명품을 만들었던 어전 판소리 취향의 광대들은 그 소비자들의 몰락과 함께 아예 입을 다물고 명품 생산과 공급을 중단해 버리고 은둔하기도 했다. 박기홍이 바로 그런 명창 가운데 하나였다고 보여진다.
박기홍은 이동백과 당대에 함께 활동한 이동백의 선배인데 일제시대 전국을 정처없이 유랑하며 극히 적은 몇몇 귀명창들을 상대로 소리 활동을 하고 귀족풍의 정통 명품 판소리를 추구하였다. 박기홍은 후배 송만갑이 법통있는 소리를 변질시켜 통속화시켰다 하여 호되게 비판한 바 있다.
박기홍과는 반대로 귀족 명품을 사주는 소비자가 점차 사라지자 그 제품을 대중적인 상품으로 변모시켜 시대에 순응하고 끝까지 중앙무대를 떠나지 않은 광대들이 있었는데 송만갑이 바로 그러한 명창 가운데 하나였다고 하겠다.
이동백 역시 박기홍보다는 송만갑 쪽에 가까운 길을 택했다 하겠는데 이동백은 시대에 맞추기 위해 송만갑 만큼 급격하게 소리를 확 바꿔 부르진 않았다. 그런데도 이동백이 송만갑 이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그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대 최고 인물 좋은 국창으로 꼽혔던 이동백의 탁월한 외모 덕분이라 할 것이다.
사실 소리 원액만 가지고 어전 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관중들을 매료시키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동백과 송만갑이 극찬한 선배, 천하의 판소리 대가 박기홍이라 해도 그건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박기홍 같은 경우는 그런 일을 아예 포기한 듯 보인다. 평생 혼신을 다해 연마한 자신의 소리를 어설프게 이해시키느니,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아예 입을 다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왕과 사대부들한테 불려 다니기도 바빴던 어전 광대 이동백이 신분 사회 붕괴 후 판소리에 귀가 제대로 트이지 않은 대중들 앞에 섰을 때 그의 독특한 창법과 엄청난 공력보다도 사실 그의 출중한 성량과 보기 드문 외모 면에서 더 환호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내공, 내면의 예술성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동백의 소리를 들어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동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연 입장료, 라디오, 유성기음반을 구입한다는 게 대다수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제시대 대중적으로 누린 인기는 대부분 호기심에 인기 연예인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몰려든, 귀명창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스타 이름 석자를 향한 환호와 박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이동백 관련 문헌 기록을 보면 이동백도 그런 정황을 느끼고 허무함을 많이 느낀 듯하다.
그가 타계한지 불과 반세기도 되지 않아 그 이름 석자가 세인들의 뇌리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생각된다.
오늘날 혜성과 같이 나타나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하다 어느날 이름 조차 잊혀지는 스타들을 무수히 목격한다.
이동백! 그도 20세기 전반기 대중들에게는 어쩌면 한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연예인 정도로 밖에 비추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그의 전무후무한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소리 또한 너무나 허무하게 전승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무수히 많은 유성기음반들? 이 또한 너무 가볍게 길거리에 내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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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 20세기, 아니 판소리 역사상 이런 예술 혁명가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긴 큰 명창이다. 특히 근세 판소리 명창들 가운데 그의 영향력과 무게는 단연 으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송만갑의 위대함은 무엇인가? 송만갑! 그를 주목하고 경이롭게 보는 까닭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고 만들어냈고 또 창조하는 것마다 하나같이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그러면서도 완성도 높은 소리를 창조하는 것이 명창들의 성취감이고 그 색다른 소리에 열광하는 게 귀명창들의 기쁨이라면 송만갑은 단연 국창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송만갑의 1913년 녹음부터 1934년 그의 마지막 유성기음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돋보이는 면모는 한결같이 창의적인 소리를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지극히 시대 상황에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송만갑이 세차례 녹음을 남긴 단가 <진국명산> 유성기음반들이다. 이 단가는 송만갑이 평소 즐겨 부른 단가였기에 시대별로 유성기음반에도 여러번 담길 수가 있었다. 1913년, 1930년, 1934년에 송만갑이 이 단가를 녹음했고 각기 곡조와 창법을 조금씩 달리해서 불렀다. 이걸 들으면 이게 좋고 저걸 들으면 또 저게 좋고 어느 것 하나 손색이 없고 경이로운 기량을 들려준다.
이 세가지 녹음 가운데 물론 1913년 녹음이 가장 목이 우렁차고 고음의 힘이 좋다. 허나 1930년, 1934년 녹음 또한 그때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에 견주어 볼 때 당시 극노인으로 인식된 60대 후반의 성악가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기적적인 수준의 고음을 들려준다.
그리고 송만갑이 1913년에 취입한 판소리 춘향가 중 <십장가>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이는 한면에 3분 정도밖에 담을 수 없는 음반의 녹음 시간 제약 때문에 음반 양쪽면, 그러니까 6분 정도에 그 긴 <십장가> 대목을 불러야 했으므로 중간중간 사설을 생략하고 매우 압축해서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즉흥적인 편집, 편곡 능력이 매우 놀랍다.
이 녹음에서 송만갑은 본래부터 <십장가>가 그렇게 짧았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아주 능숙하게 <십장가>를 줄여서 불렀다. 이는 취입 전 미리 별다른 준비도 특별히 없이 즉흥적으로 편곡하여 부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공력,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며 이런 점에서 안좋은 여건이 주어져도 불평하지 않고 늘 최상의 소리를 들려주는 진정한 대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김명환, 송만갑의 수제자 김연수(여자) 등의 증언에 의하면 송만갑이 말년에 평상시 말을 할 때는 목이 콱 잠겨 있다가도 소리만 하면 젊은 여자도 따라하기 어려울 만큼 고음이 기가 막히게 잘 나왔다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송만갑의 특출난 면모가 유성기음반에 실증자료로서 남아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명창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대체로 아주 멀리까지 소리가 들렸다든가, 매우 크고 매서운 호랑이 성음을 냈다든가, 우렁찬 소리 진동으로 인해 방안의 문고리가 흔들렸다든가, 폭포수 소리를 뚫고 힘차게 질렀다든가 하는 부분에 초점이 많이 맞추어졌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소리를 멀리까지 힘차게 내질러야 했기 때문에 잔기교는 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호걸제나 덜렁제와 같이 힘차게 질러대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그런 소리제가 야외 소리판에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따라서 옛 명창들은 붙임새나 장단 공부보다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지를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가장 주력했을 것이다. “권오성의 원담소리, 방덕희의 우레목통, 조관국의 한거성”이라고 한 『게우사』의 기록과 “모흥갑의 덜미소리는 십리 밖까지 들렸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그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근대 명창들까지 구사, 존재했던 통성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한 점과 맥을 같이 한다. 김명환이 증언한 이날치 소리가 어디까지 들렸다, 송만갑이 소리하고 나면 천장에서 먼지가 다 떨어졌다, 장판개가 소리를 하면 방안의 문고리가 흔들렸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고제 명창 권삼득의 소리를 일러 “곡조가 단순하고 그 제작이 그리 출중한 것이 없으나 세마치 장단으로 일호차착이 없이 소리 한 바탕을 마치는 것이 타인의 미치지 못할 점”이라고 했다. 김명환은 전도성과 이선유의 옛 동편제 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도성 씨 소리는 우리는 재미없어요. 이선유 목에서는 무엇이 나올 중 알았지마는 한달 이상 별 조가 없어. 모흥갑 더늠이라구 허는디 별 것이 아니드란 말이여.”(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서울:뿌리깊은나무, 1991년)
정노식과 김명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옛 명창들은 우렁찬 소리를 내기 위해 발성 연습에 주로 공력을 들인 만큼 잔기교는 거의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소리를 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마이크와 같은 구실을 하는 나팔통에다 입을 대고 소리를 질러서 그 진동에 따라 유성기음반을 취입하는 방식의 초창기 기계식 녹음 시대까지만 해도 취입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송만갑과 같이 고음과 통성을 위주로 우렁차게 지르는 소리가 초기 음반에는 효과적으로 잘 담길 수가 있었고 그 당시 애호가들 또한 그런 소리를 많이 선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07년부터 1926년까지 기계식 녹음 방식에 의해 유성기음반이 취입되었는데 이 시대에 송만갑은 40대 초반부터 60대 초반에 이르는 나이로서 본인이 가장 힘있고 웅장하게 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였으므로 당시 그의 소리는 기계식 녹음에도 적합했고 또 고음과 통성을 위주로 우렁차게 하는 소리를 선호한 전통사회의 미적 관점에도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기계식 녹음의 한계를 뛰어 넘는, 매우 획기적인 전기식 녹음 기술이 1928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시도되면서 미세한 숨소리, 아주 극히 작은 음까지도 녹음기술이 많이 감지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정정렬과 같이 중,저음 위주로 소리를 끌고 나가면서 미묘하고도 섬세한 붙임새를 아주 복잡하게 구사하는 소리, 결코 우렁차지 않아도 은은하고 서정적인 소리가 큰 각광을 받게 된다. 이는 판소리 역사상 음악 측면을 가장 크게 바꾸어 놓은 대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정렬에 의해 기존의 고(古)서편제와는 사뭇 다른 이른바 신(新)서편제가 등장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녹음과 방송 기술의 발달이 그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극장식 무대가 등장하지 않고 전통적인 야외 무대 위주로 판소리가 공연되었다든지, 음반 취입 기술이 계속해서 기계식 녹음에만 머물러 있었다든지 했다면 작은 공간에서 가까이 귀를 대고 들어야 깊은 맛을 확실히 잡아낼 수 있는 정정렬의 방안 소리는 널리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판소리 전반에 영향을 주어 대체적으로 짧은 한마디, 한 장단 안에서도 많은 기교를 표현해 내고자 했고 또 무대, 녹음, 방송 등 기술의 발달로 그 복잡하고도 섬세한 음악 기교가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전통사회에서는 판소리 한바탕을 염두에 두고, 혹은 토막소리라 할지라도 장시간 소리해 나가는 전체 흐름, 큰 골격과 한판을 염두에 두고 굵고 큰 선을 그리며 소리를 짜나갔지만 시간 제약이 뒤따르는 유성기음반이나 방송의 등장, 특히 전기식 녹음 출현 이후에는 차츰 한 장단, 한 소절 안에서도 많은 걸 담아내려고 하고 대중에게 좀 더 자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게 된다. 자연히 투박하고 굵은 선보다는 부드럽고 가는, 화려한 기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송만갑이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판소리 곡조가 통속화되고 고음과 통성이 약해지고 아주 치밀한 기교와 섬세한 음색 표현으로 가는 점도 바로 이러한 시대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니, 송만갑이 정정렬과 더불어 그런 변화의 흐름을 가장 주도한 명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흐름은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오늘날은 단가 한곡이면 더 보여줄 것도 없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탄식이 나올 만큼 단가 한마디 안에서도 무척 화려하고 다채로운 기교가 이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그 도가 지나쳐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짧은 곡 안에서도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고 과욕을 부리는 경향까지 있다.
박록주 명창이 생전에 소리를 너무 많이 만들려고 하지 말라고 후학들에게 던진 말은 바로 그러한 시대 흐름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고 그 걱정이 박록주 사후 지금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암튼 20세기 전반기 송만갑은 시대에 맞게 개량한 소리로 파란을 일으켰고 박봉래 형제들, 김정문, 박중근, 김록주(김해), 김연수(여자) 등 송만갑의 제자들 거의 대부분이 그런 유행과 변화에 모두 뒤따라갔고 그리하여 송만갑의 신(新)동편제는 근대 판소리사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였다.
20세기 전반기 송만갑이 내놓은 신(新)동편제는 발표 당시 최신식이었고 신선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송만갑 타계 후 지금까지도 그 소리를 뛰어넘는 신식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즉, 동편제 판소리는 송만갑을 끝으로 신곡 발표가 중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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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이동백의 작고 시기에 대해 이견이 분분하였다. 학자에 따라 1947년, 1950년 타계설 등 명확한 근거 제시 없이 추측에 의한 주장이 난무하였다.
10년 전 필자는 명확하지 않은 이동백의 작고 시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문헌 기록과 한승호의 증언을 참고하여 1950년에 이동백이 타계했다고 생각한 바 있다.
성경린, “이동백옹” 『신천지 1954년 9월호』(서울:서울신문사) 138~142쪽(이동백 1950년 6월 작고)
장사훈, “새타령의 절창 이동백”(1960.2.27) 『국악 명인전』(서울:세광음악출판사, 1989년) 80쪽(이동백 1950년 작고)
장사훈, 『국악 대사전』(서울:세광음악출판사, 1991년) 588·957쪽(이동백 1950년 양력 6월 6일 작고)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국악 카세트테입(MC) 관리번호 MIMC-0119~0121(3MC) 한승호 증언(대담·녹음: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국악 현장취재 기록책자 관리번호 MINOTE-0001 명인명창 대담록(1) 대담·기록:노재명(1993.9.29.13:30~16:30.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교통반점. 한승호 증언 내용 중 이동백이 1950년 6월 6일 작고했다는 말이 있음)
이와 같은 비교적 사실에 근접해 보이는, 날짜까지 제시된 자료에 근거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을 통해서 여러차례 1950년 6월 6일에 이동백이 타계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하여 이 타계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이 점이 공식 채택되어 2003년 3월 문화관광부 선정 ‘이달의 문화 인물-이동백’ 관련 행사와 인쇄물, 언론 보도에도 거의 대부분 1950년 타계로 알려졌다.
노재명,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음반 해설서(노재명 기획/서울:서울음반 제작 SXCR-101, 1LP / SRCD-1142, 1CD, 1994년)
노재명, “특집 판소리 5명창·다섯바탕 눈대목” 『클래식 피플 1995.12』(서울:월간클래식피플) 116~123쪽.
노재명,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14) 판소리의 전설 5명창-이동백·송만갑·김창환·김창룡·정정렬’ 음반 해설서(노재명 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14, 1CD, 1996년)
노재명, 『판소리 음반 걸작선』(서울:삼호출판사, 1997년) 35~36, 39~40, 66~73, 76~84, 120~122쪽.
노재명, “판소리 명창 이동백 단가 연구” 『한국음반학 제8호』(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8년)
그러다가 필자는 옛 신문에서 국악 관계 기사를 찾고 정리 작업을 하는 중에 이동백 타계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2003년 3월 4일 발행, 배포된 다음과 같은 글들에 이동백이 1949년에 작고했음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밝혔다.
노재명, ‘판소리 명창 이동백’ 음반 해설서(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기획 제작, 서울음반/국악춘추사 제조 SBCD-5103, 1CD / SRMC-8579, 1MC, 2003년 3월 4일 한정판 비매품 제작 배포, 유성기음반 복각 녹음 제공 및 해설서 원고 집필, 녹음 고증, 사설 채록: 경기도 양평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최초의 이동백 SP 복각 CD/MC 독집. 이 음반은 문화관광부 선정 2003년 3월 이달의 문화 인물, 이동백 지정 기념으로 제작된 것으로서 이는 ‘판소리 명창 이동백’ 자료 전시회 기념물이기도 함)
노재명, “이동백의 삶과 음악세계” 『판소리 명창 이동백』(서울: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2003년 3월 4일 한정판 비매품 제작 배포. 이 책자는 2003.3.4~3.30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이동백 자료 전시회’ 도록으로서 이때 대부분의 전시 자료는 경기도 양평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이 제공함) 32,42쪽.
과거에 성경린과 장사훈은 1949년, 1950년 이동백 타계설을 동일한 문헌에 동시에 발표한 바 있다. 장사훈과 성경린은 이동백 타계 역사의 현장을 직접 듣고 목격한 이들로서 아마 기억에 의존해서 연대를 적다 보니 혼동하여 1년 차이의 오차를 보이며 다음과 같이 같은 책에서도 1949년, 1950년 이동백 타계설을 동시에 적는 오류를 보인 듯하다.
성경린, “이동백옹” 『신천지 1954년 9월호』(서울:서울신문사) 138~142쪽. 이동백 약력 부분을 보면 성경린은 ‘本名은 鍾琦. (단기 四二○○-四二八二)’, ‘四二八三年 六月에 逝去’ 이렇게 이동백의 작고 시기를 1949년과 1950년 두가지를 동시에 적어 놓았다.
장사훈 저서 『국악 개요』(서울:정연사, 1961년 6월) 298~302쪽과 『음악 문화 1961년 9,10월호』(서울:음악문화사), 그리고 장사훈 저 “새타령의 절창(絶唱) 이동백(李東白)” 『국악 명인전』(서울:세광음악출판사, 1989년) 79~86쪽. 이 글들의 이동백 약력 부분을 보면 장사훈은 ‘1950년 京畿道 平澤郡 松炭面 七玩里 새말(新里)에서 逝去’ 이렇게 이동백의 작고 시기를 1950년이라고 적는가 하면 자신의 동일한 저서 『국악 개요』(서울:정연사, 1961년 6월) 141쪽 <새타령> 곡목 해설 부분에는 ‘六.二五 전 해에 작고한 李東白’이라고 달리 기록하는 오류를 보임.
성경린의 경우엔 1949년 이동백 타계시 추모의 글을 당시 신문에 발표하기까지 했었다.(成慶麟 “悼 李東伯氏” 1949년 6월 15,16일자 『京鄕新聞』)
그런데 그 후 기억에 의존해 이동백의 생몰연대에 대해 집필하다 보니 성경린과 장사훈 모두 1949년, 1950년 두 연대를 오고 가다 결국 6.25 무렵에 세상을 떠났었던 희미한 기억에 따라 1950년 6월 6일에 작고한 것으로 잘못 혼동하여 기록, 그것이 이후 완전히 굳어져 버린 것이라 하겠다.
필자가 옛 신문에서 찾은 다음과 같은 이동백 타계 기사에 의하면 이동백은 1949년 6월 6일(양력)에 작고하였다 한다. 이를 통해 여기에서 이동백 명창의 작고 시기가 확실한 실증 자료에 의해 최초로 정확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국악계의 지보 국창 이동백옹 서거” 1949년 6월 9일자 『경향신문』
‘노래’로 유명한 이동백옹이 평택군 송탄면 칠원리 자택에서 정양 중이다가 83세의 고령으로 지난 6일 별세하였다. 국보적인 우리의 성악가 이동백옹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충남 보령 출생으로 전북 순창 김세종씨의 문하생으로 공부를 하다가 그후 입산하여 토굴에서 3년간 독공하였다. 40세 때 국창이 되어 구한국의 통정대부에 임하다가 그 후 조선성악연구회를 창건해서 회장이 되고 서기 1940년에 은퇴 공연을 마치고 해방 후는 국악원 명예회장으로 있으면서 평택 산촌에서 정양하다가 6월 6일 별세.
△ 정남희씨 추도담
이동백 선생은 구한말 당시에 국창으로 존중을 받아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분이다. 나는 과거 조선성악연구소에서 많은 지도를 받아 왔으며 해방 후 현재까지 국악원에서 모시고 있었다. 앞으로 고 선생님의 뜻을 이어 생명을 바치어 매진할 결심을 가지고 있다.
△ 박녹주 여사담
지는 이 선생님의 직접 문하생은 아니나 참으로 국보라고 일컬을 만한 귀인을 잃어 슬픈 마음 한량 없습니다.
※ 정정: 이 신문 기사의 ‘1940년에 은퇴’ 기록 가운데 1940년은 1939년의 오류이다.
“李東伯翁 永眠” 1949년 6월 9일자 『조선일보』(이동백 사진 수록)
우리가 가진 국보적 존재로 성악게 국창의 유일한 一위를 차지하던 이동백옹(李東伯翁)이 八十세라는 노령으로 지난 六일 평택군 송탄면(松炭面) 자택에서 영면하였다는 부고가 있었는데 이는 실로 우리 국악게의 최대의 손실로서 애통하여 마지 않는 바인데 옹은 일찌기 전북 순창(淳昌) 김세종(金世鍾)씨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그 후 입산하여 토굴(土窟)에 들어 三년 동안이나 국창을 독공하였다 하며 四十세 때에는 국창(國唱)이 되어 구한국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실까지 받았었고 해방 전 조선일보 주최의 은퇴 공연을 마지막으로 평택에서 정양하고 있었는데 옹은 해방 후 조선성악연구회장을 지냇고 현재는 국악원 명예회원이었다.(사진=이동백씨)
이와 같은 신문 기록이 아닌 다른 어떤 문헌에도 1949년 6월 6일에 이동백이 작고했다는 글은 없다. 성경린과 장사훈의 글에도 1949년 6월 6일에 이동백이 작고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간 성경린과 장사훈의 옛 글들을 누군가 좀 더 면밀히 비교 검토하였더라면 이동백이 1949년 6월 6일에 작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 날짜 부근의 옛 신문들을 한 시간 정도만 찾는다면 위와 같은 이동백 타계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성경린과 장사훈의 글을 세밀하게 검토하질 못했고 1950년 전후 몇 년치 분량의 여러 신문들을 수 개월에 걸쳐 도서관을 매일 직장처럼 출퇴근하며 다 살펴 본 후에야 이동백 타계 기사들을 찾을 수 있었다.
암튼 시간은 무척 많이 걸렸으나 이동백 타계 직후의 두 신문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동백의 정확한 작고 날짜를 뒤늦게 나마 여기에서 처음 올바로 밝힐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또 보람으로 여기고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참고로 이동백이 타계하고 나서 며칠 후 1949년 6월 22일 궁중음악인 함화진(咸和鎭, 1884년 출생)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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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이동백은 1915년 9월 미국 빅터음반회사를 통해 자신의 음반을 처음 취입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녹음이 발견된 것은 심청가와 적벽가 한 대목씩이다. 이동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그 녹음들, 그 굉장한 판소리를 여기 소개해 본다.
* 심청가 중 심청이 부친과 이별하는 데(1915년 녹음)
심청이가 인당수에 끌려가기 전에 부친과 이별하는 대목이다. 이동백은 슬하에 자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식이 많았던 김창룡을 늘 부러워 했다 하며 부녀간의 애틋한 정이 담긴 심청가를 즐겨 불렀다.
또한 이동백이 판소리에 입문하는 데 결정적 동기 부여를 제공한 소리가 이 심청가였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동백의 처지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기에 더욱 이동백이 심청가의 내용에 빠져 들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음반에서 이미 눈을 잃은 상태에서 상처하고 이제 무남독녀 마저 잃게 되는 심봉사의 처지를 이동백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눈물겹게 그려내고 있다.
죽음을 앞둔 심청의 심리 묘사가 빼어나며 이동백이 뛰어난 목청으로 이면에 맞게 구사하는 엇청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리라 생각된다. 거의 대부분 계면조로 불린다.
“천지가 사정이 없어 이윽고 원천대명상에 ‘꼬끼요’”와 “은은히 앉인 모양 잠을 들어 몽중인 듯” 부분은 그외 나머지 부분의 구슬픈 계면조와는 상반되게 꿋꿋한 우조로 불러서 이면을 살렸다.
이 부분들은 죽음을 앞둔 심청의 절박한 심정을 야멸차게 외면하는 현실과 무능하고 불쌍한 심봉사의 처지를 잘 그려낸 것이라 하겠다.
이 소리는 이동백이 1915년과 1928년에 총 두차례 녹음을 남겼는데 사설은 비슷하나 장단 구성을 약간 달리하여 불렀다. 1915년 녹음은 진양조로만 일관하지만 1928년 음반은 진양조-중모리-진양조로 장단에 변화를 주었다.
이 대목은 이동백이 즐겨 불렀으며 대단히 감정을 많이 실어서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즉흥성을 가미해서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동백 스스로 소리를 일부 다듬고 수정 변모시킨 점이 있는 것 같다.
1915년 녹음이 1928년 음반보다 붙임새나 성음이 더 고풍스럽다.(노재명, ‘빅타 유성기원반 시리즈13, 30년대 판소리 걸작집-이동백·임방울·임옥돌·방진관·심상건·정광수’ 음반 해설서, 노재명 기획/서울:서울음반 제작 SXCR-101, 1LP / SRCD-1142, 1CD, 1994년)
심청가 중 심청이 부친과 이별하는 데(1915년 녹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관리번호 MIMC-0291, MIMC-0306
Victor 42986-A Korean 북 남자 츙쳥도·죠션어 심청가 가객 리동백 상편
Victor 42986-B Korean 북 남자 츙쳥도·죠션어 심청가 가객 리동백 하편
(아니리) 심청 자탄이라.
(진양조) 밤은 적적허고 은하수는 기울어졌네. 촛불만 돋우켜고, 아미를 숙이고 한숨을 살포시 길게 쉬고, 아무리 출천대효기로 마음이 어찌 태연헐꼬. 잠든 부친 옆에 앉어 속으로 우는 말이, 얼굴도 대어 보고, 수족도 만져보며, 속으로 우는구나. “아버지 아버지 날 볼 날이 몇 밤이요, 제가 철이라고 안연 후에 밥빌기를 놓았더니, 내일부터는 날마다 동네 걸인이 될 것이니 눈친들 오죽하며 욕인들 아니 헐까. 무신 험한 팔자로서 칠일 전 모친 이별을 당허고, 앞 못보는 부친 슬하으 근근히 자라나, 부친 조차 이별이 되니 이런 팔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아이고 답답 내 신세야. 이 노릇을 어쩌면 옳단 말고. 이리 앉어 통곡을 헌다. 돌아가신 나의 모친은 십오왕으로 들어가고, 나는 이 길로 죽거드면 수궁으로 가니 수궁에서 황천길 찾어가기 몇 만리나 된다더냐. 황천길 멀고 먼 디 묻고 물어 찾어가니 모친이 나를 어찌 알며, 내가 어찌 모친을 알리. 만일 모친 뵈올 때에 부친의 존후를 묻거드면 무슨 말로 대답을 허리. 오늘밤 오경시를 함지에 머무르고, 내일 아침 돋는 해난 부상으 매량이면 애닯을사 우리 부친 더 모시고 보련만 일거일래 뉘라서 막아 줄거나. 아이고 아이고 설운지고.” 어질더질 날이 밝느라고 원촌 계명상이 ‘꼬끼요’ 심청이 자탄을 하되, “닭아 닭아 우지를 말어라. 반야진관 맹상군이 아니로구나. 아이고 답답.”
* 적벽가 중 조조가 관공에게 비는 데(1915년 녹음)
지금까지 발견된 이동백의 유성기음반 가운데 가장 오래된 녹음이고 무척 희귀한 음반이다. 이 녹음을 통해 50세 때 이동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동백의 1930년대 말년 녹음은 중고제에 동편제를 많이 가미하고 또 자기 나름의 새로운 소리제를 구축하여 이 1915년 음반에 비해 매우 신식이라는 느낌이 든다.
2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시대에 따른 애호가들의 기호 변화가 이동백을 자연스럽게 그리 만들었을 것이고 또 이동백 자신도 나이가 들수록 소리에 대한 철학이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동백의 첫 녹음이라 할 수 있는 이 음반은 변질되기 이전의 이동백 소리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고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동백이 어떻게 자신의 개성을 살려 소리를 변모시켜 나갔는가를 아는 데 귀중한 기초 자료가 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이동백이 남긴 여러 소리 중에서도 스승에게 배운 소리에 가장 가깝게, 고제 원칙대로 고지식하게 부르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동백을 가리켜 송만갑이 평한 ‘소처럼 우직하게 소리한다’고 한 느낌이 아주 물씬 풍기는 소리이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이 소리는 김정근제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창룡(김정근 사사, 김정근 아들)과 매우 유사한 창법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전체적으로 이동백 말년 녹음보다 좀더 김창룡의 창법과 유사하다. 마침 김창룡이 이 대목 일부를 이동백 등과 함께 창극으로 녹음한 유성기음반(일본 폴리도르음반회사 창극 ‘적벽가’ 전집 Polydor 19276)이 남아있어 서로 비교해 볼 수가 있는데 두 명창의 소리가 닮아있다.
“군사 별로 쉴 겨를없이 주야로 싸우다”에서 이동백이 소리에 멋을 내는 기법이 특히 김창룡과 대단히 동일한데 ‘주야’를 ‘주야-아---’ 하며 ‘야-아---’를 중고제 특유의 부드러운 두리뭉실한 성음, 중저음으로 조절하며 마치 정가 창법과도 같이 진중하게 발성하는 점에서 김창룡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주야-아---’와 같은 부분이 바로 중고제 명창들이 본능적으로 자주 구사하는 대표적인 말붙임새이다. 이를 만일 ‘야-아---’ 부분에서 좀더 강하고 자극적으로 부르면 아구성이 된다고 하겠다. 참고로 아구성 역시 고제 창법이다.
관운장이 말하는 부분인 “이 천하 강도같은 놈 모략을 허고”, 그리고 조조가 관운장에게 살려달라고 애원 절규하는 “어느 때 어느 존전이라” 부분과 “호령만 말끝마다 이리 허니 기가 죽고 무섭소”, “지성극대 허였지요” 부분의 이동백 소리 역시 김창룡이 즐겨 사용하는 창법인데 충청도 억양과 뉘앙스가 같다. 이는 충청도 ‘내포제’ 판소리의 흔적이라 하겠다.
다만 같은 지역 출신으로서 같은 사투리를 쓰더라도 각 개개인의 성격 차이가 성음에 묻어 나오듯이 이동백과 김창룡도 김정근제라는 공통 분모를 지녀 유사하면서도 개성 차이가 소리에 담겨있다.
그래서 ‘주야-아---’와 같은 부분을 이동백은 황소의 ‘음매’ 소리와도 같이 소처럼 우직하게 발성하는 반면에 김창룡은 ‘장작 패듯’ 투박하면서도 이동백보다 날카롭고 ‘뾰족하게’ 소리를 한다.
이 녹음에서 이동백은 중고제의 특성을 강하게 표출하면서도 “함부로 말하오리까?”와 같은 부분에서는 동편제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음반에는 고수가 남자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북 반주는 겹가락이 거의 없고 단순하지만 정확하게 정박자 핵심만 짚어 나간다. 이는 당시 이동백의 수행고수였던 강경수가 담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1915년 9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이 녹음 후 음반 제작사 측에서 엄청나게 많은 금액인 당시 돈 일천원을 취입자들에게 지불하였다고 하니(1915년 9월 22일자 『每日申報』 독쟈 긔별) 당시 조선구파배우조합 조합장이었던 판소리 고수 강경수가 그러한 큰 프로젝트에 빠질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동백은 앞부분에선 세마치 대목이라는 걸 고수나 청중에게 신호 보내듯이 정박자로 시동을 걸지만 점차 대마디 대장단으로 마디를 뚝뚝 끊지 않고 박을 자유롭게 누비며 엇박자를 많이 사용하여 사설을 주로 엇붙여 나간다.
관운장이 말하는 부분은 엄한 우조로, 조조가 얘기하는 장면은 처량한 계면조로 불러서 관운장과 조조의 심리, 각각의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설이 요즘보다 고풍스럽고 질박한 느낌이 나며 매우 해학적이다. 참고로 박봉술은 이 대목을 중모리로 하였고 이동백과 사설도 사뭇 다르게 했다.(노재명, “이동백의 삶과 음악세계” 『판소리 명창 이동백』 서울:국립국악원, 2003년, 78~80쪽)
적벽가 중 조조가 관공에게 비는 데(1915년 녹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관리번호 MIMC-0291, MIMC-0306
Victor 42971-B 북 남자 츙쳥도·죠션어 조죠가관공게비는대 가객 리동백
(세마치) “한사 조맹덕은 천하분분 봉기제장 협천자헐 맘으로 마상의 밥을 먹고 군사 별로 쉴 겨를없이 주야로 싸우다 오적의 패를 당하야 이곳을 지내었더니 천만의외 장군님을 뵈오니 그같이 반갑기가 없소. 꼭 맹세헙니다.” 운장님이 꾸짖는디, “이놈 쥐같은 조조놈아! 니 죄상을 깨달으리. 이 천하 강도같은 놈 모략을 허고 이놈 네의 조상도 대대로 한나라 녹을 먹어 지하로 돌아가도 국은을 다 못갚을디 이놈 예이 못된 조조놈아!” 조조가 비는디, “여보시오 장군님 살려주오. 어느 때 어느 존전이라 함부로 말하오리까?” “이놈!” “아이고 여보 장군님 땅이 낮다고 고만두시오. 호령만 말끝마다 이리 허니 기가 죽고 무섭소. 장군님 살려주오. 장군께서 오적의 패를 보시고 제의 나라로 와겼을 제 별궁 높이 짓고 미,감부인 장군님을 그저 우에 모셔두고 상마금이 천냥, 하마금이 천냥, 은금보화 애끼잖고 지성극대 허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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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수, 춤과 줄타기의 명수 강경수는 이동백의 초기 수행고수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이동백 인터뷰 문헌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강경수 관련 기록이 눈에 띈다.
靑葉生, “명창 이동백전: 칠십 평생을 조선 노래로 바친 정열 명창·고난의 일대기” 『조광 소화십이년 삼월호』(경성:조선일보사 출판부) 162~169쪽에서 발췌.
내 親한 親舊는 나의 鼓手 姜敬守氏가 있었고 그의 子弟 姜元參氏와는 至今도 갓가히 사괴나 그 外는 生死를 같이 할 동무는 없었읍니다.
1939년 3월 26일자 『조선일보』 이동백 일대기(4)에서 발췌.
진주서 살림하면서 창원으로 마산으로 돌아다니며 놀기 구년 동안이나 하다가 다시 강원도로 들어가니 그때 마침 강원 감사로 잇던 김정근(金政根)씨란 이가 또한 풍류를 조하하는지라 한번 이씨(이동백)의 명창을 듯자 그만 쏘다지듯 반해서 밤나즐 모르고 소리를 시키면서 대접은 근진히(극진히) 하엿다. (중략)
소리판이 버러질 때는 고수가 당시의 일류 광대로 유명한 강경수(姜敬守)이엇는데 강경수는 고수로서만 유명할 뿐 아니라 줄 잘타기로 당시에 단벌이엇다.
한편 1937년 『조광』의 “명창 이동백전”에서 강경수가 과거의 인물로 회고된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작고한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강경수라는 이름을 아는 이 조차 드물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그의 기량은 무척 출중하였으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일찍 국악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문자 기록으로는 신문 등의 일제시대 초기 문헌에만 그가 보인다는 점, 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유성기음반에서 조차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는 신문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기 시작하는 1920년 무렵부터 음반에 이름이 나올 법한 시기인데 보이지 않는 1925년 사이쯤 세상을 떠났거나 무대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강선영의 증언에 의하면 강경수는 강선영(1923년 음력 12월 25일 생, 호적:1925년 생)이 태어나기 전에 작고했다 한다.(2003.3.17.강선영 증언) 그렇다면 강경수의 작고 시기는 1920~1923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악계에서 강경수의 위상과 그의 뛰어난 예술적 면모는 위에서 밝힌 이동백의 증언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보다 확연하게 알 수가 있다.
경성부 훈졍동 등디에 설립한 京城舊派俳優組合은 그 동안 당국에 쳥원 승인된 후 지나간 이십륙일 경셩 광무대와 연흥샤 두 곳에 잇난 남녀 배우 일동과 기타 배우 등이 만히 모혀 장래에 리행하야 갈 사무분쟝을 행하얏다는대 김챵환 리동백은 션생으로 조합장은 강재욱 부조합쟝은 김인호 김봉이로 뎡하얏고 기타 총무난 죠양운 한문필 등으로 사찰은 곽쳔희로 모다 분장한 후 장래에 아모죠록 졍신을 찰여 남의 치욕을 면하고 잘 슈신하야 가미 조합 발젼의 긔쵸라고 강재욱의 설명이 잇섯다난디 그 죠합 일뎨 사무의 장리난 이젼에 경험 만흔 윤병두가 분장하야 본다더라(1915년 4월 1일자 『每日申報』 광대의 죠합 셜립)
지금 배우죠합쟝으로 잇난 강경슈난 아모것도 몰으난 배우들을 다리고 속을 썩혀 가며 일을 하야 볼가 하나 드로아미타불이라난 걸 웨들 그 모양인지 모르겠서(一俳優)(1915년 5월 30일자 『每日申報』 독쟈 긔별)
京城舊派俳優組合 組合長姜敬秀 副組合長金仁浩 副組合長金鳳伊 先生金昌煥 先生李亨順 先生李東伯(1915년 6월 1일자, 6월 2일자 『每日申報』 廣告)
組合長 姜敬秀, 副組合長 金奉文 金奉伊, 總敎 金昌煥 李亨順 李東伯(1916년 3월 5일자 『每日申報』)
본뎡 사뎡목 뎐차죵뎜피난 근쳐 신뎡 가난 즁간에 잇난 文樂座에 구파배우죠합 강경수 일행의 구파 연극을 한번 가셔 구경하엿다. 원톄 좁아셔 사백구십명이면 송곳 꼬질 틈도 업시 만원이 되난 협챡한 곳이라(1919년 10월 10일자 『每日申報』)
배우조합... 이 조합의 인계는 강경수(姜景秀)가 맡았었다.(安鍾和 著 『新劇史 이야기』 서울:進文社, 단기 4288년, 568쪽)
이와 같은 문헌 기록으로서 강경수가 바로 당대 국악인들의 가장 큰 결속 단체였던 조선구파배우조합(경성구파배우조합)의 조합장이었고 그것도 일시적으로 단기간 맡았던 것이 아니라 여러차례 조합장으로 선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 가운데 강재욱과 강경수는 동일 인물이다.
이런 여러 문헌 기록들로 보아 이동백과 강경수는 예술로나 감성으로나 가장 잘 맞는 사이였고 당대 최고봉에 오른 일류 명창, 최고의 명고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탕하고 사나이다운 이동백과 둘도 없는 친구로 어울렸다면 강경수 역시 아마도 의리있고 소탈하고 호방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강경수가 당대 국악인들의 연합체인 구파배우조합의 대표자 구실을 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인격과 지도력, 인간적 매력이 출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1915년 5월 30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개성이 강한 예인들의 속성 때문인지 결속 면에서, 단체 운영 면에서 강경수가 구파배우조합의 조합장을 맡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문헌 기록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강경수가 '아무 것도 모르는 광대들을 데리고 속 썩어 가면서 일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도 약 5년 가까이 이 단체의 대표격으로서 활동을 지속한 점을 본다면 강경수는 참으로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라 하겠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본다면 1915년 이동백의 첫 녹음이라 할 수 있는 조선구파배우조합 시절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제작된 이동백의 심청가, 적벽가 유성기음반에는 ‘북 남자’라고만 되어 있고 고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이 또한 당시 이동백의 수행고수였던 강경수가 담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겠다.
더구나 1915년 9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이 녹음 후 음반 제작사 측에서 엄청나게 많은 금액인 당시 돈 일천원을 취입자들에게 지불하였다고 하니 당시 조선구파배우조합 조합장이었던 강경수가 그러한 큰 프로젝트에 빠질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경수의 뒤를 이은 고수 한성준이 국악계 음반 취입, 라디오, 공연 출연 등의 섭외, 공급을 거의 도맡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심증이 더욱 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약간은 남아있는 관습이지만 국악계에서 판소리 고수들의 힘은 막강한 것이어서 고수의 눈에 잘못 들면 소리하는 사람들이 공연, 음반, 방송 활동을 하는 데 지장이 많다. 그리고 무당들이 담당하고 있는 관할 지역, 당골판을 대대로 물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개 20세기 고수들은 자신이 맡았던 일들을 수제자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경우가 많다.
한성준은 강경수의 제자였고 강경수 타계 후 1925년부터 음반, 라디오, 공연 출연자 섭외를 거의 총괄하다시피 했다고 생각된다. 즉 1925년 이전까지 강경수가 담당했던 걸 한성준이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종화의 저서 『신극사 이야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시기별로 20세기 전반기 명고수를 강경수(강재욱), 한성준, 김재선 순으로 꼽고 있다.
명창 무대에선 명창을 돕는 절대한 위치에 있는 고수(鼓手)가 있다. 장단이 없으면 명창이 있을 수 없다. 이 명고수로서는 당시 안성(安城) 사람으로서 강재욱(姜在旭)이 있었고 다음으로 한성준(韓成俊), 또 다음으로 훨씬 후배인 김재선(金在先)이 있었다.(安鍾和 著 『新劇史 이야기』 서울:進文社, 단기 4288년, 567쪽)
강선영 부모의 말에 따르면 한성준이 참봉 벼슬을 받은 것 역시 강경수가 힘 써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003.3.17.강선영 증언) 강경수 이후 당대 가장 힘있는 고수로 떠오른 한성준.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강경수의 후광을 크게 입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강선영(강경수 후손)의 모친은 한성준에게 딸 강선영의 무용 배우는 월사금을 내기 위해 힘겹게 삯바느질을 하며 언젠가 혼잣말로 ‘우리한테 돈 받으면 안되지’라고 하기도 했다 한다. 한성준이 자작 얼마 내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강선영 모친은 다른 사람 내는 거 얘기 듣고 어림 잡아 스스로 알아서 한성준한테 월사금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강선영이 한성준 무용학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모친이 있는 평택 자택으로 오랜만에 갔는데 하루는 모친이 삶아 주는 계란을 강선영이 맛있게 먹으니까 모친이 혼잣말로 ‘(한성준이 우리 딸 강선영을) 굶기면 안되는데’ 하고 걱정하며 언잖아 했다 한다.(2003.3.17.강선영 증언)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늘 자식 걱정인 우리나라 보편적인 어머니 마음이랄까 그런 입장에서의 염려였다. 한성준은 젊어서 강경수에게 국악을 배운 바 있고 여러 도움을 받은 바 있어 강경수의 후손 강선영이 자신에게 무용을 배울 때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다 한다.
1941년 1월 24일 천향원이란 요릿집에서 이동백과 한성준이 나눈 대담 내용이 실려있는 1941년 3월 『춘추』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강선영의 증언에 의하면 한성준이 강경수와 같은 급수의 선배인 이동백을 무척 어렵게 대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동백은 다름아닌 한성준의 스승 강경수의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또한 강경수와 이동백은 공히 통정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고 이들은 한성준보다 10세 가량 연상이다.(1955년 2월 4일자 『연합신문』, 2003.3.17.강선영 증언)
1937년 『조광』의 “명창 이동백전”에서 이동백이 강경수의 자제라고 말한 강원삼은 조선구파배우조합(경성구파배우조합)에서 회계를 맡은 바 있다.(1915년 6월 1일자 『매일신보』)
그 후 강원삼은 1930년 9월 25일 발회식을 거행한 조선음률협회에서 한성준과 함께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1930년 9월 27일, 1930년 11월 28일자 『매일신보』)
이동백은 1937년 봄 당시에 말하기를 강원삼과 지금도 가까이 사귄다는 언급이 있으므로(『조광 소화십이년 삼월호』) 1937년 3월 무렵까지는 강원삼이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선영은 자신의 나이 12세 때인 1934년에 강원삼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2003.3.17.강선영 증언) 이는 착오가 있는 듯하다.
강경수의 자제 강원삼과 제자 한성준이 함께 조선음률협회 총무였다는 점, 이는 국악인들의 위계 질서가 분명했던 당시 강원삼과 한성준이 동등한 서열 직급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이는 자제인 강원삼은 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 모두 강경수가 자식과 다름없이 여기지 않았을까 짐작케 하는 점이다.
과거 국악사를 돌이켜 보면 강경수는 한성준을 수제자로, 좋은 후계자로 둔 것이라 하겠다. 강경수가 자신의 후계자로 한성준에게 애착을 가질 만한 점들 가운데 무엇보다 한성준의 예술 기량과 총기, 노력을 들 수 있겠다.
이동백과 한성준이 나눈 대담 내용이 실려있는 1941년 3월 『춘추』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성준은 사라지는 전통 춤과 복식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영화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그리고 후일 그가 유성기음반에 여러 명인 명창들의 음악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상업성이 무척 없어 보이는 신수덕의 무속음악, 이선유, 방진관, 조학진, 김홍규, 백점봉의 판소리 유성기음반들. 이는 순전히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한성준의 노력에 의해 섭외되고 녹음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한성준은 스스로도 피리시나위와 같은 귀중한 연주를 음반에 남겼다. 또한 새로운 시도, 무용 창작품을 많이 선보였으며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점들이 아마도 일찍부터 강경수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전통춤의 대가로, 판소리 명고수로서 한성준이 추앙되기까지 그 앞세대 강경수가 베푼 따뜻한 애정과 배려, 관심, 가르침이 컸다고 하겠다.
한성준은 음반, 신문 등 다양한 기록매체의 시대를 살았고 강경수는 그런 문명이 활발히 출현하기 이전에 활동했기에 기록이 적게 남아있을 뿐 강경수 또한 한성준 이전에 그 이상의 기량과 활약상을 보여주고 국악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강선영은 그런 강경수와 한성준의 관계와 면모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바가 있다.
강선영, “한성준 선생-황홀경의 명무” 1955년 2월 4일자 『연합신문』에서 발췌.
(한성준이) 열네살 때 처음으로 고황제 어전에서 춤을 추었다는데 내가 아주 뒤에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이나마 선생(한성준)께선 유시에 그 때 통정 벼슬의 무인 강경수에게서 약간 춤의 기초를 배운 적이 있다 하며 이분은 즉 나의 큰할아버지였다.[필자 강선영무용연구원장]
이 오래전 문헌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한성준이 강선영의 큰조부 강경수한테 무용 기초를 지도받았고 최근 강선영의 증언에 따라면 한성준이 강경수에게 판소리 고법도 배운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2003.3.17.강선영 증언)
1915년부터 1919년 무렵까지 당대 전통음악, 전통춤 등 여러 분야 예인들의 결속체였던 조선구파배우조합의 조합장을 맡았던 강선영의 큰조부 강경수. 그리고 1990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된 태평무 인간문화재 강선영. 이 공통된 점들은 이 집안 사람들의 인품과 단체 통솔력, 당대 동료 예인들의 신뢰감과 호감이 어떠했는가를 잘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춘향가 중 <박석티> 대목은 이동백의 장기로 알려져 있다. 어사가 된 이도령이 박석고개를 넘어 남원 춘향집으로 향하면서 예전에 춘향과 사랑을 나눈 곳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는 대목이다.
진양조에 우조로 불린다. 이동백이 씩씩한 성음으로 이도령의 자신만만한 거동을 잘 묘사하였다. 이동백의 개성과 장점이 잘 나타나 있는 소리이다.
이 소리는 이동백이 1926년에 일축 음반회사에서 한번, 1928년에 일본 콜럼비아사와 빅타사에서 각각 한번씩, 1936년에 쇼지쿠사에서 한번 녹음하였다.
이렇게 이동백이 총 네차례 이 소리를 녹음한 것인데 이는 이동백이 가장 장기로 삼았던 잡가 <새타령>보다 더 많이 녹음을 남긴 셈이고 그 어떤 소리보다도 가장 많이 녹음을 한 것이고 그 만큼 이 <박석티>를 이동백이 즐겨 불렀으며 특기로 했다는 얘기이다. 웅장,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동백이 1928년에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녹음한 춘향가 중 <박석티>는 ‘낄룩 뚜루루루루루루루’ 하는 학두루미 소리의 묘사가 가장 압권인데 이는 이동백만이 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특기이다.
이 <박석티>는 어찌된 일인지 이동백이 나이가 들수록 목이 더 잘나서 이동백의 여러 <박석티> 중에서도 1936년 녹음이 가장 좋고 또 소리 분량도 가장 길게 녹음이 됐다. 1936년 이동백의 <박석티> 녹음 중에서도 특히 “행랑은 헙숙허고”의 거대한 호령조 우조 엄성은 그야말로 이동백이 아니면 아니될 걸작이라 하겠다.
허나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1936년 녹음의 학두루미 소리 묘사 ‘낄룩 뚜루루루루루 낄룩’ 하는 부분을 들어보면 이전 녹음만 못하다. 또 1936년 <박석티> 후반부는 그 이전 녹음과 사설이 사뭇 다르다.
1926년, 1928년, 1936년 이동백의 <박석티>가 사설 면에서나 음색의 분위기나 약간의 차이는 있으되 공히 일정한 틀을 지니고 결코 변치 않는 공통된 면이 아주 많다. 이동백의 다른 소리들이 연대별로 사뭇 다르게 불리는 즉흥성을 감안한다면 이 <박석티> 만큼은 이동백이 변치 말아야 될 규칙하에 부르는 듯하다.
이는 곧 이 소리가 어느 거장의 큰 더늠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동백의 춘향가가 대부분 김세종제이고 그의 김세종제 <천자뒤풀이>에서 느낄 수 있는 향기가 감지되므로 이 또한 김세종제일 가능성이 높다.(노재명,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14, 판소리의 전설 5명창-이동백·송만갑·김창환·김창룡·정정렬’ 음반 해설서, 노재명 기획, 서울:엘지미디어/LG소프트 제작, LGM-AK014, 1CD, 1996년)
아래에 이동백이 남긴 <박석티> 녹음의 사설을 일부 실어본다. 이 녹음들 가운데 일부는 CD음반으로 복각이 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몇 백년을 논해도 한이 없을 이동백과 송만갑 명창! 이 나라가, 이 지구가 존재하는 한 오래도록 관심을 갖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고 무궁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보배로운 두 명창의 판소리!
이들의 소리야말로 한국이 낳은 값진 음악 보물이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자부심이 아닐까 한다. 그 어마어마한 모습들, 이 다음호에 이어서 또 차근차근 그림을 그려 나가도록 하겠다.
춘향가 중 박석티<1> 1926년 이동백 녹음
MICD-0605(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관리번호)
일츅죠션소리반 K608-B 古代小說劇 春香傳 御使發行(四) 李東伯 金秋月 申錦紅 鼓李興元
(아니리) 이동백: 그때어 어사또께서 편지 보시고 남원으로 들어가시겠다.
(진양조) 이동백: 박석티 넘어들어 남원읍으로 향허신다. 모연은 자옥헌디 안관산천 반갑구나. 산도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로구나. 광한루야 온당허며 오작교야 성허게 있느냐. 녹수화림 우거진 데 춘향이 추천허고 노던 디요. 백세청청 푸른 버들 나귀 매고 노던 데로다. 예 다니던 길을 보니 춘향 생객이 더 나는구나. 천전리를 돌아들어 춘향집을 찾어드니, 행랑은 헙숙허고 담장은 찌그러졌네. 장원의 거친 풀은 적막히 우거지고, 사창전 한매화난 옛날 소식을 전허는 듯, 내가 올라갈 제 써 붙인 입춘서가 설한풍으 다 떨어져 가천가의로 흩날리네. 효제충신 예의염치 충성 ‘충’, 가운데 ‘중’자 떨어지고 마음 ‘심’자만 왼전허구나. 문전에 누운 개 구면객인 줄을 모르고서 함부로 나서 퀑퀑 짖난다. “이 개야!”
춘향가 중 박석티<2> 1928년 이동백 녹음
MIDAT-0252(CB-1352), MIDAT-0027
Regal C155-B(20637) 春香傳 御使南原入 李東伯
(진양조) 박석고개를 넘어들어 남원 읍내로 향허신다. 산도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로구나. 광한루야 온당허며 오작교야 성하게 있느냐. 녹수한림 우거진 디 춘향이 추천허고 노던 디요. 백세청청 푸른 버들 나구 매고 노던 디라. 이런 저런 길을 보니 춘향 생객이 더 난다. 어천변리를 돌아드니 춘향 사는 집을 바라보니, 행랑은 없어져지고 담장은 찌그러졌구나. 좌우로 묻힌 풀은 적막히 우거지고, 다창연의 한매화 옛날 소식을 전허는 듯, 그간이여 학두루미 다만 한 마리 남은 중 허리 한 날개를 쫑긋 얹고 한 날개난 반만 들고 ‘낄룩 뚜루루루루루루루 낄룩 뚜루루루루루루루’ 징검징검 들어오니 미물이라도 반갑구나. 내 솜씨로 써 붙인 입춘서 화란풍 다 모도 떨어져 가천가의로 흩날린다.
춘향가 중 박석티<3> 1936년 이동백 녹음
MISP-0585
Shochiku S18-A 春香傳 박석태(上) 李東伯 鼓·丁元燮
(진양조) 박석고개를 쉬어 넘어 남원읍으로 향헌다. 모연은 자욱헌디 안관산천이 반갑구나. 산도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로구나. 광한누객이 온당허며 오작교야 성허게 있느냐. 녹수화림 우거진 디 춘향이 추천허고 노던 디요. 백세청청 푸른 버들 나귀 매고 노던 데로다. 예 다니던 길을 보니 춘향 생객이 더 나는구나. 춘향 사는 집을 찾어드니, 행랑은 헙숙허고 담장은 찌그러졌구나. 장원의 거친 풀은 적막히 우거지고, 사창전으 한매화 옛 소식을 전허는 듯, 적막한 빈방 안에 처량한 게 울음이로구나. 어디서 학두루미 하나 한 날개는 지긋 얹고 또 한 나래 반만 들고 지가 무신 인사를 하는 체하고 ‘낄룩 뚜루루루루루 낄룩’ 징검징검 들어오니 미물이라도 내가 보니 반갑구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