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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구암집(龜巖集)
조선 후기의 학자 이원배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원배(李元培)의 시문집. 16권 8책. 목활자본. 1820년(순조 20) 문인 현익수(玄翊洙)·지약수(池若洙)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수에 김이교(金履喬)의 서문과 권말에 유성주(兪星柱)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 122수, 권3·4에 경의조대(經義條對) 62개 항목, 권5·6에 예의답문(禮疑答問) 72개 항목, 권7·8에 서(書) 54편, 권9에 서(序) 11편, 기 3편, 제발(題跋) 5편, 논 9편, 권10·11에 설 6편, 잡저 8편, 권12·13에 묘갈명·묘표, 행장 6편, 제문 4편, 애사 1편, 권14·15에 일록(日錄), 권16은 부록으로 묘갈명·행장·제문·만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고체(古體)·근체(近體) 등 다양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감회시가 많은 것이 특색이다. 〈경의조대〉는 그가 사서삼경과 ≪춘추≫·≪예기≫ 등의 경의(經義)에 관해 왕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예의답문〉은 관변례(冠變禮)·혼례·혼변례(婚變禮)·상례·상변례·제례·제변례·종법(宗法)·잡례(雜禮) 등에 관하여 이민식(李敏植)·현배후(玄培厚)·이순(李詢)·이지박(李址博) 등과 문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서(書)에도 경의와 예설에 관하여 제자인 김이교·현익수·임종칠(林宗七) 등과 문답한 것이 많다. 논에는 〈유종원론이윤거취 柳宗元論伊尹去就〉·〈변군자소인론 辨君子小人論〉·〈붕우론 朋友論〉 등 유교적 도덕관이나 의리·인격 등에 관하여 쓴 것이 대부분이다.
〈일록〉은 1784년(정조 8) 1월부터 그가 죽은 해인 1802년(순조 2) 3월까지의 일기이다. 관북지방의 학문적 연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구암집(久庵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취문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취문(金就文)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1791년(정조 15) 현손 몽의(夢儀)·몽화(夢華)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정범조(丁範祖)·김종수(金鍾秀)의 서와 권말에 오재순(吳載純)·최광벽(崔光璧)의 발문이 있다.
권 1·2에 시 12수, 소 2편, 차 1편, 계 8편, 서(書) 5편, 기 1편, 설 1편, 발 2편, 잡저 4편, 논 3편, 책 1편, 묘갈(墓碣) 1편, 행장 1편, 권3·4는 묘지 5편, 부록으로 묘지 1편, 행장 2편, 제현기술(諸賢記述) 13편, 사제문 1편, 제문 8편, 만사(輓詞) 33수, 봉안문 1편, 고유문 1편, 선액사제문(宣額賜祭文)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시운이 청절하고 품격이 매우 높다. 〈유관동 遊關東〉은 강원도 지방 산수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청정상례소 請正喪禮疏〉는 예의 제정과정에서 개설적인 조항만을 다루고 부분적인 세부사항의 규정이 없어 시행 과정에서 당시의 상황과 집례자의 의견에 따라 집행되어 본제에 오류가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오례(五禮) 중에서 상례는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획일성을 기하는 것이 풍속의 교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바로잡을 것을 건의하였다.
〈헌부계 憲府啓〉는 1545년(인종 1)에 있었던 윤임(尹任)의 옥사,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의 옥, 1549년에 있었던 이홍윤(李洪胤)의 옥사에 연루된 무고한 사람들을 방면해줄 것을 청한 것이다.
〈치도책 治道策〉은 정치는 정도에 맞도록 해야 하는데 ≪대학≫의 삼강령이 바로 치도라고 설명하면서, 정심·성의·수신·치국의 길이 치도이며, 치도는 군신이 합심하여 이루어지지만 임금이 솔선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이밖에도 오자서(伍子胥)의 충절을 논한 〈오자서론 伍子胥論〉과 방외의 교재로 승려에게 도의 원리를 논한 〈증금강승영응 贈金剛僧靈應〉이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형 취성(就成)의 유고가 첨가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구암집(龜菴集)
조선 중기의 학자 이성익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이성익(李星益)의 시문집. 1책 90장. 목판본. 그의 친구 권상하(權尙夏)와 아들 대령(大齡)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고 하는데, 간행연도는 미상이다. 시 2백여수, 소 1편, 서(書) 3편, 기 1편, 서(序) 2편, 잡저 6편, 그리고 부록에 제문 2편, 만사 5수, 행록초(行錄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에는 〈월야영설백 月夜咏雪柏〉·〈촌부사 村婦詞〉·〈전옹 田翁〉·〈동창조욱 東窓朝旭〉 등 서정성 짙은 작품이 많다.
그리고 다수의 〈설 雪〉과 연작으로 된 〈독락당십영 獨樂堂十詠〉·〈삼원 三願〉을 비롯하여, 월과(月課)의 대작(代作)인 〈일사부정 一絲扶鼎〉·〈추진박랑사 椎秦博浪沙〉와 장편의 〈친경 親耕〉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사실적 필치로 묘사한 〈전옹문답 田翁問答〉과 과체(科體)로 지은 장편의 〈권진낙양염 捲盡洛陽簾〉·〈동정운운 動靜云云〉 등 다양한 형식과 폭넓은 제재의 시가 고루 망라되어 있다.
〈신해년관소초 辛亥年館疏草〉와 권상하에게 보낸 서간으로 답서도 아울러 수록된 〈여권진사서 與權進士書〉, 그리고 잡저에 〈서매창화보 書梅窓畫譜〉·〈견학귀문 譴瘧鬼文〉 등이 실려 있다. 부록에는 그의 친구들이 그의 조상과 행적에 대해 서술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구암집(龜菴集)
조선 후기의 학자 김제학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김제학(金濟學)의 시문집. 4권 4책. 필사본. 권두에는 아우 제성(濟性)의 서문이 있으나, 편찬·간행경위는 미상이다. 권1에 서언(敍言), 권2에 기 3편, 서(序) 5편, 제문 1편, 권3에 송(頌) 1편, 부(賦) 1편, 행장 23편, 권4에 시 270여 수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은 국가의 성쇠가 학문의 존폐에 달려 있다고 역설하고, 선비가 오직 해야 될 일은 수신제가 등이라고 말한 뒤에, 조선 창업이래 왕가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개선 방법과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조목별로 설명하였다.
제2책의 〈신라시조왕본기〉에는 신라의 연원과 김씨(金氏)의 흥기사적(興起事蹟)·왕계(王系)·파보(派譜) 등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재조번방송 再造藩邦頌〉에서는 기자(箕子)에 연원을 두어 역사를 기술했고, 조선의 태조로부터 명종까지의 치적을 하나하나 평가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 있었던 전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이이(李珥)와 그의 제자 조헌(趙憲)의 선견지명, 송상현(宋象賢)·신립(申砬)의 장렬한 전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패주, 행주대첩과 노량해전에서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의 전공 등 역사적 사실을 방대하게 기술하면서, 칭찬과 함께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이 글은 역사를 국가기관이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 기술했다는 데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상세하면서도 객관적 비판을 가한 것이 높이 평가될 만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암집(九巖集)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이풍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이풍(李以豐)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손자 상석(相奭)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의수(李懿秀)의 서문과 권말에 상석의 후지가 있다.
권1은 시·서(書), 권2∼4는 잡저 17편, 명 3편, 제문 13편, 부록으로 만(挽)·제문·묘표·지(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잡저는 〈천지일원구도 天地一元舊圖〉·〈천지일원신도 天地一元新圖〉 등 ≪주역≫에 관한 각종 도설(圖說)이 대부분으로 역학에 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계몽차의 啓蒙箚疑〉는 의약·풍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율려신서차의 律呂新書箚疑〉는 음악에 관한 ≪율려신서≫를 공부하는 중에 의심나는 것을 기록한 내용으로 분량이 많고 세밀하여 이에 관한 연구실적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밖에 〈예의잡조 禮疑雜條〉·〈제식도 祭式圖〉 등 예설에 관한 것과 〈체용설 體用說〉·〈인심도심선후변 人心道心先後辨〉 등 성리학적인 문제에 관하여 논술한 것이 있다. 제문 중에는 채제공(蔡濟恭)에 대하여 쓴 것이 있다.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구애문집(龜厓文集)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조극승의 시문집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조극승(曺克承)의 시문집. 8권 3책. 목판본. 1898년 그의 아들인 병수(秉秀)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도화(金道和)의 서문과 권말에 김흥락(金興洛)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123수, 권2는 소 2편, 권3·4는 서(書) 102편, 권5는 잡저 3편, 권6은 서(序) 2편, 기 3편, 발 4편, 명 2편, 축문 7편, 권7은 제문 17편, 유사 4편, 묘표 1편, 권8은 부록으로 만사 27편, 애사 1편, 뇌문 1편, 제문 8편, 행장 1편, 묘갈명 1편, 묘지명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2편은 사직소이다. 정언을 사직하며 올린 소에서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임금에게 있으며, 인재를 얻어 적소에 임명해야 함을 설명하였다. 서(書)에는 스승 유치명(柳致明)과 당시의 정승·판서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상당수 있다.
잡저의 〈대학강록 大學講錄〉은 1867년 민심을 회복하고, 사교(기독교)로부터 전통을 지키며, 열강으로부터의 자구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앙에서 사서 등의 책을 각 고을마다 강독하게 했다는 소서(小序)가 붙어 있다.
이어 이 취지에 따라 ≪대학≫의 서문에서 마지막 장까지, 때로는 소주(小註)까지 들어가며 강론한 내용을 기재하였다. 〈사서차의 四書箚疑〉·〈심경의의 心經疑義〉는 사서와 ≪심경≫의 의문됨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이 밖에 발 가운데 〈경서열성어제장첩후 經書列聖御製糚帖後〉는 그가 종부시주부로 재직하며, 종부시에 전해오는 태조로부터 경종까지의 어필 8권 가운데에서 몇 점을 모사한 기록이다.
유사의 〈배씨이충육효행록 裵氏二忠六孝行錄〉은 경상북도 청도에 사는 배원우(裵元佑) 집안의 충효행적을 적은 것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도 일대를 지킨 내용과 함께 자손들의 효행을 적은 것이다.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구애집(龜厓集)
조선 후기의 학자 이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완(李琬)의 시문집. 6권 3책. 목판본. 조카 인보(仁溥)가 초간본을 간행(1830년대 말)하였고, 70여년 뒤인 1909년에 그의 종5세손 면주(冕宙)가 중간하였다.
서문과 발문이 없으며, 내용은 권1·2에 시 291수, 권3은 서(書) 10편, 잡저 9편, 권4는 명 2편, 상량문 1편, 축문 5편, 제문 12편, 애문 3편, 권5는 묘지 4편, 행장 4편, 권6은 행적 5편, 부록으로 가장 1편, 행장 1편, 만사 18수, 제문 6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2에 수록된 많은 분량의 시는 대부분 자연을 노래한 것이며, 교유했던 사람들과의 우정과 세월을 읊은 시가 많다. 서(書)에는 이현일에게 성리학의 이론을 물은 문목과 이현일의 답서가 함께 실려 있다.
또한, 동문의 여러 사우와 내왕한 편지 〈인심도심 人心道心〉 등 성리학에 관한 논변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잡저의 〈기복제문답 記服制問答〉·〈근록주회암이퇴계론사단칠정설 謹錄朱晦菴李退溪論四端七情說〉 등은 상례 복제에 대한 문답과 주자와 이황의 사단칠정에 대한 논설을 기록해놓은 것으로,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다. 규장각도서 및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구와문집(龜窩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굉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굉(金㙆)의 시문집. 23권 11책. 목판본. 1846년(헌종 12)에 간행되었다. 서문과 발문이 없고, 편자 미상이다.
권1은 시 96수, 권2·3은 소 14편, 권4는 서연강의(書筵講義) 1편, 경연강의(經筵講義) 1편, 권5·6은 서(書) 75편, 권7은 잡저 5편, 서(序) 15편, 기 5편, 발 12편, 애사 1편, 축문 8편, 권9는 제문 20편, 권10은 비(碑) 2편, 묘지명 8편, 권11은 묘갈명 11편, 묘표 3편, 권12·13은 행장 22편, 권14는 유사 8편, 부록으로 권1은 연설(筵說) 1편, 연보, 사제문(賜祭文) 1편, 제문 18편, 만사 22편, 뇌문(誄文) 1편, 행장 2편, 묘갈 1편, 속집의 권1은 시 14수, 소 7편, 권2는 서(書) 52편, 권3은 서(序) 13편, 권4는 기 7편, 발 6편, 상량문 1편, 고유문(告由文) 7편, 상향문 16편, 권5는 묘갈명 13편, 묘지명 3편, 권6은 행장 7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가운데 〈창의변무소 倡義辨誣疏〉는 1728년(영조 4) 사림을 대표해 지은 것으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경상도 일원에서 창의한 사람이 많았는데, 한 사람도 의사(義士)로 포상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서(書) 가운데 이상정(李象靖)에게 올린 별지(別紙)는 ≪서명 西銘≫에 관한 문답으로, ‘계지자선(繼之者善)’의 ‘계(繼)’자는 곧 기(氣)가 나오는 것이고, ‘선(善)’자는 이(理)가 행(行)해지는 것이며, ‘성지자성(成之者性)’의 ‘성(成)’자는 기의 형체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성(性)’자는 이가 성립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와 기에 적용시켜 체용을 겸비한 것이라고 여겼으며, 노불(老佛)의 허무적멸(虛無寂滅)과 양묵(楊墨)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비교, 논술하였다.
배상열(裵相說)의 문목(問目)에 답한 글은, ≪소학≫은 행함을 먼저하고 앎을 뒤로 하는 것이고, ≪대학≫은 앎을 먼저하고 행함을 뒤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성(性)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구분되나, 원래 둘이 아니고, 중간에 있어서 상대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기가 움직이면 이도 또한 움직이고 기가 정(靜)하면 이도 정해지나, 이가 기를 주재한다는 내용이다.
〈여치연별지 與穉淵別紙〉는 이이(李珥)와 이구(李榘) 사이의 이기설(理氣說)을 비교, 논설한 것이다. 〈답곡산쉬이익보 答谷山倅李翼普〉는 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한 〈사단칠정이기변 四端七情理氣辨〉을 분석한 것으로, 주리(主理)·주기(主氣)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논리의 서한이다.
잡저 가운데 〈변용학혹설 辨庸學或說〉은 ≪대학≫의 명덕훈(明德訓)을 이와 기가 합친 것으로 설명했으며, ≪중용≫의 불편불의(不偏不倚)와 솔성지도(率性之道)에 대해 해설하였다. 〈유일읍대소민인 諭一邑大小民人〉은 단양군수로 있을 때 거경(居敬)·함양(涵養)과 학덕을 겸비한 행정으로,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한 가르침이다.
〈일읍권학하첩 一邑勸學下帖〉은 강원도 이천군수 재직 당시 고을 백성들에게 인륜·의리를 밝히고, 아울러 학문을 권장하는 내용의 가르침이다. 성균관대학교·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구운기(九雲記)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9권 9책(총 336장). 한문필사본. 무명자(無名子)가 첨산(添刪)한 ‘신증재자구운기(新增才子九雲記)’를 가리킨다. 내용은 〈구운몽 九雲夢〉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 〈구운몽〉 이본의 성격을 띠고 있다.
‘더 보태고 줄였다’고는 하나 〈구운몽〉의 계해본의 장회가 16회임을 기준으로 볼 때, 〈구운기〉는 35회이다. 글자수도 2배가 넘어 줄이기보다는 더 보태어 훨씬 방대한 작품이 되어 ‘신증(新增)’이란 말을 쓴 것 같다.
지금까지 발견된 〈구운몽〉의 다른 이본과는 성격이 다르기에 〈구운기〉라 한 것 같다. 주된 이야기는 대동소이하다.
천태산 연화도량의 성진(性眞)이 양소유(楊小游)로 환생하여 팔선아(八仙娥)의 환신인 이처육첩(二妻六妾)을 차례로 맞고 공명훈업(功名勳業)을 이루었으나, 환몽을 깨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팔이고(八尼姑)와 더불어 보살대도(菩薩大道)를 깊이 깨달아 다 함께 극락세계로 간다는 내용이다.
9명의 이름과 배경, 육관대사(六觀大師)와 위부인(衛夫人)도 같으며, 시문(詩文)도 공통된다. 그러나 문체가 중국 산문체를 닮았고, 허두(虛頭)가 전혀 새롭고, 구성상의 차이가 많고, 배경이 명(明)나라 만력연간(萬曆年間)으로 다르고, 표현에도 상이함이 많다.
〈구운몽〉의 16장회가 35장회로 늘어나서 〈구운기〉에는 〈구운몽〉에 없는 사건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성진과 팔선아들의 탄생이 자세히 설화되었고, 장수하(張脩河)의 등장으로 불의의 사건들을 전개하는 부분(7·26·27·28회), 팔낭자들의 놀이(31·32회) 등은 〈구운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운기〉는 표현·서술에서 〈홍루몽 紅樓夢〉과 많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부인들이 아패(牙牌)와 투각령(骰角令)을 하여 놀이하는 장면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낙유원(樂遊園)에서 읊은 영국시(詠菊詩)는 〈홍루몽〉에 있는 국화시와 완전히 일치한다.
〈구운몽〉이 중국 청대(淸代)에 확대, 개찬되어 10권의 〈구운루 九雲樓〉가 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구운루〉가 〈구운기〉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논자들이 있다. 하지만, 〈구운루〉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중국 문인이 〈구운몽〉을 번안하여 〈구운기〉가 생성되었다는 중국측 학자의 의견도 있다.
한편, 〈구운기〉를 첨산한 무명자를 밝히지 못했고 중국에서는 〈구운기〉가 발견된 사실이 없으므로,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참고문헌>>九雲記攷(尹榮玉, 朝鮮後期의 言語와 文學, 螢雪出版社, 1978)
<<참고문헌>>九雲夢與九雲記之比較硏究(丁奎福, 中國學論叢 7, 高麗大學校, 1990)
<<참고문헌>>九雲記的作者及其與紅樓夢的關係(崔溶澈, 紅樓夢學報 2, 紅樓夢學會, 1993)
구운몽(九雲夢)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이 지은 고전소설
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국문필사본·국문활자본·한문필사본·한문현토본 등 50여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춘택(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 南征記〉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 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균(盷)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근래에 ≪서포연보 西浦年譜≫(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지고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李縡)가 〈구운몽〉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구운몽〉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공(空)’에 있다.
공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구운몽〉은 ≪금강경≫이 소설화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이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인사드렸다.
용왕의 후대로 술이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연화봉을 구경하며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하여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양처사는 신선이 되려고 곧 집을 떠났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경사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九士良)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경사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경사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으로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졌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여 두 사람이 인연을 맺도록 한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려 하니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린다.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는데, 이튿날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다.
한편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날 황제가 베푼 주석에서 양소유를 보고 그 환선시(紈扇詩 : 흰 깁 부채에 쓴 시)에 차운(次韻 :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여 애타게 된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날 밤에 난양공주의 퉁소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로 간택되지만,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그 때 토번왕이 쳐들어와서 양소유가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진중에서 토번왕이 보낸 여자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양소유는 백룡담에서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주고 그녀와 또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이 물리침을 당하여 실심에 빠진 정경패를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탄하여 형제가 되어 정경패를 제1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하여지고, 영양공주·난양공주와 혼인한 후, 진궁녀와 또 만나 동침하는 가운데 진채봉임을 확인하게 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노모를 찾아가 경사로 모시고 오다가 낙양에 들러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리고 오니, 심요연과 백릉파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 양소유는 2처6첩을 거느리고 일가 화락한 가운데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아간다.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비회에 잠긴다.
이에 9인이 인간세계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며,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자고 할 때, 호승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꿈에서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와 전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팔선녀가 찾아와 대사의 가르침을 구한다. 이에 대사가 설법을 베푸니, 성진과 팔선녀는 본성을 깨우치고 적멸(寂滅 : 번거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를 이르는 말)의 대도를 얻어 극락세계에 돌아갔다.
이 작품의 기본설정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실현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金時習)의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같은 몽유소설(夢遊小說)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꿈 속에서 이룬 욕망성취가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한 점은 다른 몽유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몽유소설과는 달리 꿈 속의 주인공인 양소유의 삶이 ‘영웅의 일생’에 따라 전개되는데, 투쟁이 약화되는 대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영웅소설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구운몽〉은 몽유소설과 영웅소설을 변형시켜 결합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구운몽〉은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과정이나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미있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인물·심리를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적 흥미를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며, 사상적 깊이를 가지도록 하여 유식한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구운몽〉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구운몽〉 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구운몽〉은 고소설 창작에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어, 〈춘향전〉과 더불어 고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구운몽〉에 관한 연구는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원본을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김태준(金台俊〉은 〈구운몽〉도 〈남정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만중이 국문으로 창작한 것을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정규복(丁奎福)은 국문 원작설에 의문을 제기하여, 한문 ‘을사본’의 모본이며 최고본(最古本)이라는 한문 ‘노존본(老尊本)’을 발견하였다.
이에 의해 이전까지 원본에 가깝다고 추정해 온 국문 ‘서울대학본’ 및 국문 ‘노존본’이 한문 ‘노존본’과 같은 계통이며 이의 번역본임을 증명하고 한문 원작설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구운몽〉은 텍스트의 연구에서, 한문본이 노존본(1725년 이전)에서 을사본(1725)으로, 을사본은 다시 계해본(癸亥本, 1803)으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국문본도 노존본 계통의 국역본(國譯本), 을사본 계통의 국역본, 계해본 계통의 국역본 등으로 분류된다. 아울러 서포문중설화(西浦門中說話)가 밑받침되어 〈구운몽〉의 한문 원작설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데 〈구운몽〉의 한문본과 국문본의 비중이 거의 같다는 점은 계층과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 〈구운몽〉이 수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구운몽〉은 어느 부류의 독자층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공동의 소설적 규범을 개발하는 데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운몽〉의 주제 또는 사상에 관하여는 여러 연구에서 논란이 거듭되었다. 우선 주장된 바는 〈구운몽〉에는 삼교화합사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게일(Gale,J.)이 〈구운몽〉을 영역할 때 서문을 쓴 스콧(Scott,R.)은 〈구운몽〉에는 “유교·불교·도교 사상이 섞여 있다.”고 하였다.
김태준은 작품의 여러 장면에서 나타나는 민간신앙에서 유·불·선 삼교의 화합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주왕산(周王山)은 유교의 현실주의, 불교의 은둔사상, 도교의 향략주의가 나타나 삼교가 “혼연히 일치된 소설”이라고 하였다.
또, 이명구(李明九)는 양소유는 유교를, 성진은 불교를, 팔선녀는 도교를 각기 표상하고 있어, 〈구운몽〉에는 “유·불·선 세가지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삼교화합설에 대하여 김만중의 불교에 대한 심취나 작품에 나타나는 불교적 성향을 들어 〈구운몽〉에 나타난 사상은 오로지 불교사상뿐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박성의(朴成義)는 〈구운몽〉이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을 사상적 배경으로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구운몽〉이 나타내는 사상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공사상(空思想)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정규복에 따르면, 성진은 팔선녀로 인하여 미(迷)하였다가 유교적인 부귀공명의 환(幻)을 통하여 육관대사 앞에서 각(覺)한 성진으로 되돌아갔으니, 이는 미에서 환을 통하여 각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중심으로 한 공사상과 대응된다.”는 것이다.
성현경(成賢慶)은 “넓게는 불교사상, 좁게는 공사상이 서포적으로 변용, 굴절되어 나타났다.”고 하였다. 정주동(鄭柱東)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금강경≫의 공사상, 곧 공즉시색(空卽是色)·색즉시공(色卽是空)의 진공묘유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설성경은 “〈구운몽〉에서는 대승불법이 강조되고, 이는 금강경의 공사상을 통하여 구현된다.”고 하여 성현경, 양주동과 마찬가지로 정규복의 금강경이 바탕이 된 공사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공사상설에 대하여 김일렬(金一烈)은 〈구운몽〉이 금강경의 중심사상인 공사상을 투영하려 하였으나, 그 결과는 “공사상의 본격적인 차원”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구운몽〉의 현실부정은 각자의 관념적인 도피이며, 이는 공사상의 한 단계로서 공사상만의 것이 아니고, 불교사상 일반의 것으로 그 초보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동일(趙東一)은 “성진이 금강경 사상의 높은 차원의 것을 실행하지는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그 사상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사상설을 비판하였다. “상(相)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라는 정도의 생각은 불교의 기본적인 전제이기에 불교사상설이 오히려 실상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복은 〈구운몽〉의 종결 부분에 등장하는 육관대사가 성진과의 문답에서 성진의 꿈(양소유)과 인간(성진)의 2분법을 깨뜨리고 성진과 양소유, 몸과 꿈, 장주와 호접의 1분법으로 되돌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구운몽〉의 주제와 사상은 다시 ≪금강경 金剛經≫이 바탕이 된 공관(空觀)의 미학임을 재확립하였다.
〈구운몽〉을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다룬 연구로는 정규복의 업적이 대표적이다. 〈구운몽〉에 나타나는 환몽구조(幻夢構造)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인도에서 형성된 ‘사라나비구(娑羅那比丘)’(雜寶藏經)이다. 이것이 육조시대에 중국에 들어와 당나라 때에 나온 〈침중기 枕中記〉·〈남가태수전 南柯太守傳〉·〈앵도청의 櫻桃靑衣〉 등과 같은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작품이 다시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구운몽〉 창작의 배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고미야마(小宮山天香)에 의하여 〈무겐 夢幻〉으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즉 환몽구조는 인도에서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불경의 ‘사라나비구’는 설화형태에 지나지 않고, 당대의 전기소설은 소설의 초기형태에 불과하나, 〈구운몽〉은 완전한 소설이라는 점이 다르다. 일본으로 건너간 〈구운몽〉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번안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구운몽〉이 동양문학권 내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구운몽〉은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나 ≪태평광기 太平廣記≫ 및 ≪서유기 西遊記≫의 영향도 받았다.
한편, 국내의 다른 작품과의 대비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상택은 〈구운몽〉이 초월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춘향전〉은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성현경은 〈구운몽〉이 〈옥련몽 玉蓮夢〉(옥루몽)을 낳게 한 모태가 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 〈구운몽〉의 ‘여장탄금(女裝彈琴)이야기’로도 그 이야기를 기조로 한 〈임호은전〉·〈장국진전〉·〈김희경전〉·〈옥선몽〉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김병국(金炳國)은 분석심리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작품의 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고자 하였고, 이능우(李能雨)는 작품 속의 성적(性的) 상징물들을 분석하였다. 김열규(金烈圭)는 기호론적 방법론으로 작품에 나타난 ‘이산(離散)’과 ‘회동(會同)’이라는 구조를 시도하였다.
<<참고문헌>>九雲夢硏究(丁奎福, 고려대학교출판부, 1974)
<<참고문헌>>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4)
<<참고문헌>>九雲夢原典의 硏究(丁奎福, 一志社, 1977)
<<참고문헌>>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참고문헌>>金萬重硏究(金烈圭·申東旭 編, 새문社, 1983)
<<참고문헌>>韓中文學比較의 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87)
<<참고문헌>>韓國古小說史의 硏究(丁奎福, 韓國硏究院, 1992)
<<참고문헌>>九雲夢硏究-그 幻想構造의 心理的 考察-(金炳國,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68)
<<참고문헌>>九雲夢의 比較文學的 考察(丁奎福, 高麗大學校論文集 16, 1970)
<<참고문헌>>李朝夢字類小說硏究-특히 九雲夢과 玉樓夢을 中心으로-(成賢慶, 국어국문학 54, 1971)
<<참고문헌>>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金一烈, 어문논총 9·10합병호, 경북대학교,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