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회고
나는 고종 3년(1892년) 음력 6월 24일 인천의 舊邑地구읍지인 文鶴山문학산 밑 鄕校里향교리에서 商山상산 김씨 집안의 2대독자로 태어났다. 文鶴山문학산밑에서 여러 대를 살아온 우리 집은 가을이면 벼 2,3백석은 추수하는 부농이었다.
집안에서도 금지옥엽으로 자란 나는 글방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붓글씨를 잘 쓰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다섯살 때로 기억된다. 文鶴山문학산밑 절간(神堂)에 갔다가 탱화(幀畵)를 보고 와서 방벽에다 그럴싸하게 그려 놓았다. 아버지는 이걸 보시고 내가 그토록 귀한 아들이건만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환쟁이가 될테냐』고 다그쳤다.
이처럼 완고한 가정이건만 서당공부를 그만 두고 인천관립일어학교에 다니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온하기만 하던 우리 집안에 비극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군대해산령이 내려지고 얼마 되지 않아 전에 江華軍강화군 副尉별위로 있던 먼 친척뻘되는 권모란 분이 조부를 찾아왔다.
그는 당장 살길이 막연하니 제물포에서 장사라도 해야겠다면서 밑천 7백만 대달라고 통사정했다.
조부님은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7백원을 선뜻 내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권씨는 이 돈을 가지고 강화군에 있을 때의 친구들과 작당하여 팔미도에서 白銅私鑄錢백동사주전을 만들다 잡히고 말았다.
결국 권씨 때문에 우리 집은 위폐범의 물주가 되어 하루 아침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결백을 주장했건만 대질신문에서 꼬투리가 잡혀、 금품을 갈취할 속셈으로 경무서에서는 단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루아침에 가산을 다 뺏긴 우리 가족은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入獄입옥된지 6개월만에 아버지는 풀려나왔다. 출옥한 아버지는 몇개월 후에 홧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조부님과 어머님의 허락을 받아 집과 세간을 처분해 총재산 2원을 손에 쥐고 17세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남대문밖 염천교 너머 언덕배기에 셋방 하나를 얻어들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서 갖고온 돈은 셋방을 얻고 얼마간의 식량을 준비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조부님은 음력 10월 23일 불도 지피지 못한 방에서 싸늘하게 숨을 거두었다.
나와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몰랐다.
물정 모르는 유대꾼들은 상주인 나에게 돈을 걸라고 운구를 멈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픔이 복받쳐 눈물이 비오듯 하는데 상까지 땅에 붙어 있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어찌 어찌해서 초상을 치르고 이제부터는 내가 돈을 벌겠다고 나섰다. 인천에서 서울로 와서 3년 동안 우리 모자는 정말 죽을 고생을 했다. 굶기를 죽먹듯이 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내일의 희망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동안 주인에게 쫓겨나다시피 해서 이사 아닌 이사를 2번이나 했다. 한번은 이사 갈 곳이 없어 남의 집 행랑채에 이불보따리를 놓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일도 있었다. 인쇄소 직공 노릇도 하고 도장도 팠다. 이발소 잡역、제화공、측량기사 조수 등으로 전전하면서 근근 연명해 나갔다.
일거리를 찾아 내가 다니던 안동교회 이주완장로님이 경영하던 영풍서관에 갔다가 책 베껴 쓰는 일감을 얻고、그 자리서 白堂백당 玄采현채노인과 金敎聲김교성 중추원 참의를 만나 그분들의 소갯장을 얻어 가지고 서화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화미술회에 다닐 때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어쩔줄 몰라하며 쌀 한톨 없는 빈 부엌을 들락날락 하시면서 옷고름 자락에 눈물을 적시던 일이 눈에 선하다. 이때가 내 나이 스물한살. 학교에 들어간지 21일만에 御眞어진을 모셔 御容畵師어용화사로 대접받고, 李容汶이용문씨의 도움으로 일본유학까지 하고 돌아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던 것같다.
피나는 고생도 해보고 최고의 영예도 얻어봤다. 임금님에게 손목도 잡혀보고 예술원상도 받았다. 그림값으로 말해도 최고의 폐백을 받았었다. 시쳇말로 미희에게서 「프로포즈」도 받아봤다. 금강산도 다녀오고 중국여행도 했다. 그러나 어머님과 약속한 주색잡기만은 평생을 두고 한번도 한 일이 없다. 화가로서 부러움도 독차지해보고 동료들의 시샘도 샀지만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오직 나의 예술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3년만 지나면 미수를 맞는다.
오늘따라 첫눈이 내리기 때문인지 문득 노산이 내 팔순 때 지어 손수 써보낸
『畵仙화선以堂頌이당송』이 생각난다.
솔거 가신 뒤에 천오백년 긴세월을、
동방화단에 누구누구 헤옵던고,
화선을 만나려거든 이묵헌을 찾으시오.
붓끝에 새가 울고 먹뿌리면 꽃이 피고,
산수인물이 조화속에 나타나고,
담소로 팔십평생에 늙을 줄을 모르시네.
빼어나 고운 모습 학수를 사오리다,
수정같이 맑으신 뜻 석수를 사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