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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4 주일설교
억울함을 이기는 세 가지 비결
히브리서 12:1~3
162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청나라가 쳐들어와서 수많은 백성이 죽었고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30만명이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정묘호란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에 일부 여성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구사일생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졌다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남자들에게 있는데 몹쓸 일을 당한 불쌍한 여인들이 2차 가해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환향녀라는 말에서 화냥년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민간 어원설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여인들에게 한(恨)이 많겠지요.
1993년 임권택 감독이 제작한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은 진정한 소리를 하려면 한이 맺혀야 한다면서 딸 송화의 멀쩡한 눈을 멀게 만듭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까지 있는 우리 민족은 어쩌면 한민족(韓民族)은 한(恨) 민족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우리 민족만이 아닙니다. 거대한 나일강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사이에서 살던 이스라엘도 수없이 많은 전쟁의 피해와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민족은 로마에 의하여 전 세계로 흩어졌고 2차 대전 말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그리스어로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부릅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불에 태워진 제사, 즉 번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는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많이 있지만 ‘홀로도모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932년과 1933년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250~350만 명이 굶어서 죽었습니다. “기아로 인한 치사”를 우크라이나 말로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라고 하는데 이는 정부가 국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억울한 일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크리스천들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대에도 크리스천들은 억울하고 부당하게 손해와 고난, 박해를 당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재산이 몰수되고 감옥에 갇히고 맹수의 밥이 되고 수많은 사람이 산 채로 화형되었습니다.
또 16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가톨릭의 박해를 피하여 낯선 땅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고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프랑스 위그노들은 가톨릭의 박해를 받으면서 믿음을 지키다가 하루에 수만 명이 학살을 당한 사건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전 세계에서는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박해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미움받고 재산을 빼앗기고 테러당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무슨 유익이 있나요? 그리고 그런 피해와 억울함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이런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찾아와서 설명해주실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성경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충분한 설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초창기에는 주로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고 후에는 로마 정부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가톨릭의 박해를 받았고 오늘날은 이슬람이나 공산당의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를 박해하는 세력이 유대교, 로마 정부, 카톨릭, 이슬람교, 공산당 등 그 무엇이 되었든지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고 그들의 목표는 우리가 믿음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포기하고 자기들과 똑같이 살다가 지옥으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신자들이 유대교의 박해를 이겨내는 방법이나 21세기 신자들이 개인적인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나 원리적으로 똑같습니다. 또 이 부당하고 억울한 손해를 이겨냈을 때 주님이 주시는 상급도 같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음을 불사하고’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관을 주리라 하는 말을 들을 때 1세기의 성도들은 월계수 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월계수 관은 승리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금메달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월계수는 하루만 지나면 시들어 버리지만, 생명의 관은 영원히 시들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1~10장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수없이 열거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교에서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그 무엇보다 예수는 더 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갈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과 천국이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좋고 중요합니다. 믿으시면 큰 소리로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 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우리가 붙잡고 있는 믿음의 가치를 말하면서 그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대표적인 선진들 16명을 나열해 주었습니다. 아벨, 에녹은, 노아는, 아브라함은, 사라는, 이삭은, 야곱은, 요셉은, 모세는, 라합은,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사무엘과 다윗은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 설명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히브리서 11장 1~3절>을 꼭 외우시라고 했는데 같이 한번 외워 봅시다.
이제 12장에서는 우리도 이런 믿음의 조상들처럼 믿음으로 승리해야 하는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귀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분들처럼 우리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지침은 세 가지인데 우리에게 한 가지를 생각하고, 한 가지를 바라보고, 한 가지를 실행하라고 합니다. 따라 하세요. “생각하고, 바라보고, 실행하라.”
첫째, 예수를 생각하라
오늘은 특이하게 3, 2, 1절 순서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님 믿다가 너무너무 힘이 들어서 지쳐서 신앙생활을 포기해버리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거역하는 죄인들을 참으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환경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딘 고초를 다 당하시고 부끄러운 십자가,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박해가 두렵다고, 아니, 약간의 손해 보는 것이 싫다고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신자답게 살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자가 욕심부리고, 신자가 미워하며 싸우고, 신자가 음란한 생각과 행동을 하며, 신자가 거짓말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이것은 우리 예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싹싹 쓸어모아 지옥 불에 던져넣어도 쌉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런 사람을 참으십니다. 그따위로 신앙생활하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 같은 것은 신자도 아니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쳐 쓰러져서, “예수님, 저 이제 도저히 더 못 하겠어요. 저 이제 신앙 생활 그만 둘래요.”라고 하는 신자에게, “너 그럴 줄 알았다. 네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 적이 있니? 나도 이제 너에게 지쳤다. 여기서 우리 관계는 끝이다. 알겠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어떠세요? 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신앙생활에 무슨 방해가 있고 불편이 있고 손해가 있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 예수님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천국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갈 힘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 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둘째, 예수를 바라보라
3절을 먼저 보았으니 이제 2절을 보십시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ἀρχηγός인데 창시자 혹은 우두머리, 인도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이 시작되게 하신 분이며 계속해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거나 믿어도 내 마음만 진실되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만한 대상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완성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우리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중국 여행을 처음 가면 중국 공항에서 여행사 직원이 우리 팀 이름을 들고 기다립니다. 그 가이드가 우리 팀을 데리고 호텔도 안내하고 식당도 안내하고 관광지로 데리고 다닙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도둑이 많아서 여권을 도난당할까 봐 우리 여권을 가이드가 모아갑니다. 만일 가이드를 놓치면 여권도 없고, 중국말도 모르고, 지리도 모르고 어디서 방황할지 모릅니다. 마지막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 반드시 가이드를 바라보고 따라다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신앙생활의 시작부터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가이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놓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그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고통과 죽음을 개의치 않으신 것을 아시죠?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 12:2에도 나오지만 빌립보서에 더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가이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가이드를 절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서로 인사합시다. “가이드를 놓치지 맙시다.”
셋째, 벗어버리고 달려라
마지막 지침은 1절에 나옵니다. 지난주에 제가 에버랜드에 속한 포레스트 캠프 초청행사에 다녀왔습니다. 그 장소는 원래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장소인데 이번에 특별히 귀한 분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일단 잔디 광장에서 쉬고 주변에서 사진도 찍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세 시간 동안의 트래킹 코스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가지고 있던 돗자리, 간식, 가방, 삼각대, 두꺼운 옷 등 필요 없는 것을 모두 차에 넣어 놓고 걷기에 딱 좋은 가벼운 옷차림을 출발해야 합니다. 등산하면서 아무도 넥타이 매고 하이힐 신고, 모든 짐을 들고 가지 않습니다. 트래킹이 아니라 만일 달리기를 한다면 아예 반바지와 런닝 셔츠만 입고 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신안생활하면서 벗어버릴 것은 무엇일까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무거운 것은 헬라어로 ὄγκος 즉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혹은 가치, 자만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박사과정에 들어갔더니 제가 최고령자였습니다. 제가 81학번인데 81년생과 같이 공부했습니다. 교수님의 저보다 젊어요. 그런데 박사과정 학생들 사이에는 선배가 필요 없습니다. 재산도 필요 없습니다. 잘 생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밤낮 책을 읽고 논문을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교회에 오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내려놓습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사회의 직책이 무엇인지, 재산이 얼마인지 다 내려놓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거운 것을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약점,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게으릅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 외에 각자의 약점이 있는데 그 약점을 본인보다 더 잘 아는 것은 바로 사탄입니다.
여러분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는 것을 힘들게 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사탄이 공격을 하면 반드시 그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넘어진다면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죄를 벗어 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시기 바랍니다.
억울한 채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정답은 “생명의 관을 받는다”입니다.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된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벗어버리고 달리면 됩니다. 이 세 가지 비결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모두 결승점을 통과합시다. 모두 천국에 도달해서 하나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옆 사람에게 진심으로 이렇게 인사합시다.
“천국에 가서 우리 꼭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