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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가수 이난영의 삶(1916~1965)
글을 시작하면서
이난영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수로서 대성공을 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유명세에 비해서 삶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인간 이난영의 모습을 중심으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가요사에 남긴 이난영의 업적과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이 글에서는 가능한 생략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1. 목포와 이난영 관련성.
우리가 왜 이난영을 추모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이난영과 목포와의 관련성을 되짚어보자. 목포를 ‘예향(藝鄕)’으로 내세우면서, 목포를 빛낸 예술인으로 흔히 서양화가 김환기, 한국화가 허건, 극장가 차범석, 소설가 박화성을 이야기한다. 모두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으로 등재되어있는데, 타지역보다 많은 예술원 회원을 를 배출했다는 점을 목포시민들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정작 목포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지금까지 목포를 대중들의 기억할 수 있게 만든 공로자는 유행가를 부른 대중가수 ‘이난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목포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먼저 이난영의 주요 약력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가수 이난영 주요연보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72번지 출생.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녹음.
1933년 10월 오케이레코드사 <향수(鄕愁)>, 11월 <불사조>취입 가수 데뷔.
1934년 2월 <봄맞이>로 인기를 얻기 시작 가수.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 한국인 대표 출연.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6년 7월 오까 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1937년 11월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937년 12월 <해조곡> 대히트 기록.
1939년 1월 문일석 작사, 이봉룡작곡, <목포의 추억> 발표.
1939년 남편 김해송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꿈>으로 전성기를 맞음.
1942년 오빠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8년 “목포의 눈물” 같은 제목의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관중.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1) 목포 양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다.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시(당시 목포부) 양동72번지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에 대해서는 ‘죽교동’이라는 논란이 있으나, 아버지의 호적과 이난영 자신의 초등학교 학적부 등을 확인한 결과 태어난 곳, 어릴 적 목포 거주지 모두 목포 양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는 이남순(李南順), 어머니는 (朴小兒)이고, 2살 연상으로 오빠 이봉용(李鳳用)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데, 이난영의 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직업이 철공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집안이 몹시 가난했고, 아버지의 술주정이 심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남순은 이난영이 가수의 길에 들어선 무렵인 1933년 8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이난영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폭압에 못 이겨 집을 나가 제주도로 떠난 것으로 구전되는데, 이봉용의 호적에는 1950년 11월 3일 목포시 양동72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사이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난영(蘭影)’이라는 이름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지은 예명이다.2) 본명은 ‘옥례(玉禮)’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호적과 학적부에는 ‘옥례’가 ‘옥순(玉順)’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호적에 올릴 당시 기록원이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과 동일한 글자를 자녀 이름으로 사용했을 리가 없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오빠인 이봉용의 호적에는 이름이 ‘옥례’로 수정되어 있다. 오빠인 이봉용 역시 연예계 활동당시에는 ‘이봉룡(李鳳龍)’이라는 한자를 사용했는데, 호적에는 쓰기 편한 용(用)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이난영’의 호적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이난영의 이름: 玉順(호적상 이름)-玉禮(본명)-蘭影(연예계 활동후 예명)
2) 목포 북교초등학교 입학과 자퇴, 그리고 가수가 되다.
이난영 현 북교 초등학교(당시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1923년에 입학했다. 당시 거주지는 양동126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1학년과 3학년 때 각각 재수(再修)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던 것 같다. 결국 4학년 때 자퇴원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자퇴사유에는 거주지 이전이라고 되어있는데, 이는 이난영이 제주도로 떠난 어머니를 찾아갔다는 근거가 될 것 같다. 원로 작곡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난영을 오빠인 이봉룡이 어머니가 있는 제주도로 보냈다고 한다. 자퇴원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퇴원서 제출자인 보호자란에 이름은 아버지인 이남순이라고 적혀있으나, 도장은 이봉룡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동의 없이 오빠가 동생의 장래를 위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이난영은 극장을 운영하는 어느 일본인 집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생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안 집주인이 당시 제주도로 순회공연을 온 극단에게 추천해서 막간가수로 출연을 하게 된 것이 첫 계기가 되었다. 이후 태양극단의 정식 멤버가 되어서 무대가수로서 출발하게 된다.3) 이후 이난영이 가수로 성공한 것은 오케이 레코드사의 이철 사장과의 만남 때문이다. 태양극단이 일본 대판으로 공연을 갔는데, 이때 이철 사장 역시 레코드 기획을 위해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정식으로 오케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가 되었다. 흔히 ‘목포의 눈물’ 데뷔를 한 것으로 알지만, 그 이전에 1933년 불사조가 히트를 했고, 1934년에는 ‘봄맞이’라는 곡이 있었다. 1935년에 ‘목포의 눈물’이 세 번째 히트곡인 셈이다.
3) 목포를 노래하다.
이난영은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에 관한 노래를 불러 유명해 졌다. 자신만 유명해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목포’를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목포의 눈물” 가사는 ‘문일석(文一石)’이라는 목포출신의 문인이 지은 것이다.4) 1934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향토찬가” 공모에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이 가사에 손목인의 작곡이 더해져서 “목포의 눈물”이 탄생하였다. 목포와 관련된 노래를 목포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짓고, 목포출신 가수가 노래를 불러서 더 큰 인기를 얻은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한국 대중가요사상 최고의 히트곡으로 등장했고, 7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변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대해서는 이전 연구사례(목포의 대중가요에서 나타난 생명력과 예술성, 1998년 목포예총 심포지엄)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으므로 본 고에서는 생략한다.
이난영이 목포를 노래한 또 다른 대표곡으로는 1942년에 발표한 “목포는 항구다”를 들 수 있다. 친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더 의미가 있다. ‘목포’라는 지명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지만 최전성기 때 히트곡인 ‘해조곡(1937년 발표)’ 역시 목포와 관련된 곡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외에도 목포를 염두에 두고 “항구, 바다” 등을 소재로 숱한 많은 곡을 발표하였다.
이외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39년에 발표된 “목포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목포의 추억(1939년 1월 오케레코드)5)
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편곡
이난영 노래
고하도 등대불이 깜빡이는 선창에서
목놓아 몸부림쳐 자즈러질 때
륜선(輪船)은 칼섬으로 돌아 나갔소
이것이 악착한 사랑의 판결이라 아-
그대로 순종하고 내 고향 땅을 버렸소
어차피 가서본들 별수 없는 고장이나
눈물의 타국에서 내 울 때마다
갑바우 뜨는 달이 뒤께 지면은
굴 캐는 아가씨 노래에 잠이 드는
남쪽의 저 하늘가 고향 목포에 가고파
“목포의 눈물” 외에는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다고 알려졌던 ‘문일석’의 가사로 되어 있는 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작곡자 또한 오빠인 ‘이봉룡’이다. 이 곡이야말로 목포사람이 작사, 작곡, 노래를 함께 한 진짜 목포의 노래인 것이다. 가사 중에는 우리 귀에 친숙한 ‘고하도’, ‘갓바위’ 등의 지명이 등장하며, 마지막 소절 “남쪽의 저 하늘가 고향 목포에 가고파”라는 이난영의 애잔한 목소리가 더욱 구슬프게 들려온다.
2. 이난영의 한 많은 일생.
1) 천재적인 음악가 ‘김해송’과 결혼하다.
이난영은 1937년 김해송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김해송의 본명은 김송규(金松奎)로 평안남도 개천(介川)에 출신으로, 동경상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이난영은 결혼과 동시 개천군 개천면 군우리(軍隅里) 156번지로 호적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송은 기타연주자 겸 작곡자였고, 직접 가수로도 활동했다. 지금의 뮤지컬의 개념을 국내에 처음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본인도 작곡자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졌다. 오케이레코드 이철 사장과 친분으로 이난영을 알게 되었고, 약 2년 정도 열애 끝에 1937년에 결혼을 했다. 1939년에는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을 이난영이 불러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 곡이 국내 최초 블루스 곡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난영은 1940년대부터는 단순히 노래하는 싱어로서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적인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는 뮤지컬을 중요시했던 남편 김해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의 주도로 ‘KPK 악극단’을 결성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쳤는데, 이난영 부부의 이러한 시도는 한국예술사에서 반드시 재조명 받아야 할 부분으로 여겨진다.
김해송과의 부부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화려한 재능과 수려한 외모를 갖춘 김해송에게는 항상 많은 여성들이 뒤따랐고, 그로 인해 이난영은 말못할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나마 6.25가 발발한 후 남편 김해송은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6) 남편인 김해송이 천재적인 음악가였는데 오늘날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점 때문이다. 자진 월북이 아닌 북에 의한 납북으로 알려졌지만, 김해송은 분단 후 남한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어려워 졌다. 후담이지만 ‘김시스터스’가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비자발급을 신청했을 때도 이러한 점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 이후 국내에서 타 작곡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곡들 가운데는 실제 작곡작가 김해송인 경우도 많을 것이라는 것이 가요계에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졸지에 과부가 된 이난영은 남편의 꿈을 잇기 위해 KPK악극단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으며 이후 한 많은 굴곡의 삶과 외로움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난영은 데뷔 6년째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의 예술가(연예인)들은 걸핏하면 결혼했다가 이별을 맞이하는데, 자신은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별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는데, 결국 6.25라는 민족동란이 이난영의 가족을 이별하게 만들었고, 이후 가족관계에서 만큼은 매우 불후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2) 이난영의 자녀들도 가수로 활동.
이난영과 김해송은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미국으로 건너가 ‘김시스터스’와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성공을 거둔다. 지금도 후손들이 LA에서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난영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지 않고 일찍부터 고국을 떠난 것이 이난영 사후 기념관 건립이나 각종 추모사업이 진척되지 않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1962년 이난영은 자식들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가서 한 1년 정도 생활을 하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국을 돌아왔다.
3) 남인수와 불행한 사랑에 빠지다.
이난영의 말년의 모습은 인간적인 면모에서 매우 불행하다. 한국전쟁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은 이난영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이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인 남인수였다. 지금은 남인수와 염문이 있었던 정도로 기억되고 있지만, 실제 같이 살았고 부부사이를 유지했다. 현존하는 한 공연 테잎에는 남인수를 남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도 사연이 많다. 원래 남편인 김해송에게 여자가 생겼었는데, 후배 연예인인 ‘김은하’라는 여자였다. 반대로 이난영이 남편을 잃고 나중에 남인수와 동거를 했는데, 남인수의 원래 부인이 바로 자신 남편의 여자였던 ‘김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지독한 악연을 갖게 되었다. 이난영은 불치병에 걸린 남인수를 지극 정성으로 돌봤는데, 정작 남인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이난영을 멀리하고 원 부인인 ‘김은하’에게 속죄를 했다고 한다.
두 집안의 악연은 자녀들에 의해서 끊겼다. 자녀들이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살게 되었으니 참 묘한 운명이다. 이난영이 원수처럼 생각하던 여자를 자신의 아들(장남 김영조)이 장모로 모시고 살게 된 셈이다.7) 이난영은 어느 남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불행하고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 노래말처럼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 것이다.
4) 이별의 눈물도 없이 세상을 떠나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난영은 1965년 4월 11일 새벽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5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에는 “이별을 서러워하는 눈물도 없이 홀로 누운 침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망 당시 음료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는데, 이난영의 시신 주변에는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후 이난영이 자살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술을 마신 것이 쇼크사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만큼 이난영 최후의 모습은 매우 불행했다.
장례는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 있는 자녀들은 장례식장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번 한국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비자 발급이 어려운 여건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이난영의 묘소를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어머니를 대하는 후손들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김시스터스’는 이난영 사후 5년이 지난 1970년에 귀국 공연을 한 후 비로소 묘소를 찾아갔다.
5) 경기도 파주에 묻히다.
현재 이난영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07에 자리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묘는 ‘무연고’로 관리자가 없는 것으로 그쪽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 등록되어 있다. 최근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후손들이 어느 관리인에게 약간의 품삯을 주고 묘소관리를 부탁했었는데, 관리인이 사망해서 연락이 되지 않아 지금처럼 방치되게 되었다고 한다. 이난영의 묘를 목포로 옮겨오자는 논의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아직도 원활하게 추진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6) 노래비가 세워지고, 소공원이 만들어다.
1969년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졌다. 대중가요 노래비로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목포시민(박오주)의 기금을 토대로 국민의 아픔을 노래한 “목포의 눈물”과 가수 이난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정면 상단부에 “목포의 눈물”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고, 하단부에는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하늘 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 심습니다. 이난영의 노래가 문일석 가사 손목인 작곡으로 여기 청호의 넋처럼 빛나고 있습니다.”라는 추모의 글귀가 적어져 있다. 그런데 당초에는 이 비문에 “손목인 작곡”이라는 글이 빠져 있었다. 1987년 5월에 목포를 방문한 작곡가 길옥윤이 이를 확인하고, 한국창작분과 위원회에 이 문제를 건의하자 신문지상에 보도되면서 작곡가 이름을 누락시킨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목포시에서는 이 아래비문을 떼어내고 똑같은 글씨체로 “손목인작곡”이라는 글귀를 적어 넣고 다시 만들어 붙여 놓았다.8)
그러한 한차례의 해프닝이 있었던 이 노래비가 30여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노래비에 적힌 가사를 두고 원본과 다르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노래비 가사의 수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 작사를 한 문일석이 1934년 조선일보향토노래가사 공모에 제출했던 원래 가사, 둘째 일제의 검열을 피해 부분적으로 가사가 수정되어 음반으로 처음발표 되었던 당시의 노래가사, 그리고 세째는 발표된 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국문표기상의 변화를 거쳐 현재 대중들에 현재 대중들에게 공식적으로 불려 지는 내용의 가사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달산에 세워져 있는 노래비 가사가 이러한 세가지 기준 어느 것에도 부합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표기법상의 차이가 생기는 부분을 제외하고도 의미적으로 다른 부분이 나타난다. 그래서 결국 목포시는 또다시 노래비의 전면에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다시 부착시켰다. 시민의 손으로 건립된 노래비의 원형이 손상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 것이다. 가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별도의 안내문을 인근에 세워놓으면 될 일이었는데, 원래 모습이 너무 어수선하게 변한 듯 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노래비가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지 28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지난 2003년 목포시 양동 이난영의 생가터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초 생가를 복원하여 공원화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좁은 장소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이난영의 흉상을 세운 소공원으로 변경 조성되었다. 작지만 생가터에 이난영의 공원이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임에도, 목포시에서는 이를 외부에 전혀 홍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포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는 안내원들 조차도 이난영 소공원이 목포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7) 이난영과 일제강점기 군국가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가수들을 추모하는 사업이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친일가요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밀양시의 경우 작곡자 박시춘의 이름을 따서 2002부터 “박시춘 가요제” 가요제를 진행해 왔으나 지역 시민 단체들이 그의 친일행위를 문제삼아 가요제 개최 재고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자 명칭을 “밀양아리랑 가요제”로 바꿔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난영에 대한 추모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인기 있는 대중가수는 이른바 군국 가요를 누구나 불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이난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세 곡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 “신춘엽서”라는 곡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1942년 1월 신보로 발매된 곡으로 작사는 조명암(趙鳴岩), 작곡은 김해송(金海松)이 했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곡이고, 봄을 맞아 소식을 전하는 엽서라는 제목만 보아서는 군국가요의 흔적이 전혀 없다. 다만 일본군이 되어 전선으로 간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이라는 점에서 군국가요로 간주된다. 이난영이 혼자 취입한 것으로 확인되는 군국가요는 현재 이 “신춘엽서”가 유일하다. 이난영의 다른 군국가요로는 1943년에 오케레코드에서 남인수(南仁樹)와 함께 불러 발표한 “이천오백만 감격”(조명암 작사․김해송 작편곡)이 있으며, 1942년에 김정구(金貞九)와 함께 불러 발표한 “아세아의 합창”(박시춘 작곡)도 가사를 알 수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제목으로 보아 역시 군국가요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이다.9)
군국가요에서는 “이천오백만 감격”이라는 곡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대중적으로 알려졌으며, 3절의 경우 일본어로 되어 있다. 다만 이 한 곡만을 가지고 이난영의 친일성을 평가할 수는 없으며, 일본의 패망직전 사회적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가요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부분은 전문가의 견해를 요충해서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난영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노래를 통해 온 국민을 위로하고, 목포라는 도시를 전국민에게 알리는 공을 세웠다. 요즘 각 지자체에서 역사적 인물들을 활용하여 자기 고장 알리기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알고 기억한다는 것은 지자체 발전에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다. 목포의 경우, 어떤 인물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난영’만 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현재 북한 동포들도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를 알고 있을 정도니까, 과거의 흘러간 인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존재하는 이난영의 문화적 상징성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시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고, 글의 전거도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 점 양해를 바란다. 추후 재정리를 통해 지면으로 발표할 기회가 갖도록 노력하겠다. 끝으로 이난영이 가수로 데뷔한 6년째인 1939년 어느 잡지사에서 했던 인터뷰의 첫머리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나의 고향은 남쪽 목포항입니다. 어디던지 그렇지마는 항구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노래를 무척 즐겨하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망망한 대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로운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석양이 어물어물 떨어지는 서쪽하늘을 우르러 희망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비단결 같은 푸른 물결은 나의 노래를 실고 하느적 하느적 이 항구에서 저항구, 저항구에서 또다른 항구, 이렇게 전세계의 항구란 항구에는 모조리 들려서 나의 노래를 전해 준답니다. 아니 전해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지요”
1) 목포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신안문화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음. 한국지방사 연구 전공.
2) ‘난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것이 태양극단의 박승희 단장이라는 설과 후에 가수로 성공시민 OK레코드 이철 사장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황으로 봐서는 태양극단 시절에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3) 일설에는 ‘삼천리가극단’이라고도 하는데, 이난영 자신의 인터뷰 기록(1939년)에 태양극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4) 원래 제목이 “목포의 노래”였던 것을 음반을 취입하면서 “목포의 눈물”로 변경했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다.
5) ‘권두영’님이 발췌한 가사임.
6) 과거 그의 악단에 있던 한 사람이 미군 캠프 순회공연을 한 사실을 인민군에게 고발했기 때문이라는 구전이 있다. 김해송 자신은 이북 출신이고 재학시절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있어서 별탈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피난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1946년에는 우익 진영의 인물로 결성된 대중음악협회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박찬호, 『한국가요사』289쪽, 현암사, 1992).
7) 월간 예향 1984년 11호, 윤재걸 글 참조.
8) 이생연 증언.
9) 2003년 11월 17일 이준희의 글, “일본군이 되어 전선으로 간 남편에게 보내는 엽서” 참조.
http://cafe.daum.net/KBS88/NbNY/66?q=%EA%B0%80%EC%88%98%EC%9D%B4%EB%82%9C%EC%98%81%EA%B0%80%EC%A1%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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