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79) 신종 2
- 권력의 분점에는 항상 분쟁이 따르기 마련.
욕심이 욕심을 부른다는 말이야 말로 동서고금에 두루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형과 함께 거사를 성공시켜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고, 왕으로부터 “수성제난공신(輸誠濟亂功臣)·삼한정광중대부(三韓正匡中大夫)·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위위경지도성사(衛尉卿知都省事)·주국(柱國)이라는 길고도 긴 벼슬의 주인이 된 최충수지만,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더 큰 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합니다.
애초 태자는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을 처로 맞아들였는데, 태자위에 오르자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왕에게 강청을 하니 왕은 몹시 불쾌해 했습니다. 최충수가 부러 내인(內人)더러, “주상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내시지 않았는가?” 하고 떠보자 내인이 그 말을 왕에게 알렸고 왕도 어쩔 수 없이 태자비를 내보내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나게 된 태자비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오열하자 왕후(王后)도 눈물을 흘렸고, 궁중의 모든 사람이 다 울었다 합니다.
태자비가 마침내 평민의 옷차림으로 궁궐 밖으로 나가자 최충수는 곧바로 혼례날을 정하고 장인(匠人)들을 불러 모아 혼례에 쓸 물품들을 요란스레 준비합니다. 최충헌이 그 소문을 듣자 술을 준비해 최충수의 집으로 가서 말없이 함께 마시다가 술이 취하자, “들리는 소문에 자네가 동궁에 딸을 들이려 한다던데 정말 그러한가?” 하고 묻자, 최충수가 그러하다고 하자 최충헌이 그를 타일렀습니다.
“지금 우리 형제의 권세가 한 나라를 휘어잡고 있으나 가계가 본래 한미(寒微)하니 만약 딸을 동궁의 배필로 삼는다면 비난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물며 부부의 사이는 은혜와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법인데 태자가 비와 여러 해 동안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사람의 인정상 어떻겠는가? 옛말에,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 수레가 그것을 보고 경계로 삼는다고 했는데 과거 이의방(李義方)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가 결국 남의 손에 죽었네. 지금 그 패망한 전철을 밟는 것이 옳은 일인가?”
최충수가 천정을 쳐다보며 크게 한숨을 쉬다가 한참 뒤에, “형님의 말씀이 옳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며 결국 없던 일로 하고 장인들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서, “대장부가 일을 행하려면 스스로 단안을 내려야 한다.”고 호언하고는, 다시 장인들을 불러 모아 예전처럼 혼수 물품을 만들라고 다그쳤습니다.
그 모친이, “네가 형의 말을 따르기에 내가 정말 기뻤는데 왜 다시 이런 짓을 벌이는가?” 하고 말리자, 최충수가 버럭 성을 내며 아낙네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손으로 밀쳐 땅에 쓰러뜨려버렸습니다.
최충헌이 이 소식을 듣더니,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어머니를 이처럼 욕을 보였으니, 하물며 나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 말로는 도저히 설득시킬 수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 나의 수하들을 시켜 광화문(廣化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가 조카딸을 궁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했습니다.
최충수의 간자가 최충헌의 말을 그대로 최충수에게 알리자, 최충수도 자기 수하들에게, “누구도 내가 행동하는 것을 두고 감히 왈가왈부 못하는데, 형이 유독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자신의 수하가 많음을 믿기 때문이다.
내일 새벽에 내가 그 일당들을 소탕할 것이니 너희들도 힘을 합해라.”고 지시합니다.
고려왕조실록(80) 신종 3
- 형제의 충돌.
동생 충수가 다음날 새벽에 자신의 수하들을 치러 온다는 말이 최충헌에게 들어가자 최충헌은 수하인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을 불러 경위를 설명하니, 최충헌의 외종질인 박진재가 “공의 형제는 두 분 다 제 외삼촌이니 누구를 가까이 하고 누구를 멀리하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바로 이 일에 달렸으니, 동생을 도와서 역적이 되는 것보다는 형을 도와 순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하는 법이라고 했으니 저는 당연히 김약진, 노석숭 등과 함께 각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돕겠습니다.”하고 최충헌의 편에 서겠다고 하자 최충헌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자정 무렵에 최충헌이 군사 천 여 명을 거느리고 고달고개를 넘어 광화문(廣化門)까지 와서 왕에게 반란사실을 고하자, 왕이 크게 놀라서 즉시 성문을 열게 하여 이들을 맞아들이고는 구정(毬庭)에 진을 치게 하는 한편 무기고의 병장기를 내어 금군(禁軍)에게 나누어주고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 위(衛)의 장군들도 군사를 거느리고 앞을 다투어 궁궐에 도착하니, 최충수가 이 소식을 듣자 겁을 집어먹고 수하들에게, “동생이 형을 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난 짓이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구정으로 들어가서 형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도망하여 숨도록 하라.”고 수하들에게 해산을 명합니다.
그러나 장군 오숙비(吳淑庇), 준존심(俊存深), 박정부(朴挺夫) 등이, “저희들이 공의 문객이 된 것은 공께서 세상을 덮을만한 기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도리어 이처럼 겁을 내어 나약해지니, 이는 저희들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한번 싸워서 승패를 결정짓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나섰습니다.
한참을 고심하고 망설인 끝에 최충수가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하자, 여명에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십자가(十字街)에 진을 치고는, “죽을힘을 다해 싸워라. 저 놈들을 죽인 사람에게는 죽은 자가 가졌던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장수들이 모두 최충헌 편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충수 편의 군사들은 원군이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충헌은 광화문을 나와 시가지를 향해 내려오고, 최충수는 광화문을 향해 올라오다가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서로 부딪쳐 교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충헌의 화살부대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최충수의 반란군은 마침내 참패하고 도망치고 맙니다.
최충수는, “오늘의 패배는 하늘의 뜻이다. 형이 임진강 이북을 차지한다면 나는 임진강 이남을 가지겠다.”고 하면서 수하들과 함께 성문을 벗어나 장단(長湍 : 개성직할시 장풍군)을 건너, 파평현(坡平縣 : 경기도 파주시)의 금강사(金剛寺)까지 도망을 하지만 추격군이 그를 잡아 참수한 후 머리를 개경으로 보냈습니다.
동생의 수급을 본 최충헌이 통곡하면서 “나는 생포하려 했는데 무엇이 급하다고 죽여 버렸는가?” 하고 꾸짖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왕이 최충헌의 공을 기려 해당 관청에 분부해 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붙이게 하고 그 부모의 작호를 올려 주었으며, 지주사(知奏事)·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시켜 줍니다. 친동생을 죽인 대가로 또 출세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