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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결단하라
2016. 11. 6(주일낮예배) 사도행전 24:24-26
진화론의 창시자 챨스 다윈은 그의 책 종의 기원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종은 힘센 종들이 아니었다. 지능이 높은 종들도 아니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었다고 하였다. 다윈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마데이라 섬의 딱정벌레 이야기를 한다. 마데이라 섬 부근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래서 날개가 길고 튼튼한 딱정벌레는 돌풍때문에 바다에 떨어져 죽는다. 그런데 날지 못하는 딱정벌레는 섬에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날개가 진보한 딱정벌레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한 딱정벌레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챨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챨스 다윈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에 적응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진화론자의 말은 오늘날 산업계에서 많이 인용된다. 왜냐하면 산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핸드폰 카메라가 200만화소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당시 카메라 화소가 200만화소인데 이제 일반카메라만큼의 화질이 나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이어 500만화소의 카메라가 개발되었을 때 200만화소의 카메라를 개발한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곧이어 500만화소 카메라를 발명한 회사도 문을 닫았다. 왜냐하면 1200만화소의 카메라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듀얼카메라가 개발되어서 1200만화 카메라를 개발한 회사도 문을 닫아야 할 시점이 되었다. 고화소 모듈이 피사체의 초점을 잡고, 또 다른 저화소 모듈이 주변 배경을 촬영하여서 사진을 훨씬 선명하게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듀얼카메라를 설치하면 핸드폰의 두께도 훨씬 얇아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2016년에 16,400대의 핸드폰에 적용된 듀얼카메라는 2017년에 38,000대에 적용되고, 2018년은 43,000대의 핸드폰에 적용될 것이다고 한다. 이렇게 현대 산업은 끊임없는 변화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생활은 변화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사도행전 25장을 보면 유대에 12대 베스도총독이 부임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 2240Km였다. 그러므로 베스도 총독은 최소한 10일 이상을 지중해를 건너는 범선을 타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먼 여행을 한 베스도총독은 하루를 쉬고 다음날 104Km가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대제사장과 유대의 높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대제사장과 유대의 높은 사람들이 베스도총독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겠는가?
(행 25:2-3)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베스도가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왔다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은 유다백성을 위한 제안을 해야 한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바울을 죽일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이 처음이 아니다. 11대 총독 벨릭스는 베스도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벨릭스는 바울을 만났을 때 바울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에게 돈을 얻고자 하였지만, 바울이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감옥에 가두어 둔 인물이다. 이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는 버리고 자기 야망과 욕심이 가득찼던 벨릭스가 총독에 있었을 때에도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높은 사람들은 그때도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고소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대제사장과 유대의 높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울을 죽이기 위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높은 사람들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가? 지난 목요일 새벽기도 시간에 드린 말씀인데, 다시 한번 더 들으시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게 되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 보인 것은 애굽의 병사와 병거가 물어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가 보였을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죽은 시체였고, 그 너머에는 고생과 수고가 가득했던 애굽땅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면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고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와 감격의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과 감격으로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서 자신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눈에 광야가 펼쳐져 있지만, 그 광야 생활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그들은 믿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과 감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편안한가? 에 달려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고, 또 그 말씀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와 감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이다고 하는 것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조금 열심이 있으면 교회 봉사하는 그 정도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있는가? 저는 지난 주에 세계로병원 이은성목사님의 간증을 들었다. 목사님이 7살 때 어머니를 따라 점집에 갔었다. 그때 점쟁이가 어머니에게 8살이 되기 전에 애비를 잡아먹을 것이고, 10살이 되면 애미를 잡아먹을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하의 고아가 될 것이니 당신 부부가 죽어도 저 아이가 비참하게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7살의 어린 아이였지만, 목사님은 그때 무당이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은성목사님 아버지가 8살 때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이은성목사님은 고등학교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13년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고 인사를 했는데, 어머니가 인사를 받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학교에서 집으로 와서 초인종을 누리고, 어머니의 인기척이 나기까지 고작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 제일 두려웠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오면서 엄마가 쓰러지셨다고 말하면 어떻게하지? 하는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벨을 눌려놓고 은성이 왔니?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이은성목사님을 더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이 바로 벽제화장장옆이었다. 지금은 목사님이 살던 집이 예은추모관으로 바뀌었는데, 그 당시에는 벽제화장장 정문에 바로 붙어 있는 집이었다. 그러므로 매일 보는 것이 사람의 곡하는 소리였고, 또 영구차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식당을 했기 때문에 목사님의 집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상복을 입고, 밥을 먹으면서 모두 죽은 사람이 고생만하다가 갔다는 말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목사님은 사람은 고생만하다 죽는거구나! 하는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자살하려고 결심을 하였다. 약국에서 약을 사서 목요일에 죽기로 결심하였는데, 자살하려고 작정한 그 주간 주일에 목사님께서 학생회 헌신예배에 은성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4일 후에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고 약을 모으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기도를 시킨 것이다. 그래서 집에 와서 기도를 해야 하나? 또 대표기도한 후에 자살을 해도 되나? 하는 복잡한 생각으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가슴 속에서 기쁨이 샘 솟듯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옛날 교회에서 부르던 찬양 중에 내게 강같은 평화가 있다. 그 찬송 중에 내게 샘솟는 기쁨이 있다. 딱 그 가사처럼 속에서 기쁨이 펑펑펑 솟아 오르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그리고 뛰어서 교회로 갔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가슴과 배를 바닥에 대었다. 그때 은성아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 하나님이 따뜻하게 목사님의 마음 속에 이렇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은성아 이 녀석아 예수를 믿는 것은 너처럼 두려움에 떨고, 죽음에 눌려 사는 것이 아니야. 네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하고 감격하며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야!
그 순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걱정, 또 목사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37년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한 번도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서 이은성목사님은 부흥회 첫시간은 그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주제로 설교한다.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감사와 감격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감사와 감격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 내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 기쁨과 감격에 또 빠지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은 은혜를 체험하며 사는 성도가 없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벨릭스는 바울이 전하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의 강론을 듣고 두려워 떨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나와야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아 성도와 함께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리로 나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벨릭스는 두려워 떠는 가운데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하면서 결단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왜 벨릭스는 바울에게 설교를 듣고도 미루었겠는가? 6년동안 유대를 통치했던 안토니오 벨릭스는 노예출신이었다. 그런데 벨릭스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자유의 신분이 되었고, 황실 왕자의 친구였던 팔라스의 도움으로 유다의 총독이 되었다. 그랬던 벨릭스는 6년동안 유대를 다스릴 때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벨릭스는 2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절세미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인 드루실라를 보았을 때 드루실라를 자기의 3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드루실라는 이미 결혼하여 에바사왕의 아내였는데, 벨릭스는 자신의 권력으로 드루실라를 빼앗은 것이다. 이러한 벨릭스에 대하여 당시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국왕의 정치권을 행사한 자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노예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돈에 혈안이 되어져 있던 벨릭스는 결국 파직되어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악착같이 모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남부 휴양도시에 별장을 짓고, 예쁜 아내 드루실라와 그의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아마 벨릭스는 휴양의 도시에서 예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여유를 즐길 때에 내가 이렇게 살기 위하여 노예정신으로 살았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에 살던 2천명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아우성 속에서 죽어갈 때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와 그의 아들도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노예정신으로 모은 그 돈 때문에 결국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얻은 아내와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벨릭스가 의와 절제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바울의 강론을 듣고 돌이켰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벨릭스는 돌이키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26절에 기록하고 있다. 같이 읽어보기 바란다.
(행 24: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성도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고, 또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때로는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에 위로받고, 또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벨릭스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 그는 바울의 강론을 듣고 내가 틈이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고 말한 이유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벨릭스는 결국 돈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고, 또 그 돈 때문에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벨릭스의 더 큰 문제는 돈과 야망을 위한 삶에 익숙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4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한가지는 시위를 떠나간 화살이고, 두 번째는 입으로 뱉은 말이고, 세 번째는 지나간 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기나간 기회이다. 그런데 벨릭스는 바울을 통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있는가? 한 산부인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자연분만을 하지 못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산모가 있었다. 오랜 시간 자연분만을 하기 위하여 고생을 하였는데, 이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리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의사선생님이 마취를 하기 위하여 숨호흡을 하세요 하고 말했다. 그런데 산모가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의사의 말을 듣고 호흡을 하지 않고, 심호흡 심호흡하면서 말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이 산모와 같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때로는 감동하고, 그것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다. 그런데 내 욕심과 또 늘 그렇게 살아왔다는 익숙함 때문에 결단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삶에는 결코 변화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삶에 변화를 가지려면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손해를 보더라도 용감하게 결단할 때 우리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결단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내가 손해보고 힘들어도 순종하겠습니다는 자세로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서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사형수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있었다. 처음에 사형수를 만나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고, 또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도자의 눈에 눈물은 말라버렸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렀을 때 이제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선생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이 보장되어져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이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 날도 그랬다. 전도자는 사형수에게 습관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기도를 하려는 데, 사형수가 갑자기 정말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내 죄가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리고 그 사형수는 전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유리밭길을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전하겠습니다.
복음은 능력이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복음의 능력을 익숙함이다는 이름으로 다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와 감격할 수 있는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말씀의 성취를 보면서 감사하고,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