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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대담
낸시 프레이저⋅바스카 순카라
“포퓰리즘이라는 숨은 선택지는 세상에 드러났다”
●이 대담은 2018년 2월 8일에 진행된 것이다. 바스카 순카라Bhaskar Sunkara는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Jacobin》의 발행인이다.
바스카 순카라 먼저 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을 쓰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확실히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아주 많은 독자에게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개념으로 보입니다. 이 개념은 주로 학계나 다른 곳에서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경향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요?
낸시 프레이저 저는 실은 오랫동안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향해 더듬거리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발상을 가리킬 이름을 떠올리기 한참 전부터도, 저는 특히 미국에서 좌파와 중도좌파가 어떻게 잘못된 길로 갔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다른 용어들을 사용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더 넓게는 학계의 광범위한 정치 영역까지 포함해서요. 예컨대 1990년대에 저는 ‘인정에 대한 분배의 잠식the eclipse of redistribution by recognition’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이 표현은 정체성identity과 지위status,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진보 세력의 사유와 실천에서의 불균형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점, 새로운 형태의 금권정치를 고취시키지는 얺더라도 그것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뒤이어 2007년과 2008년의 금융위기 직후에 저는 ‘역사의 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문구는 2세대 페미니즘 내지 그 주류 분파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고취하는 세력들과의 ‘위험한 동맹’에 돌입하게 되었는가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 또한 같은 방향을 향한 다른 제스처였습니다. 그다음에는 2016년 선거의 엄청난 스펙터클이 있었습니다. 트럼프가 부상했고, 샌더스의 놀라운 성공이 있었으며, 그 모든 것 위에 힐러리 클린턴의 전략이 있었습니다. 저는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 수십 년간 신사회운동과 진보 세력들이 둔 패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진보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 블록 또는 지배 동맹을 구성하기 위해 협력했다는 요점과, 그들의 결합을 가리키기 위한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불현 듯 다가온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전체적 세계관이 아니라는 발상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세계관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진보적인 인정 프로젝트들까지 포함하는 서로 다른, 심지어 서로 경쟁하는 인정 프로젝트들과 조응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경제 프로젝트입니다. 이 요점을 이해하고 나니, 최소한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진보주의와 가장 튼튼하게 조응해왔다는 것이 보이더군요. 그러한 조응에 이름을 붙인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서 큰 진전처럼 느껴졌습니다.
바스카 순카라 많은 이들이 1960~1970년대에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보다 급진적인 구호들을 지지해왔지만, 이제는 보다 실용적인 노선을 따라 일정한 목표를 성취하고자 새로운 정치 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사회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성차별주의에 의해 명백하게 분열된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더 평등한 노동이 자리 잡았다. 심지어 가사노동에서도 그렇다. 또 이 사회에서 최악의 성차별주의와 성적 학대에 대한 관용도는 이전보다 낮아졌다”라고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변화가 중도좌파 페미니즘이 이룬 정치적 성취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으로 성취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승리에 (선생님과 저 모두 강하게 비판하는) 중도좌파 세력의 공헌이 어느 정도 있다고 인정해야 할까요?
낸시 프레이저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페미니즘이 이룬 성취들은 현실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을 실제로 바꿀 수 있는 구조와 제도, 실천을 마련하기보다는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미국인 가운데 선량한 3분의 2 정도는 젠더 풀평등이 잘못된 일이며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들은 지인에 의한 강간과 데이트 강간이 잘못된 일이며, 남성들이 가사노동과 양육 등에서 더 많은 부담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념의 차원에서 모두 중요한 변화들입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이러한 평등 지향적 합의들을 제도화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특히 가사노동 분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저 스스로가 점점 더 쇠약해지시는 아흔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고, 제 친구들 중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봤을 때 최전선에서 필요할 때마다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건 언제나 딸들과 자매들입니다. 아들들과 형제들이 나서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나 변화했는가에 대해 과장하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몇몇 남성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특히 그 일의 유쾌하고 즐거운 부분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성들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요강을 비우고, 양로원에 계신 부모들을 돌보는 등의 괴로운 일에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반인종주의 운동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민권운동은 몇몇 주요한 법적인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쟁취한 것은 조문상의 권리rights on paper이고, 이 조문상의 권리는 실질적인 사회적 평등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무언가로 전이되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유색인들은 형사사법체계와 고용, 주거, 홍수와 식수 오염 등의 문제에서 여전히 엄청난(실로 증가하는) 비대칭과 직면하고 있습니다. 진보파들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절대다수에게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그리 실질적인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민권운동의 법적인 승리가 노동권과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거대한 공격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그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전문경영인 계급의 상층부에 혜택을 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계층이지요. 그 계층에 속한 여성들 그리고 유색인들은, 같은 계층에 속한 백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꽤 혜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그 외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혜택에 대해서는 그리 감명 받지 못했습니다.
바스카 순카라 뉴욕 주지사 쿠오모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추진하면서, 바로 같은 주週에 성소수자 청년들을 위한 쉼터만 골라서 폐쇄해버린 사례는 현재의 운동과 관련해 많은 것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세계의 정치적 풍경에 대해, 제가 《자코뱅》에서 그랬듯이, 헤게모니의 위기를 겪는 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람시의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문장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체계가 가진 안정성을 강조하는 비평가들에게는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계속 모습을 바꾸면서 위기들, 심지어 2008년의 공황처럼 치명적으로 보이던 위기들까지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디서 혹은 왜 헤게모니의 위기를 발견하셨습니까? 특히 선생님께서는 트럼프와 오바마,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경제적 의제들 간에 일정한 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시기도 했습니다.
낸시 프레이저 아주 중요하고 복잡한 질문을 던지셨네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첫 번째 요점은 헤게모니의 개념과 관련된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헤게모니는 하나의 주어진 세계관이 가진 정치적·도덕적·문화적·지적 권위, 그리고 사회 세력들과 사회 계급들 간의 튼튼하고 강력한 동맹을 통해 스스로를 체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지난 수십 년간 그러한 의미에서의 헤게모니를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권위가 완전히 박살 나지는 않았다고 해도 심각하게 약화되었죠.
전 세계에 퍼진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폭발을 고려해봅시다. 우리는 대체로 영국에서의 브렉시트 투표나, 북유럽과 중동부 유럽,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인종주의적 반이민자 정당들의 부상 같은 우익 포퓰리즘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물론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익 포퓰리즘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좌익 반신자유주의 세력들, 그러니까 영국 노동당을 좀 더 왼쪽으로 이동시킨 코빈Jeremy Corbyn열풍, 장뤼크 멜랑숑Jean-Luc Mélenchon의 불복하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그리스의 초기 시리자Syriza,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의 유세를 중심으로 뭉쳤던 세력들을 포함하는 세력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례들은 우파가 됐건 좌파가 됐건, 인민들이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서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민들은 중도좌파나 중도우파의 지원을 받는 기성 정당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어 합니다.
바로 이것이 헤게모니의 위기입니다. 물론 반헤게모니 세력들이 권력을 잡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트럼프는 미끼 상술의 가장 명백한 사례입니다. 그는 유세 때 약속한 반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들을 위기 중에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또 수사적으로 추악하고 배제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비유들을 계속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2016년 당시 이와 함께 공약한 경제적 포퓰리즘은 사라졌고, 그것은 우익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표준문안(부자들의 세금 삭감 등등)으로 대체됐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여전히 모든 곳에서 맹위를 떨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태가 팽팽하게 긴장을 이루며 뒤섞이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그람시의 말이 아주 적절한 이유입니다. 첫 번째 사태는 신자유주의 권위의 극적인 약화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발상들과 정책들, 그 기저를 이루는 제도적 질서에 대한 신뢰는 감소했습니다. 두 번째 사태는 정치적 차원에서든 제도적 차원에서든 적어도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서의 무능력입니다. 이 두 사태의 조합에는 폭발력이 있습니다.
바스카 순카라 신자유주의 정책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신 게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원은 (밀턴 프리드먼이나 정책의 지적 정당화를 추구한 시카고 학파 같은 게 아니라) 아마도 그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자본가들이 이윤율의 감소를 목격했던 데 있지 않았을까요? 자본가들은 구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적은 규제가 필요하다. 더 적은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윤 창출의 방해물을 없애고 싶다”라고 말했을 겁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시장의 우선적 필요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보다 더 복잡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낸시 프레이저 아주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러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몇몇 전개 과정의 만남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물론 하이에크적 발상들의 엄청난 부흥이 있었죠. 모두가 하이에크의 사상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영원히 처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무덤에서 돌아와 여러 진지한 지식 운동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이에크의 부활은 1940년대에 설립된 몽펠레린 학회와 좀 더 최근인 1970년대 이후에 설립된 다수의 물질적으로 풍족한 싱크탱크들이 벌인 상당히 조직화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곧 이데올로그들은 그저 이윤을 더 올리길 원하는 수많은 기업의 실용적인 CEO들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기업의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공의 평가 기준이 주가수익률에서 주주 가치로 바뀌면서, 경영진의 핵심 임무는 주식시장에서 기업 주식의 가치를 올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몇 가지 다른 종류의 변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적 차원의 변화들이 있고, 자본주의 경제의 통행 규칙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있습니다. 모든 변화는 절대다수의 삶의 수준을 위협했습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액면가 그대로는 정치적 인기를 모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진보주의자들’이 개입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 성소수자 인권의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흐름들을 끌어들이면서 제한 없는 자유시장과 금권주의자들을 포장해줄 이데올로기적 장식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많은 진보주의자는 경제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의 ‘해방’에 대한 능력 주의적, 유리천장 깨기 식 관점에는 자유시장의 집단 정서와 선택적 친화력이 있었습니다. 진보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 모두 사태를 개인주의적인 극복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선택적 친화력입니다.
그러다 현재로 돌아와서 보자면, 오늘날 하나의 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는 매우 약해졌습니다. 물론 공공연한 프리드먼주의자와 하이에크주의자도 남아 있긴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생각 깊은 우익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보수적이고 친노동계급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가에 대해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저는 다시 한번 미국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뉴욕타임스》의 로스 다우섯Ross Douthat이라든가 《아메리칸 어페어스American Affairs》의 편집자 줄리어스 크레인Julius Krein 같은 인물을 떠올립니다. 이들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발상들을 내놓으면서 추종자들을 얻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화당의 선출직 공무원들도 사회의 인프라가 붕괴되는 중이며 재정적자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닐뿐더러 정부가 해야 할 다른 임무도 많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참된 신봉자는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비록 다른 대안들이 없을 때 월 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 자본가계급의 다른 분파들은 금융 규제에 맞서서, 높은 법인세에 맞서서, 그리고 상여금을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서 필사적으로 싸우겠지만요.
바스카 순카라 저는 선생님의 글에서, 샌더스와 트럼프 각각의 지지 기반이 미디어에서 종종 관념화된 버전으로 그려진다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가령 트럼프의 지지 기반은 모두 블루칼라에 안전모를 쓴 백인 노동자들이고, 샌더스의 지지 기반은 그와는 다르다는 식이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진짜 위협적인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데서 조금 벗어나긴 합니다만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식의 공화주의가 부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수가 되기 위해서 많은 갈인이나 흑인 노동자들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저하게 낮은 40퍼센트의 지지 기반을 가지고도 흑인 투표에서 10퍼센트 정도 혹은 라틴계 투표에서 10퍼센트 정도만 더 얻으면 실제 다수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무서운 점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엄청난 적자재정을 위한 계획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인프라 건설을 하겠다는 식의 멋진 계획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낸시 프레이저 정확한 지적입니다.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유세에서 배넌의 구상이 가진 천재성을 보여줬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의 구상, 즉 친노동계급적 구상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 구상이 진정성이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냉소적 계책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중요한 사실은 배넌주의가 친기독교적 종족 민족주의와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아주 낡아 빠진, 한정적이고 배제적인 노동계급의 구상을 투사했다는 점입니다.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 노동계급에는 백인 남성 공장 노동자, 광부, 석유 시추 노동자, 건설 노동자 같은 사람들만이 속하는 거지요. 배넌주의의 구상은 앵글로-마초적 집단 정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노동계급은 종족이나 인종, 젠더나 섹슈얼리티 등등의 관점에서 아주 다양합니다. 공적 부문의 노동자, 농부, 가정 내 노동자, 성노동자, 소매점 노동자, 자원봉사 분야와 개인 주택에서 유급 또는 무급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만 포함시켜도 노동계급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그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제게 친노동계급 포퓰리즘은 적어도 두 가지 다른 가능한 형태가 있음을 시사해주었습니다. 한편에는 배넌의 포퓰리즘, 즉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당히 현실적인 포퓰리즘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샌더스가 최선을 다해서 환기했던 포퓰리즘, 즉 왼쪽에 있는 우리가 앞으로 구축해나가야 할 포퓰리즘이 있습니다.
바스카 순카라 미디어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보들은 모름지기 노동계급과 흑인들의 표를 얻어야 한다”고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계급’이라는 말은 특정한 시기, 즉 오직 선거가 돌아오는 4년이나 2년 주기로 유권자 블록으로서 유용해지는 백인들을 가리키는 완곡 어구로 보입니다. 반면에 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를 생각할 때,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는 중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는 노동조합과 국가 관리자, 자본의 분파들이 함께 건설한 시대로 이해합니다.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나 빌 클린턴의 신민주당 혹은 그 외 모든 진보적 신자유주의 세력이 자신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도까지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십니까? 나름대로 애쓰며 살아가는 이민자였던 제 부모님께서 미국에 갓 들어왔을 때 빌 클린턴의 연설을 들으셨다면, 아마 좋은 의미에서 그분들에게 익숙한 제3세계 포퓰리스트가 하는 연설 같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제 생각에 이 정치인들이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자신들이 하는 말들을 믿었고, 자신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축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낸시 프레이저 이 질문도 역시 복잡하군요. 뉴딜이 고도로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의도를 가진 프로젝트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자유방임국가가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점과 지속적 이윤율의 튼튼한 체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경제의 관계에서 주요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한 자본가계급의 계몽된 분파들도 이 프로젝트에 관여했지요. 이 자본가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호전적인 노동운동(노동조합,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동맹(매우 강력해서 심지어 헤게모니적이기까지 한 동맹)을 맺는 전례 없는 길을 갔습니다. 뉴딜을 지배하는 정신은 국가적⋅케인스적 사회민주주의national-Keynesian social democracy였습니다. 이 정신은 엄청난 수의 이민자를 사회로 병합할 것이었습니다. 이민자들을 중산계급의 삶을 살며 교외에 검소한 집을 꾸리고, 그들이 만든 자동차를 모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미국인’으로 만듦으로써 말이죠. 뉴딜의 주된 구성원은 산업노동조합들과 선견지명을 가진 지식인들, 그리고 결국 ‘계급 타협’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는 주요 제조기업들, 나아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민자, 도시 중산계급이었습니다. 이는 다 합쳐 보면 매우 강력한 헤게모니 블록이었습니다. ‘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뉴딜 블록은 1960년대와 1970년대부터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해체되었습니다. 뉴딜 블록은 왼쪽으로부터는 전 지구적 인기를 누리는 신좌파로부터, 오른쪽으로부터는 기업과 계층과 자유시장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닉슨의 선거와 레이건의 선거가 분수령이었습니다. 닉슨의 ‘납부 전략southern strategy’은 공화당이 ‘백인족white ethnic’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순카라 선생님이 방금 언급했던 바로 그 교외 노동계급 계층에 성공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일종의 견본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위험에 맞서 민주당은 보수 측의 전략을 패퇴시키고 선거 정치에서 우위를 회복할 수 있는 성공적인 공식을 찾고자 분투했습니다. 구세주는 빌 클린턴이었습니다(저는 그가 인생에서 진심으로 믿은 것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정신분석학자가 필요할 텐데,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은 제조업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민주당의 전통적 기반을 탈중심화하면서, 교육 수준이 높은 도시 전문직과 ‘상징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신민주당’을 만들자는 착상을 하게 됩니다. 이 발상은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블레어는 영국 보수주의의 강력한 영향력을 저지하고자 하는 유사한 목표를 갖고 있었죠. 블레어와 클린턴 같은 정치인은 어떻게 자신의 정당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적실성을 유지하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찾아내고자 했던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헤게모니적 정치구성체를 발명했습니다. 즉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뉴딜형 사회민주주의의 뒤를 이을 프로젝트가 됩니다.
또한 그들을 호소력 있게 만들어준 세대 차원의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빌 클린턴과 앨 고어가 젊음을 앞세워 같이 유세를 다니던 때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들은 1960년대 세대에 속했고, 미국 정치의 정상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세대 전환을 대표했습니다. 빌 클린턴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있을까요? 베트남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 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클린턴과 블레어의 젊음에는 상당히 강력하고 카리스마 있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페르소나는 신선하고 다른 무언가를 뿜어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포퓰리즘이라고 부르진 않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들이 진보주의라는 말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순카라 선생님의 부모님들께서 감명을 받았던 건 클린턴의 저 유명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에서였을 겁니다.
바스카 순카라 미국 역사에서 엄청난 순간 중 하나는 클린턴이 그 활동가에게 고개를 돌리고 “당신의 고통을 느낍니다. 당신의 투쟁에 공감합니다”라고 말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죠.
낸시 프레이저 맞습니다. 빌 클린턴의 기회주의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는 주식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누구에게 이 문제를 물어봐야 할지는 알았습니다. 그는 시장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린턴이 신자유주의 경제에 무슨 신념을 갖고 헌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이 다른 누구보다 월 스트리트의 안녕에 의존한다는 것을 직갑했습니다.
어쨌든 결과는 새로운 헤게모니 동맹이었습니다. 뉴딜 블록은 진보적 신자유주의 블록에 의해 대체되었습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발상들의 집합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 세력들의 집합을 기반으로 구축되었습니다.
바스카 순카라 저는 민주당 지지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종종 간과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나쁜 일자리를 갖고 있어도 그게 무직보다는 낫다고 인식합니다. 가령 노동자들을 위한 전체 파이가 작아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같은 흑인이나 갈인들은 적어도 이 전보다 상대적으로 큰 조각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혹은 8년에서 10년 전쯤에 들어서서야 사람들은 민주당의 지지부진함에 진력이 난 걸로 보이고,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낸시 프레이저 언제 사람들이 한계점에 도달하는지 말하기란 매우 힘듭니다.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수온이 천천히 올라가니까 개구리는 바로 냄비 밖으로 뛰쳐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언가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래서 삶의 수준은 지속적으로 하락했지만, 이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대처하기 위한 모든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예컨대 노동조합들은 급여 삭감에 동의하고, 활동의 초점을 기존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 맞추었으며, 새로운 노동자들이 좋지 않은 조건으로 고용되는 걸 묵인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틀을 깰 용기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정확히 언제 그리고 왜 한계점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하고 이성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별 인물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가령 도널드 트럼프는 단절을 준비하는 세력 일부를 위한 피뢰침이자 유인자, 확산자로 작동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힐러리 클린턴은 연속성과 현상태status quo를 전형화한 인물이었습니다. 클린턴의 샌님 같은 이미지, 우익 미디어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서사, 그리고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확신 같은 것 말이죠. 어떤 이들은 조 바이든이나 버니 샌더스가 후보였다면 선거를 이길 수 있었으리라 예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계점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개별 인물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죠.
바스카 순카라 차라리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후보로 나갔어도 그 선거는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다른 질문을 하나 드리려 합니다. 선생님과 저의 기술적 전문 영역을 넘어서는 질문이 될 텐데요.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트럼프의 반동적 포퓰리즘과는 대조를 이루는) 샌더스의 진보적 포퓰리즘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과거의 무언가를 다시 갖고 올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예컨대 예전의 안정성이나 안전망, 재분배의 약속 같은 것들 말이죠.
선생님의 글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구절을 보면, 트럼프가 약속을 잘 지키지는 않았어도 포퓰리즘이라는 숨은 선택지를 이미 세상에 드러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아니 경고라기보다는 일종의 위안이겠네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만약에 구조적 역관계나 정치적 반대 때문에 우리 진보 진영에서도 똑같이 약속을 못 지키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바마 스타일의 정치보다 그게 더 나쁜 결과를 낳지 않을지요?
낸시 프레이저 그 점이 정말로 걱정거리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스의 시리자만 봐도 그렇습니다. 왜 결국 시리자가 무너졌고 유로존을 떠나지 못했는가는 복잡한 질문입니다. 저는 어느 한쪽으로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시리자의 경우는 분명 위대한 승리처럼 보이던 것이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버린 사례입니다.
우리가 언급한 현존하는 좌익-포퓰리스트들 모두에게는, 그들이 직접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쓰건 쓰지 않건, 약간의 시대착오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특히 샌더스와 코빈이 그렇죠. 그들은 옛날의 좌익이나 사회민주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들은 이민 문제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실행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본능적 직감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사회안전망과 양질의 일자리, 완전고용, 좋은 사회복지와 가족 지원 등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경제적⋅사회적 재구조화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1940년대의 제조업을 되살릴 수 없는 현재 미국의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오늘날에 이르러 더 시급하고 중요해진 이 이상들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아직 고안되지 않은 어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이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니면 탈자본주의 사회가 유일한 해결책일지, 그러한 탈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친노동계급적이면서도 세계화된 정치경제를 구성하기 위해 어떠한 새로운 통행 규칙들이 필요한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국경에 따라 구획된 국민 경제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국민 경제는 보호주의와 군사화, 국가 간 전쟁과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스카 순카라 우리에게는 도덕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청사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핵심은 그러한 청사진이 좀 더 구체화되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아무리 작은 정책적 승리라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여러 글에서 (좋은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노동계급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나 정당, 그리고 노동계급 정치가 표현되는 다른 방식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하시지 않는 걸로 보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운동을 좀 더 광범위하게 보고 계신 것인가요? 아니면 운동의 다른 측면들을 보고 계신 것인가요? 아니면 이도 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인가요?
낸시 프레이저 아니요. 저는 사실 좌파들이 사회운동에만 외골수로 초점을 두고 노동조합이나 정당 그리고 노동계급 조직의 다른 형태들을 간과하는 상상적 경향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좌파는 적어도 두 지점에서 위기입니다. 우리에게는 프로그램화된 청사진도 없고 조직화의 전망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레닌주의적 정당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네오아나키스트적 자발주의로 직행해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네오아나키스트적 자발주의가 진지하게 다루어질 만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두 극단 사이에 있는 광대한 중간지대를 탐사하는 데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의 잠재력과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서비스 노동자, 패스트푸드 노동자, 가정 내 노동자, 농부, 공적 부문 노동자 등등을 조직화하는 프로젝트(기존의 노동조합들을 옹호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프로젝트)에는 판 전체를 바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파 페미니스트들에게 매우 핵심적이면서 더 까다로운 질문은,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의 관계입니다. 이 사안에 대해서 신뢰를 줄 만한 정치적 입장과 이를 추진할 설득력 있는 조직화 전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낡고 시대착오적인 관점으로 회귀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만약 좌파가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에서의 지도 세력으로서 노동계급이라는 발상을 부활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방식, 말하자면 상호 교차적으로 계급을 생각해내야 합니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 다수 인종, 제조업과 광업 노동자들에 제한되지 않고, 유급과 무급, 다른 모든 직업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이민자와 여성, 유색인종까지 아우를 수 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다시 상상할 수 있다면, 노동계급을 청년들과 다수 중산계급, 신자유주의자들로부터 갈라설 수 있는 일부 전문경영인 계급을 아우르는 블록에서 지도 세력이 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계급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블록은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이 될 잠재력을 가진 강력한 동맹이 될 겁니다. 제가 볼 때, 이 블록을 건설하는 데는 정당과 사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복원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된 노동조합)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5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