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1편은 총 5권으로 된 시편의 1권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시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역시 공동체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시편 1편에서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을 떠나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지키는 자라고 했는데, 오늘 시편도 복에 대해서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시편 1권의 시작과 끝이 복이라는 주제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어떤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까?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이라고합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말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없고 병들고 약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들을 돕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는 2절을 보시면 재앙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건져준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시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도록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3절에 보시면 그가 아플 때에도 하나님께서 병상에서 그를 붙들어 주시고, 그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4절부터 말씀을 보시면 사실은 그 가난한 사람이 바로 다윗 자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가난한 사람을 도왔던 자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서 바르게 살고, 또 가난하고, 궁핍하고, 약한 자를 보살펴 준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입니다. 보살피는 것은 재정으로 도움을 주는것 이상을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다가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자신이 아프게되었습니다. 죄를 짓는 것과 몸이 아픈 것이 늘 1대1 대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의 시인인 다윗이 스스로를 볼 때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는징계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청하면서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청하고, 회개하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겸손하게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다윗의 원수가 그에게 대해서 악담을 합니다. 언제 다윗이 죽을까? 빨리 죽어야 할텐데.. 분명히 이번에는 이 병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을꺼야, 그렇게 될 거야라고 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이 없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지운다, 이름이 없어진다는 말은 주로 자식이 없이 죽을 때, 자신의 대를 이어서 자기의 가문을 이를 사람이 없어서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쓰는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도 잘 못되어서 아무도 시인의 가문을 이를 수 없게 되면 좋겠다는 아주 나쁜 저주이고 모독스러운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을 보러 와서는 거짓으로 위로를 합니다. 마음에는 안 그러면서 말만 그렇게 합니다. 마음에는 시인이 죽었으면 좋겠지만 말은 얼른 나아라고 말하고 시인에게 얻은 이러저러한 말을 모아서 나쁘게 사람들에게 퍼뜨립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나가서 시인에 대해서 수군거리고 시인에게 해를 입히려고 계획을 합니다. 병에서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고자 하는사람들입니다.
이어서 9절을 보시면 이렇게 생각하는 있는 사람이 원수 뿐만 아닙니다. 자기와 함께 동거 동락하던 가까운 친구, 함께 밥을 먹던 친구가 이제 자신이 병들었을 때 자기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듭니다. 여기서 발꿈치를 들었다고 하는 것은 짐승이 서로 싸울 때 아르렁 대면서 공격하려고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건강했을 때에, 시인이 잘나갈 때,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친구는 그 권력에 빌붙어서 친구인 척 하면서 옆에 있지만, 시인이 아프고 병들고 권력을 잃어갈 때 친구는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넘기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자기를 긍휼히 여기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건강을 되 찾을 때 시인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돌려 줄것입니다. 징계를 하시지만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시인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시인은 값싼 은혜의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뭐 대충 회개하면 하나님께 용서해 주시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상한 심령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한 가운데 붙으시고 주님앞에서 버리지 않으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시인을 공격하고 가난하고 곤고한 자를 돕지 않은 자신의 원수들과 친구들은 복을 얻지 못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회복을 얻은 자는 하나님께영광을 돌리고 찬송의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오늘 시편과 시편 1권은 마무리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인도자를 따라 부르던 공동체의 노래로 사용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 백성들은 그들이 모여 있을 때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말은 시인과 같이 고통 가운데 있는 공동체의 지체를 돌보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노래 했다는 것입니다. 신의가 없이 서로에게 가식과 외형적인 모습, 혹은 말만 위로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참으로 공동체의 지체 가운데 또 우리의 삶의 주변에 약한 자를 돌아보며 사랑으로 서로 관심을 가지는 공동체가 되도록 권면하는노래로 불렀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가 된 것을 봅니다. 특히 9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자신에게서 성취가 되었다고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복된 자로서 늘 가난한 자, 궁핍한, 어려움을 겪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심지어 죄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동거 동락하던 제자들에게 모두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건강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받으면서 다닐 때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다가 나중에 잡히실 때 모두 도망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 3장 18절에서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시면 예수님은 친구가 자신을 행해서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을 인용하십니다. 주님은 시인과 같이 죄에 대한 벌로 아픈 것이 아니지만,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를 지시게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천국 백성으로서 삶을 살도록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 입니다. 바로 오늘 시편의 시인과 같이 약한 자들을 보살피며 긍휼히여기며 죄인들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이 세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교회는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죄인들이 모여 서로 용납하고 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겉치레와 허레 허식이 가득한 세상적 관계를 넘어서 참으로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공동체에 속해서 우리를 위해서 배신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예수님 때문에 서로의 짐을 지고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는 그런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라고 하십니다. 서로가 약할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아플 때 위로해 주며,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더욱 더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공동체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로 흘러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서로 같은 처지에 있고, 같은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한 믿음과 한 분주님을 모시는 한 교회이기 한 지체이기 때문에 더욱 더 깊은 관심과 진정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신실함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로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