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우리가 다시 만난 지 얼마나 되지?” / “글쎄.”
“기십 년이 좋이 될 걸세.” / “그리 길어? 이따금 상면하지 않았나. 노상에서 스치기도 하고.”
“그게 한동네에서 함께 살게 된 것과 같은가. 앞으로는 줄곧 이웃으로 지낼 건데.” / “그러네.”
“해서 말인데, 나 자네가 당산으로 이사 온 걸 안 날부터 솔직히 심사가 편치 않아.” / “건 또 왜?”
“몰라서 묻나?” / “무얼 말인가?”
㉠“시침 떼기는.”
“시침 떼다니. 이 사람이…… 마른 날에 벼락 맞기도 유분수지 나 때문에 마음이 안 좋다니. 덮어놓고 윽박지르면 단가. 이러자고 불러냈나.”
말꼬리를 모나게 비트는 정 선생도 언뜻 짚이는 데가 있는 눈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그게 아닐세. 내 구변이 서툴러 이런가 보네. 다름 아닌 자네 형님 사건, 바로 그 건을 꺼낸다는 것이 초장부터 꼬였구먼.”
“하항. 그거…….”
㉡“내 힘든 기분 이제사 알겠는가?”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잖나. 언제 적 얘기라고.”
그걸 가지고 이 친구는 내내 속앓이를 했는가. 멀리 귀양 보냈다가 나를 보자마자 새삼스럽게 가위눌렸던가.
{A} <<전쟁 전야였다. 좌우익으로 갈린 고향 청년들끼리 후딱 하면 몽둥이 쌈질을 벌이던 무렵이다. 김 선생네는 중학교 뒷문께에 살았는데 그날 밤 심한 설사병에 시달리던 중 일짜리 김 소년이 우연히 목격했다. 두세 차례나 밀어내었는데도 여전히 묵지근한 아랫배를 쓸며 뒷간을 들락거리다가 학교 안 공기가 어쩐지 수상하다고 느꼈다. 대충 일을 마치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엉성한 측백나무 울타리를 뚫고 불빛이 새 나오는 숙직실 쪽으로 가만가만 다가가 안을 기웃거렸다. 몇몇 선생님을 포함한 대여섯 청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폭 넓은 두루마리에 붓글씨를 쓰고 등사판을 미는 등 어수선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마침 아버지와 함께 대작하고 있던 작은아버지에게 자랑 삼아 일러바쳤다. 농지 개혁 이후 지가 증권으로 살림을 꾸려 가던 두 분은 나쁜 놈들! 하면서 즉각 경찰에 알렸고 경찰은 곧 숙직실을 덮쳤다. 그 속에 정 선생의 형이 끼었던 거다.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으나 소용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숙직이었는 데다 나흘 후엔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서 어찌어찌 목숨을 건진 것만도 요행이었다. 하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이미 결딴난 몸으로 피난 터를 옮겨 다니다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병사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했듯이, 설사병만 아니었어도, 측간에만 안 갔어도 따위 부질없는 후회에 앞서 제보자에 대한 소문이 미구에 퍼졌다.>>
“내 원망 많이 했을 거네.” / “사람들의 작은 몸뚱어리에 웬 비밀이 그리 많을꼬.”
정 선생은 딴전을 피웠다. 어안이 벙벙하여 대꾸조차 못한 김 선생의 눈이 깜빡깜빡 진의를 묻는다.
“안 그래?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얼마나 많은가.”
“그야…….” / “혼자 끼고 살다가 무덤까지 갖고 가면 다행이지만 말이네.”
㉢“그 비밀이란 게 대개는 실수에서 비롯된 부끄러움과 관련돼 있지.”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죽이고 싶을 거야.”
“?”
김 선생의 눈이 드디어 휘둥그레졌다. 입에 가벼운 경련이 인 듯하다.
“나 지금 농담을 하고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말게.”
“표정은 정색인데 입으로만 농담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
“그래? 내 얼굴이 정색한 얼굴이라고?”
“말장난 그만두게. 내 진담에 대답할 차례야.”
“그 전에 내 말 더 듣게.”
㉣“계속 힘들게 만드는구먼.”
“누구는 힘 안 드는 줄 아나. 나에겐 말일세, 세월과 더불어 차차 지워지기는커녕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수치심이랄까 회한이 몇 가지 있네. 아냐 그것들이 새끼를 치는 바람에 생긴 소소한 것들까지 합치면 수도 없다구. 불시에 엄습하여 잠을 설치기 일쑤라네. 그러라고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냐. 사서 지랄하는 거지. 자네도 알잖나.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조해서 삼류 대학이나마 들어간 것. 뿐인가. 나는 자기 살림도 말이 아닌 친구 하나가 가족 몰래 빌려준 돈까지 떼어먹었다네. 그가 일찍 죽었거든. 당연히 유가족을 찾아 저간의 사정을 고백하고 돈을 갚았으면 좀 좋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주 기회를 놓치고 인생 제대 말년에 이중 삼중의 뉘우침을 겹겹이 안고 살아.”
“그러기로 들면 누군들 마음이 편할까.”
“속이 편하고 불편하고를 떠나 연만한 자는 내남없이 그만한 자충수와 싸우는 것 같애.”
“지나치게 소극적인 네거티브 발상이야. 이룬 업적은 어쩌고. 크건 작건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기를 써 가족 먹여 살리고 자식 기르는 일이 어딘데. 얼마나 벅차고 보람 있는 사업인데.”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건 그런 상식이 아니잖아.”
“내 말이 바로 그것 아닌가. 사람 폭폭하게 왜 딴청을 부리나.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가까스로 터뜨린 말인걸.”
“화해를 청하는 마당인가.”
“화해든 적대든…… 끝내고 싶어. 이왕이면 좋은 것이 좋겠지만 아니란들 별수 있나. 이 나이에 변명은 구질구질해. 오직 분명히 해 두고 싶을 따름이야. 자네가 눈에 띄지 않을 때는 나 역시 그렁저렁 잊고 살았네. 한데 사단의 한 당사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그 질곡이 다시 나를 묶는 거야. 서울에서 만났다면 또 몰라. 좁은 하늘 아래서 매일같이 호흡한다는 사실이, 말을 바꾸면 거리감의 단축이 빚는…….”
“잠깐.”
정 선생이 느닷없이 김 선생의 입을 막았다.
“왜 그러나?” / “그만해 두게.”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인가?” / “이대로 그냥 지내세.”
“무슨 뜻이야?”
“꼭 언질을 받아 내고 악수로 약속을 굳히지 말자고. 나는 형님이 아니니까. 강화 사절 대표로 위임장을 갖고 나온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느낀다네. 모든 걸 털고 해결하고 세상을 뜬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고 사치스럽다고. 아니 주제넘어. 죽는 날까지 사람인 것이 사람의 노릇인데 완전 종결이 어딨어. 가당찮은 허영이지.”
“알 듯 모를 듯한 말이로구먼.”
“나도 내 마음을 몰라 헤맬 때가 많아. 긴장이 풀리면 건강에도 해롭다는 생각을 그다음에 한다네.”
정 선생은 그걸 노년의 르상티망*과 관련시켜 설명하려다 만다.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고 가는 격인가.”
“떼었다 붙였다…… 하다가 가는 거지. 인생은 고해라고 했거늘 너무 깨끗한 얼굴로 가 봐. 염라대왕한테 혼나기 쉽지. 네 이놈! 너는 낙해에서만 놀다 왔구나. 이러면 어떡해.”
- 최일남, 「아주 느린 시간」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
1. [A]의 서사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인물 간 대화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여 사건 전개에 속도감을 부여하고 있다.
② 인물이 과거에 한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서술하여 사건의 맥락을 드러내고 있다.
③ 상징성을 띤 공간을 묘사하여 등장인물들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④ 인물의 심리가 변화하는 양상을 묘사하여 내적 갈등이 해소되는 계기를 보여 주고 있다.
⑤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어 이념적 차이가 두 중심 인물 간의 갈등이 지속되어 온 원인임을 드러내고 있다.
2.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상대방이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② ㉡: 상대방의 재촉으로 인해 화제를 털어놓는 데 따르는 부담감을 표현하고 있다.
③ ㉢: 직전에 상대방이 말한 내용과 자신의 개인적 경험 간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④ ㉣: 자신의 말에 대해 기대한 반응을 상대방으로부터 얻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⑤ ㉤: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끊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짐작하여 말하고 있다.
3. <보기>를 참고하여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은 노년기에 접어들면, 윤리성을 갖춘 인간이라는 자의식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와 공동체적 유대감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살아온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작중 인물이 상대방에게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고백하여 털어 내고자 하는 행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고백을 듣는 인물은 시혜적인 자세로 상대의 참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이 지닌 삶의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면서 노년이 삶의 종착점이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노년 역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기라는 실존적 인식을 드러낸다.
① ‘한동네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은 김 선생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털어 내기 위해 정 선생과 만나기로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겠군.
② ‘자네 형님 사건’에 대해 느끼는 부끄러움을 정 선생에게 고백하는 김 선생의 행위는 윤리적 인간으로서의 자의식과 상대방과의 유대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
③ ‘이중 삼중의 뉘우침’은 정 선생이 김 선생에게 고백한 과오들로 인해 노년기에 지니고 살아가는 감정을 나타낸 것이겠군.
④ ‘벅차고 보람 있는 사업’은 김 선생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며 정 선생과 대화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겠군.
⑤ 혹을 ‘떼었다 붙였다’ 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정 선생의 말에서, 노년 시기가 책임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드러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