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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시간이 흐르고 그동안 회사일로 바쁘게 지내던 영우는 잠시 묻어두고 있던 훈이오빠가 궁금해졌다. 그사이 소식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진선미 음악
다방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훈이오빠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훈이오빠가 진행하던 시간에 종규오빠가 진행하고 있었다. 영우의 모습을 본 종규오빠가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DJ박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혜철오빠를 만날 수 있었고, 처음 보는 남자들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영우의 등장에 남자들은 들뜬 기분이다. 영우의 앳된 얼굴에 빛나는 피부는 처음 보는 남자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종규오빠와 혜철오빠가 반갑게 맞아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는 걸로 인사를 나눴다.
야! 야! 야! 주목, 지금부터 내 여동생을 소개하겠다. 내 동생 영우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일찍이 전 세계 미인 선발전에 나간 적이 없고,,,
종규야 똑바로 소개해, 너 원래 여동생이 없잖아 그리고 미인 대회1등 한 여자보다 훨씬 예쁘신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우가 살짝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남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영우는
훈이오빠 소식을 기대하고 여기 왔다. 그런데 훈이오빠 소식은 듣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들 환영을 받고 있다니 이게 무슨 어이없는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영우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반갑게 맞아주는 남자들이 원망스럽고 한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영우는 훈이오빠도 없는 이 자리에 혼자 있는 게 난처하고 어색했다. 그렇다고 어찌해볼 다른 도리도 없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조금은 익숙해져
있다고나 할까, 예전에 병휘 오빠의 군인 친구들과의 만남에서도 환대를 받으며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고 직장에서도 남자 직원들의 환심을 한 몸에 받고
다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의 인기를 인정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어색하거나 민망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어느덧 음악다방의 영업시간은 끝나고 2차로 종규의 자취방에서 뭉치기로 하고 일부는 술과 안주를 사러 가게로 향하고 종규와 혜철 그리고 영우는 종규의 집으로 향했다.
예전에 훈이오빠와 함께 자취를 하던 종규오빠는 훈이오빠가 떠난 후 다른 곳으로 자취방을 옮겼다. 이곳은 예전에 훈이오빠가 살던 방보다 넓고 쾌적했다. 단지 감성을 자극할만한 아늑함이라던가 아기자기한 맛은 없어 보였다. (훈이오빠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영우혼자만의 느낌일까?)
늦은 밤거리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디제이 남자들과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종규의 자취방에 모였다. 여자 두 명을 비롯해서 종규 혜철 광준 동국 준이아빠 이렇게 청춘이 일곱 명이나 들어서니 아주 좁은 방은 아니라도 앉아있기 불편할 정도로 좁아 보였다. 거기다 제법 가구들을 갖춰놔서 공간이 줄어들었고 무릎이 맞닿아 다리를 피기도 어려울 정도가 돼버렸다.
광준 동국은 지난번 훈이오빠네 집에서 봤었기 때문에 낯이 익은데, 자신을 준이 아빠라고 소개하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별명이 준이아빠일 뿐, 실상은 여자와는 손도 잡아본 적 없는 쑥맥이라고 한다. 동료들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이 세상 여자들이 전부 자기거라고 허풍을 떤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정윤희도 달려온다나 어쩐다나,,, 영우의 눈에는 외모도 별로인데,,,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어느 누가 흉을 보고 타박을 해도 웃어넘기는 여유가 있는 거다. 어떨 땐 친구들이 자신의 외모로 불량감자라며 놀리고 장난을 치면 자신은 탄 감자라고 장단을 맞춰주기도 한다. 오늘 처음 보는 여자는 영우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 누구의 애인은 아니고 여기 모인 남자들하고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디제이 지방생이라고 했다. 성격이 활달해서 어색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게임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스치듯
훈이오빠 생각이 났고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걸 애써 감추려 유머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방안 분위기만 썰렁 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영우에게 남을 웃기는 재주는 없어 보였다. 영우가 밖으로 나왔다. 영우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종규가 뒤따라 나왔다.
“영우 씨 훈이 생각 하는구나”
“아니야 그냥 딴 생각했어”
“훈이 생각은 지워, 훈이 많이 아파서 시골에서 요양 중인데 오래 살기 힘들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집안에 문제가 생겨서 시골 간 거라며,,, 도대체 어디가 많이 아프다는 거야”
순간 또 한번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기분이다.
“그건 훈이가 그렇게 얘기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말한 거고 사실은 달라. 그리고
훈이가 앓고 있는 병이 급성백혈병이라고 하나 봐,,,”
“백혈병? 그건 못 고치는 병이잖아,,,”
“그렀대나 봐,,”,
“그럼 훈이오빠네 집은 어딘지 알고 있어?”
“아무도 몰라 여기 있는 친구들 대부분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집주소를 알고 지내는 친구들이 한 명도 없어”
영우는 집이라도 알면 찾아가 보려는 생각에 물었지만 실망스런 대답만 들어야
했다.
“그럼 전화는”
“시골에 전화 있는 집이 얼마나 되겠니, 훈이가 다방으로 전화해주지 않으면 연락할 길이 없어”
“그럼 어떡해?”
담배를 꺼내든 종규가 한 모금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걱정스런 표정의 영우에게
어렵사리 훈이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훈이한테서 전화가 한
번 왔었다는 소식도 영우에게 전했다. 종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영우를 힘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훈이에 관해서 알고 있는 세세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훈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게 태어났는데, 언제부터인가 쉽게 지치고 숨이 차서 다방일도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모두들 별거 아니라고 생각 했지. 누가 이렇게 큰 병이 걸린 줄을 상상이나 했겠느냐며, 아무도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치료를 했었어야 했는데,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병세가 악화되어 조용한 곳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다. 친구들도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심각한 병 인 줄은 몰랐다는 거였다. 훈이의 부탁은 이런 자세한 사연을 영우에게는 하지 말아 달라는 거였고, 훈이의 마지막
부탁은 영우를 사랑했었다고 전해 달라는 거였다.
“오늘은 훈이 얘기는 않하려고 했어, 영우 씨에게 즐거운 시간만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영우 씨에게 미안하게 됐구나”
집으로 돌아온 영우는 하루종일 훈이오빠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돌이켜 생각하면 영우의 마음에 훈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병휘오빠와의 이별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빈 가슴을 채워주는 보조적 만남 정도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훈이오빠가 많이 아프고 다시는 못 볼지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되니까 연민의 정이 생기고 많이 사랑했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됬다.
영우는 홀로 병마와 싸우고 있을 훈이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냐.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에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훈이오빠에게 혹시?’ 그러나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새벽 새 울음 소리에 대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는 밤새 내린 하얀 눈이 온 세상을 소복이 덮어 주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눈이 내렸지?’
‘소리도 없이 와서 많이도 쌓였네, 훈이오빠도 소리 없이 내 앞에 나타나 줄까?’
영우가 앞산을 향해 “훈이오빠” 하고 불러보지만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고 새벽 새 소리만 들린다. 평소 듣던 새 소리가 오늘따라 애절하게 들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훈이오빠 혈색이 조금은 창백했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은 언제나 우수에 젖은 느낌을 받았었다.
월미도에서 영우에게 건네준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테이프가 훈이의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것을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그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종규와 만나고 며칠 지난 후 미스김 언니한테 훈이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아! 그랬었구나’ 어쩌면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네 ‘
충격이 너무 큰 탓일까.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가만 생각해 보니 훈이오빠는 언제나 슬픈 노래만 불렀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늘 슬픈 이별 노래만
불렀구나. 진작 알았으면 따뜻한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 주었을 텐데,,, 아쉬움과 속상함이 영우의 온몸을 비틀었다.
영우가 마음속 편지를 쓴다.
사랑했어요 훈이오빠!
내 가슴속에 외로움만 남겨둔 채 정말 내 곁을 떠나는 건가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는 말 믿을 수 없어요. 나를 정말 사랑했었다고 한마디 없이 이대로 가버리면 나는 정말 어찌하라고,,,
편히 쉬어요, 오빠! 그곳에서도 기타치고 노래 부를 거지? 내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불러줘요, 오빠노래 부르는 모습 오래도록 기억할 거예요 오빠와의 추억
내게는 멋진 날 들이었어. 멀리 떠나는 당신의 길에 황금빛 영혼으로 다리를 놓아 드리고 싶어요. 짧지만 잔잔했던 우리들의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영우가 또 한 번 마음을 굳게 다잡고 자신에게 말을 한다.
‘좋은 추억이었어,,, 이것도 인생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가슴에 새겨 넣고
눈물과 그리움을 이겨내야지 그리고 잊기로 하자’
어쩌면 영우에게 이토록 슬픈 이별도, 오늘 중요한 것이 내일은 거의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한동안 훈이오빠의 기억을 지우려고 일부러 바쁘게 일을 하기도 하고 집에서는
취미로 자수 놓기에 집중하며 바늘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써봤다. 그럴수록 훈이오빠의 가련한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도 어디선가 슬픈 노랫소리만 들리면 훈이오빠 생각에 눈물이 난다. ‘어째서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보다 이별노래를 부르며 슬픈 표정 짓던 영상이 먼저 떠오르는 거지?’
미스김 언니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라 미용실로 찾아갔다. 마음이 공허해졌을 때는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새 옷도 사 입고 그러면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 거라는,,,
정말 그랬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 시작해도 되겠다는 활기가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다.
‘역시 경험자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어,,,’
오늘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에 생명수가 듬뿍 내렸다. 고드름 주렁주렁 매달린 처마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방울방울 마당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희미한 마루 등불아래 앉아있는 영우에게 빗소리는 신비하게도 마음을 맑게 해 주고 있었다. 뒷산 소나무 숲에 산 안개가 잔잔하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새벽이 밝았다.
회사동료들은 하루일과를 마치면 의례 부평의 거리로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럴 때마다 영우의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동료들의 권유를 거부하기엔 이유가 빈약 했다. 하지만 진선미 음악다방은 왠지 가고 싶지 않았다. 음악다방은 거기 말고도 많이 있으니까,,,
무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주고 채워주기에 이 거리가 안성맞춤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녀들은 회사에서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기도 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고 지나간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에 이곳만한 곳도 없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특별히 새로운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반가운 얼굴을 만나는 곳은 더욱 아니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술 마시고 수다 떨고 춤추고 음악 듣는 것이 전부인데, 그 시간만큼은 퇴근 후의 자유와 해방감을 채워줘서 좋고, 연애 사랑 결혼 따위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다. 단지 영우는 집이 멀어서 여기서 놀다 집에 가면 언제나 늦은 밤에야 도착
하는데, 그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밤늦은 귀가가 반복되다 보니 버스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동네 어귀에서 야방아저씨들하고 마주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처음에는 다 큰 처녀가 밤늦게 돌아다닌다고 핀잔도 주고 하더니 며칠 전 부터는
아예 영우를 집에까지 바래다주신다. 그럴 때마다 아저씨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밤에 혼자 걷는 길은 언제나 무서웠는데, 야방아저씨들이 보호를
해주셔서 안심하고 집에까지 올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다고 안심할 단계가 아직은 아니다. 식구들 모두가 잠든 야밤, 대문 여는 소리에 누구라도 깰까 봐 숨소리도 죽인 채, 도둑고양이 마냥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서 자기 방에 몸을 의탁해야 귀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우는 이제 대문을 어떻게 밀고 닫아야 소리가 안 나는지 터득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귀가 시간을 속일 수도 있게 됐다. 이렇게 고난의 귀가 시간을 겪으면서도 영우는 퇴근 후 곧장 집으로 오는 날 보다 부평의 거리에서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오는
날이 많았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퇴근 후 부평의
거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집으로 오면 혼자 있는 저녁 시간에 지난 인연들이 떠올라 그게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