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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의 길
2019. 10. 27(행복나눔축제) 누가복음 15:31-32
좋은소식, 나쁜소식, 황당한소식이라는 유머가 있다.
좋은소식: 남편이 대표이사로 승진했다는 소식
나쁜소식: 대표이사의 비서가 너무 예쁘다 소식
황당한소식: 남편이 그 비서와 단 둘이 해외출장을 간다는 소식
좋은소식: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소식.
나쁜소식: 옆집 아이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소식
황당한소식: 교장선생님께서 전교생에게 다 상을 주었다는 소식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고, 황당한 소식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소식을 제일 듣고 싶어하는가? 옆의 분을 축복했으면 좋겠다. 인사/ 좋은 소식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좋은 소식을 들읍시다.
로마 신화를 보면 로마사람들이 이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근심이 강을 건너려다 아주 좋은 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근심은 그 흙으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 쥬피터에게 가지고 가서 영혼을 넣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쥬피터가 그 작품에 영혼을 불어넣어서 정말 멋진 작품이 되었다. 그 후 근심은 그 작품에 자기의 이름을 붙이려 할 때에 쥬피터가 내가 영혼을 불어 넣었으니 내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땅도 내가 좋은 흙을 주었으니 그 작품에는 나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근심과 쥬피터와 땅이 서로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고 싸우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턴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턴신과 의논했을 때 새턴신은 이렇게 말한다.
쥬피터는 영혼을 주었으니 이것이 죽은 후에 영혼을 가지고 가시오. 땅은 재료를 주었으니 이것이 죽으면 그 몸을 가지고 가시고, 근심은 이것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소유로 하시오. 그리고 문제가 되는 이 작품은 흙인 휴무스로 만들었으니 휴먼이라고 부르시오.
이것이 로마사람이 생각한 사람이다. 로마사람들이 생각한 사람은 한평생 근심하며 살다가 죽어서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쥬피터에게로 가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의 존재가 아닌가? 열왕기하 10:14-25을 보면 통일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왕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은 나라를 다스릴 때 상아의자에 금칠을 해서 그 위에 앉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순금을 쳐서 방패를 만들어 솔로몬이 움직이면 병사들이 그 방패를 들고 의전해 주었고, 또 솔로몬이 사용하는 모든 그릇은 순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의 부귀를 끝내지 않는다. 솔로몬시대에는 3년에 다시스에서 배가 들어왔는데 그 배에는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이 있었다. 우리가 표현하는 서역사람들이 3년마다 배에 가득히 은금을 실고 와서 더 풍요롭게 하고, 또 원숭이와 공작과 같이 진귀한 동물들도 들어와서 사람들이 늘 신비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가 너무 크고 놀라와서 사람들이 솔로몬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예물을 가지고 나아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나라에는 계속하여 은금이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평생을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인생노년에 전도서라고 하는 책을 쓴다. 그런데 그 책의 시작이 우리에게는 충격을 준다. 솔로몬이 뭐라고 썼는지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지고, 세상의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하는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그래 세상은 이렇게 사는거야! 나는 이제 여한이 없어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인생은 헛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솔로몬은 인생은 헛된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가? 개그맨 이경규씨는 팬레터가 오고, 또 많은 곳에서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인기가 굉장히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SNS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여과없이 나타났는데, 그때 많은 악플을 보게 되었다. 그 후 이경규씨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을 믿을 수가 없게 되면서 공황장애로 엄청난 고통을 가져야 했다. 이런 이경규씨가 법륜에게 내가 왜 내어났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때 법륜은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고 하면서 사람은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긴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왜 태어났는가를 묻지 말고, 삶은 주어졌기 때문에 주어진 삶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법륜이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법륜은 이미 태어났는데, 왜 태어났을까?를 고민하지 말고, 이미 태어난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삶을 개선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륜의 말이 옳지 않는가? 이왕 태어났는데, 내가 왜 태어났을까?를 묻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왕 태어났으니 어짜피 태어났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까?를 고민하면서 그 행복을 찾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어떻게 살면 행복한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루고 있었다. 그 시험문제 중에 하나가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였다. 그 질문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로댕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공부를 못하는 옆에 앉은 친구는 답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다 공부 잘하는 아이의 답을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 눈이 나쁜 이 친구는 정확한 답을 보지 못하고 로댕을 오뎅이라고 읽었다. 그래서 답안지에 오뎅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옆에 앉은 더 공부를 못하는 친구는 오뎅이라고 기록하면 컨닝한 것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에 고민하다 덴뿌라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친구도 답을 몰라 고민하다가 옆의 친구 답을 보았다. 그리고 덴뿌라라는 일본말이라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고상에게 이렇게 답을 썼다. 어묵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행복을 찾는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누가 좋은 옷을 사면 그것을 사야 행복한 줄 안다. 누가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면 나는 최소한 제주도라도 다녀와야 행복한 줄 안다. 그런데 한가지 정확한 것은 남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해도 거기에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교회다니는 사람은 다 아는 탕자의 비유이다. 부자아버지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둘째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유대사회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아들은 돌로쳐서 죽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사회에서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할 때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다(눅 15:12)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둘째에게 유산을 주어야 하는 아버지는 둘째만이 아니라, 첫째아들에게도 유산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아들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팔아 먼 나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아들을 부둥켜 안고, 또 입을 맞추며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도, 또 손에 가락지를 끼워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첫째 아들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첫째 아들은 집에서 잔치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둘째가 돌아와서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때 첫째 아들은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첫째 아들에게 집으로 가자고 할 때 첫째 아들은 아버지는 여러해 동안 아버지를 섬긴 나를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까?(눅 16:29-30)하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왜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불평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산울림이 부른 회상이라는 노래가 있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 지네
마음은 열고 나는 그곳에 서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
마치 얼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놀라서 있던거지
달빛이 숨어 흐느끼고 있네
우∼ 떠나버린 그 사람 우∼ 생각나네
우∼ 돌아선 그 사람 우∼ 생각나네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
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 혼자 어쩔 수 없었지
미운건 오히려 나였어
이 노래는 이별의 아픔을 그리는 노래이다. 그런데 저는 이별이라고 하면 연인의 이별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른 김창완씨는 이 가사와 같은 이별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1977년 제 1회 mbc 대학가요제에 김창완씨는 동생들과 함께 무이라는 이름으로 예선에 참가하여 1등을 한다. 그런데 김창완씨가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1위 샌드페블즈-나 어떻게>
그 후 김창원씨는 동생들과 함께 산울림이라는 록밴드를 만들어 음악활동을 하였다. 서울대 천연섬유학과 졸업한 큰 형님 김창완, 서울대 식품공학과 재학 중인 둘째 김창훈,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전공인 셋째 김창익 이렇게 명문대생이 록밴드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은 그룹사운드에 대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기성세대도 산울림의 반듯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산울림은 동생들은 일반회사에 취업을 하고, 김창완은 혼자서 산울림의 명맥을 유지한다. 그리고 1997년 데뷔 20년을 맞이하여 다시 형제들과 음반을 제작하고 1년 동안 함께 활동을 한다. 그리고 난 후 다시 김창완은 혼자서 산울림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2008년 김창완은 공식적으로 산울림의 해체를 선언한다. 그때 김창완이 산울림을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유는 막내 동생인 김창익씨가 캐나다 벤쿠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후 김창완씨는 동생 김창익씨를 생각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형제는 각 개체가 만난 것이 아니라 한 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사지가 절단된 느낌이었다. 사고 전으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어느 시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그땐 그 시간의 소중함을 몰랐다. 막내가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다.
김창완씨는 동생들과 함께 자라고, 또 음악활동한 때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내가 죽었을 때, 사지가 절단된 아픔을 느끼면서 그때가 정말 좋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첫째 아들의 모습이었다. 첫째아들은 아버지가 모든 것을 주고, 또 함께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랬던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누가복음 16:31에로 말하는 것이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왜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여야 했는가? 둘째아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하고 살면 행복한 줄 알았다. 그래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아들은 결국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첫째 아들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나에게 준 유산을 더 잘 관리하고, 더 많은 소출이 생겨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랬던 첫째아들은 불평이 가득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살아도, 또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몸부림치며 수고하고 살아도 거기에는 참된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겠는가? 둘째를 다시 보기 바란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이제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했기 때문에 이제 나를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다고 품군의 하나로 사용하여 달라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품군으로 사용하지 않고,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아들이 행복을 찾는 방법은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는 많은 일만 하였다고 불평하는 그 아들에게도 아버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잔치가 있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행복하려면 무엇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실제 행복은 무엇을 가지고, 행하여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행복은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1편은 복있는 사람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기자는 복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하고 하지 않는다. 아니 복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행하는 사람이다고도 하지 않는다. 시편기자는 복있는 사람은 곁에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고 사는 그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복있는 사람인가? 행복을 누리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내 곁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심으로 평안을 누리고, 행복한 삶을 사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