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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정희진처럼 읽기
저-정희진
작가 정희진 ‘여성주의’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 《정희진처럼 읽기》는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부터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까지 79권의 책을 통해 당대 우리 사회의 고통, 권력, 주변과 중심, 삶과 죽음, 지식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통념과 상식에 대한 전복적 성찰의 기록이다.
출-교양인(2014.10.10.307쪽)
독정-2019.4.4.~4.10
<머리말에서>
약물, 주사, 수술로만 고치했던 병을 대화로 고치려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혁명이었다. 마음이 괴롭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아프다. 암, 우울증 같은 질병에 걸릴 수도 있다. 실제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억장이 무너져 죽을 수도 있다. 머리의 심장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마음은 몸 안에 없다. 마음이라는 부위는 없다. 몸은 사회적이다.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책 읽기는 물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젓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울 튀는 정도다. 깊은 강을 건너가는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고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거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 앓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 후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고전이 좋은 책이다.
·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가 가장 문제다. 모난 돌들이 둥글어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모난 돌들의 대화가 가능한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헬렌 켈러가 캄캄한 상자 안에 들어가 앉아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기억이 난다. 위인전이 극복이나 위대한 업적보다 다양한 삶을 제시하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 1장 고통
저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_ 벌레 이야기, 이청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표제작은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광주항쟁이야기로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놀라운 정치적 지적 자극을 견뎌낼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원작과 영화는 서로 빼어남을 다룬다. 영화 내용은 약간 다른데 제목처럼(밀양, Secret Sunshinc) 다소 밝다. 범인은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피해자 가족에게 “제 영혼은 이미 하는님께서 사랑으로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저는 새 영혼의 생명을 얻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겁니다. 지금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고 간증하고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자살한다. 용서라는 피래자의 권한마저 빼앗아버린 신. ‘벌레 이야기’는 다리가 불편한 초등학교 4학년 소년의 유괴 살인이라는 현실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주제다. 나는 이 작품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관계로 본다. 더불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사법 처리도 여론도 엄마 편이지만 압도적 권력의 차이는 두 사람 마음에 있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도 피해자의 고통을 상쇄하지 못할 판에,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갈망했던 신의 구원을 받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측은지심과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다.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용서를 강요하는 상황은 낯선 일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 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ㅇ벗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초월은 득도가 아니다. 경험 업는 몸은 현실과 무관하므로 구원도 마음의 평화도 쉽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용서와 평화를 당연히 하는 사회가 두렵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아이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용서와 치유다. 남편조차 피해자가 조용히 하기를 원한다.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국가 간 평화든 마음이 평화든, 평화를 논의하는 전주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_ 그날,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의 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의 시 <그날>의 마지막 구절이다. 아프기는커녕 ‘더욱 열심히 뛰겠다“고 한다. 썩지 않는 시체에 항생제를 붓는다. 인간이 인격체가 아니라 ㅂ ᅟᅡᆼ부제인 사회, 절망할 기력조차 없다.
·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자살하기도 하는 관계적 존재다. 소통을 위해 죽는 것이다. 특히 우울증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살아 있는 죽음을 살 것인가. 죽음으로써 살 것인가.
· 당사자의 언어가 곧바로 사회자 인정하는 차별의 증거가 될 수 없지만 문제 재기의 시작임은 분명하다.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차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갈등한다. 고통과 억울한 심정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만 내 처지를 수용해줄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더욱이 상황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소문만 나고 결핍된 인간으로 취급받을 위험이 더 크다. 말하고 공감받음이 ‘해결’의 시작이기에 이 욕구는 절실하다. 동시에 낙인으로 사회 성원의 권리를 잃을 수 있어 두려움은 참고 사는 ‘동력’이 된다. 이 내면 갈등이 격렬한 나머지 남들이 먼저 알아보는 경우도 많다. 차별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듣든 사람을 배려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는 분열된다. 모든 말하기, 글쓰기가 협상인 이유다. 원래 이 자아 분열 개념은 나치 학살 생존자들이 자기 경험을 믿어주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자아를 조정하는 고통에서 발전했다. 지금은 모든 담론 행위에 공통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글을 쓸 수 없어 죽는다는 건 생명 경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다. 삶의 매 순간이 의미, 호기심, 열정의 연속이라고 믿는다면 재능 엇는 천재의 좌절, 자기모순, 동반 자살 싶애의 죄의식, 경멸하는 인간들과의 경쟁, 패배, 이건 삶이 아니다. 영원한 인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죽도록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가장 어려웠다 _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경험한 나, 말하는 나 _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 _ 《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한미 연합군이 강정을 침공했다, 이 말은 국보법 위반일까 _ 순이삼촌, 현기영
·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_ 이십세기 기수, 다자이 오사무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어때요. 우린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다자이 오사무.
감독님 영화에는 죽음 이야기가 많은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요?“”죽음에 대한 제 입장은 언제나 똑 같습니다. 절대 반대입니다. <씨렌 21> 우디 앨런 인터뷰에서
아무 인사도 없이 _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생존자라는 말도 싫어요. 내가 죽다 살아났나요? _ 《은밀한 호황》, 김기태?하어영
손 무덤 _ 손 무덤, 박노해
벼랑에서 만나자 _ 지금은 비가…, 조은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_ 전화, 마종기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습니다 _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2장 주변과 중심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_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_ 《고정희 시전집 1·2》, 고정희
“내게 설명해줘!” _ 《이별의 기술》, 프랑코 라 세클라
숨자. 살아남으려면 숨자 _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낸시 홈스트롬 엮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_ 《신약성서》
근친상간 금기는 가족의 보존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_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 _ 세 가지 물음, L. N. 톨스토이
-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습니다(83쪽)
“내게 설명해줘!”는 탈식민 정신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인 ‘피해자의 정체성’ 콤플렉스를 요약하는 문구이다. 피식민자는 이 질문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는 상대방으로 인한 결과(피해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이 질문은 고통뿐인 권력 관계의 지속을 보장할 뿐이다. 학대당하면서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는 누군가가 ‘끝냈다’고 생각한다. 왜 나를 때릴까?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내가 아닌 그(그녀)지? 이건 우문도, 문장도, 질문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 담론이다. 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 “내게 설명해줘!”(94, 95쪽)
악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발생하는 악 자체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가장 벗어나기 힘든 악, 피해자가 악을 치열하게 사랑하게 만드는 악이다. 바로 영화(케빈에 대하여)에서처럼 “왜 그랬니?”라고 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악이다. 이유에 대한 질문은 죽음, 상처, 상실, 모욕과 같은 악의 피해가 지나간 후에도, 악의 지배를 지속시키는 장치다. 악이 만든 공간에 살면서 악을 평생의 주제로 삼게 하는 것이다. …… 악은 의도가 없다. 의지가 있을 뿐이다. 왜 죽였니? 왜 때렸니? 왜 그랬니? 악이 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수 있어서, 그때 그랬을 뿐.”
공포는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 _ 《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책은 나를 이룬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 이전의 내가 있고, 이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독후의 감(感)이다.”
“독서는 수많은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정희진은 《천자문》에서 뜻이 없는 조사 ‘焉’이 전체 문장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의미 없음’의 권력을 떠올리고, “독단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방법에의 도전》을 읽으며 지배 규범을 ‘객관’으로 간주하고 자기 의견을 가진 집단을 편협하다고 낙인찍는 우리 사회의 인식 틀을 비판한다. 그에게 책 읽기란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고통, 상처를 해석하는 힘이다.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 글이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 ‘프롤로그’에서
《정희진처럼 읽기》는 어떻게 글을 읽을 것인가에 관한 정희진식 방법론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책과 독서에 관한 생각을 펼친 ‘프롤로그’,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자 자신(과 자기 세대)의 독서 이력을 진솔하게 그린 ‘좁은 편력’, 독후감 쓰는 법을 말하는 ‘에필로그’는 ‘정희진처럼 읽기’의 바탕을 보여준다. 이 책은 독서란 각종 관습과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을 확장해 가는 행위임을 깨닫게 해준다.
안락사를 생명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태도다. 문제의 본질은 생명이 아니라 고통이다. ……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우리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체적인 고통보다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러한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 “남은 사람의 고통” 등 엉뚱한 언어로 포장한다.
<내게 설명해줘, 이별의 기술-프랑코 라 세쿨리>
·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악과 싸우는 것은 반악이지 그것이 곧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이간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 누군가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왜 나를 때릴까? 왜 나를 떠날까는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 담론이다. 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새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전직 연인은 그저 이별이 한 인간의 정치학과 윤리학을 정확히 보여주는 지표일 뿐임을 알면 된다.
·고통 받는 이의 호소를 외면하는 것은 무지일까, 이지일까,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불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악마성이다. 당위적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되어야 한다.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다.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리몬 삼페드로-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대중적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100, 101쪽)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하고 있던 전선(戰線)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제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멘붕’) 상태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자각이 다른 앎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약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다. 강자는 자기 생각을 약자에게 투사하지만, 똑똑한 약자는 두 가지 이상의 시각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악한다. 전선을 구획하는 자가 이긴다. 누가 먼저 어떤 선을 긋느냐. 누가 먼저 생각하는 방법을 창조하느냐. 기존 전선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내가 룰을 만들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라.” 강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양극화를 만들고, 약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을 이롭게 한다. 기존의 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략도 필패다. 내가 ‘쉽고 익숙한’ 말을 경계하는 이유다. ---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물고기 밥을 훔친 죄, 운형궁의 봄-김동인>
고물이 보물이 되려면 주고 욕먹을 가능성이 많다. 그게 귀찮아서 그냥 버린다. 웬만한 사람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 데는 노동이 필요하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 문장가회-이태준>
전후 없이 돌발적으로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 젊은 여인의 성격이 훌륭히 보이는 말들이요, 말 자체로만 성격까지 드러난다. -한 마디로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된 좋은 글이다 .여기서 ‘전후 없이 돌발적으로 마음 솟는 대로 지껄이는’은 인물의 의지, 감정,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력, 인물의 풍모를 음영까지 묘사한다. 자유롭게 말하는 인물, 말과 밀도, 리듬을 타는 문장, 부럽다.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손자병법-손부>
완전한 승리는 적의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표현언어가 없는 것이다.
<손무덤>-박노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상이다. 생각은 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른다는 말은 이상하다. 머리(의식)도 몸이다. 의식은 몸의 어느 부위인가? 그런 부위는 없다.
강함 한 성형외과는 사각턱 수술에서 절개한 화자의 벼를 투명유리 기둥에 넣어 벼원 로비에 전시했다. 단순한 조형물인줄 알았다가 인제 적출물인 줄 알고 기겁했다. 몸에서 분리된 인체, 턱뼈는 돈을 주고 잘라낸 것이고 손 무덤은 돈 벌러다 잘려 나갔다. 턱 뼈는 자해, 손 무덤은 피해다. 불필요한 성형 시술은 사회요구를 몸에 실천하여 체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 자기’를 부정하고 욕망을 따르는 가치 지향적 삶이다. 그 가치자 바람직한 경우도 있지만 대게 경쟁사회의 자기 다짐이다.
<순이 삼촌-현기영> -한미 연합국이 강정을 침공했다. 이 말은 국보범 위반일까,
· 고구마 밭에서 살해당하고 밭ㅌ에 안들어가려고 발버둥치다 부모 형제 시신이 썩어 거름이된 덕에 고구마는 잘되어 크기가 베개만 했다. 그해 흉년이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모 형제의 다른 모습인 그 고구마를 먹지 못했다.
<파이 이야기>- 안미텔
·벼랑에서 만나자. 벼랑을 긍정하면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고 나를 서럽게 한 사람이라도 다시 믿어보며 억울한 사회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보다 10살, 20살 많은 친구를 만났는데 두 번 다 나릉 앞에 두고 스마트 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에게 졌다. 벼랑에서 만나기를 원한다. 삶 자체가 벼랑의 선택이다. 별팡에 살다 보면 다양산 사람을 만난다. 벼랑을 경멸하는 자. 벼랑으로 몰릴까 봐 못 본 체 지나가다 넘어지는 자, 친한 척 다가와 벼랑만의 경험을 인터뷰하는 자, 그저 벼랑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자, 벼랑을 파괴하고 공사판을 벌이자는 자, 벼랑에 매달린 손을 밟는 자. 물론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목숨처럼 나무며 노루 피를 부어주는 이들이 훨씬 많다. 벼랑을 긍정하면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고나를 서럽게 한 사람일지라도 믿어보며 억울한 사회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상대가 누구든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절실하게 만났으면 한다. 그렇게 망므을 다하고 회자정리를 안아버리면 어디에 가서 돌이 되어 바람을 굴절시키는 단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고정희 시 제목이다.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개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초반 극중 도승자가 “그는 충신이옵니다. 죽이면 안됩니다.”ᅟᅳᆨ러자 광해군이 “누가 그걸 모르는가. 충신 중 충신이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는 내줘야(죽여야) 저들이 나를 믿을 것이네.” 이 대사는 약자와 강자의 판세는 번복되는 법이지만 게임 법칙 중에 상대 리더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라는 전법이 있다. 당사자는 잘못이 없지만 힘겨루기 차원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강자는 자기 사람을 감싸는데 약자는 동지를 내쳐야 한다. 약자 진영이라도 똑똑한 리더는 강자의 요구를 거부한다. 자기 사람을 보호하여 내부 단결을 도모하고 구성원의 신뢰과 존경을 받는다. 이를 기반으로 힘을 키운다. 영화에서는 가짜 왕이 그런 리더십을 발휘한다.(왕의 호위무사가 광대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라“훌륭한 리더는 내부 사람을 존중한다. 정체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가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 성ㄹ장, 정치 개혁 따위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하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 혐오, 자기 검열에 시랃ㄹ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 내개 가장 소중한 살마은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살인,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입니다.>슬픔의 노래-정찬.정치신학자 정찬의 주제는 권력과 폭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들 모습은 작가를 통해 예술의 신학의 이유가 된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영화에서 명계남이 형이 고문할 때는 ‘아이고 저러다 죽지’하는 생각에 너무 불안한데 고문 기술자인 내가 전문가처럼 굉장히 능숙하게 고문 하니까 너무 안심이 되고 고맙더래.”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 때와 달리 ‘저 사람이 고문을 했으니까 우리 남편이 살아남았다.’는 거지.
<슬픔의 노래>26회 동인문학상 수장작.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슬픔의 노래>에는 진부한 논리라 묘사가 없다.
·<세계화 시대의 국가 안보>책은 여성학이나 평화학 계열의 ㅊ액이 아니다 정통 곡제정치학 논의다. 저자 배리 부잔은 안보 연구를 안보에서 압보 개념으로 전환시킨 이론가다. 안보 개념에 합의란 없다. 모든 언어에 합의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예외다. 개인은 국가 안보를 자기 이익과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나? 국방과 안보 사이의 모순, 개인 안보와 국가 안보의 모순, 극가 안보와 국제 안보의 모순, 폭력적 수단과 평화적 목적 사이의 모순, 집단 간에 완벽한 안전을 지행하면 오히려 전쟁 혹률이 높다는 안보 딜레마가 모순의 핵심이다. 이 책에서 보면 안보는 미흡한 저개발된 개념이다. 한국 사회에서 안보는 단지 자신의 공포, 악심, 더러움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만능 무기로 쓰일 뿐이다.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만행이 아니라 이토록 간단한 무기에 한없이 취약한 한국 사회다.
·살마들은 다양한 대상에 중독된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긍정 중독(일, 운동, 공부)가 아니면 의지 부족이나 인격 결함때문이라기 보다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에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중독이다.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다. 강가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산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최소한 생존할 수 있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분리의 어려움이다.
·김원일 <오늘 부는 바람> 1970년대 도시 빈민의 가난과 절망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ㅇ릭고 문학과 지성의 관계를 배웠다. 빼어난 문장이란 그 자체로 영상이며 읽는 이의 몸에 베어들고 몸믈 베는 글이다. “매일 부는 바람도 저마다 다른 바람임은 분명하다. 이 괴로움의 변주가 삶의 가능성이다. 바람 불지 않는 날을 기대하지 말자. 조금씩 다른 바람에 대해 알고, 쓰고, 함께 바람 맞는다면 오늘 부는 바람도 견뎌지겠지
·인간의 몸음 돌을 던지면 돌이 긋는 포물선처럼 원호 생명에서 점점 발전하여 한창때를 누리다가 마침내 기운을 잃고 떨어져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케에르케골 저. 공공 의료는 개인이 죽음에 이른ㄴ 길에서 겪는 고통에 개입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서다.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더 슬픈 게 있을까?> 살아남은 자의 아픔-피리모 레비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더 슾은 게 있을까??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멈췄다. 행복할 때, 정지했으면 하는 그 시간이 실현되었다. 우리는 기차역(삶)에 함께 앉아 있었다. 기차역에 끌려온 사람들은 살아 있는 죽음을 산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시를 쓰는 살마도 있지만 누구나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그를 이해하는 마늠 기차가 오기 전에 죽는 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될까 ”모든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억의 조각품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인생에서 여려운 일 세 가지, 생각, 사랑(관계), 자기 변화다-하이데거
·옥수수는 수확 후 바로 쪄야 맛있다. 다른 곡물보다 당분에서 전분으로 변화하느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통밀은 케이크의 원료지만 성분이 같다해 통밀과 케이크가 같은 음식은 아니다.
·헌책방에서 마르텡 모네스터에의 <자살>을 사서 책을 든 채 자주 가는 빵ㅈ빕에 들렀다. 친한 주인이 나를 보자 놀란다. “에이, 그러면 안 되지, 어째...” 자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겠다는 것도 아니고 책을 들고 있을 뿐인데. 나는 불길한 부적이 되었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가 따른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지막 잎새>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다. 지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버먼은 그렇게 죽었지만 비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위대하고 행복한 마침표도 아니다. 이것이 오 헨리 작품의 매력이다. 슬픈데 따뜻하고 찡한데 안식이 있다. 희망과 절망 그런 차원이 아니다. 哀傷(애상)이나 애잔함은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있다.
·영화 드라마를 볼
때 극중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도 시점이 있다. 대부분 관객은 그런 시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작가가 비교적 집중하지 않는 그 자체가 아니라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인 주변 조연, 엑스트라에 신경 쓰거나 주의를 환기하고 동일시하는 관객은 드물다. 그러나 주인공을 주인공이게 하는 주인공과 타자(다른 인물, 동물, 사물, 자연)의 관계에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주제의 줄거리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근본적으로는 다른 정치적 세계(범주)가 만들어진다. 텍스트 자체도 감상문도 달라진다. 좋은 독후감의 전체는 일단 다르게 읽기다. 독후감은 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과 읽기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책의 준과 무관하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 부분을 쓰는 것. 새로운 의미,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독자의 시점은 독자의 현실에서 위치나 정치적 지향에 따라 다르다. 언제나 주인공하고만 동일시하면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읽을 수 없다. 생업과 부모 봉양을 하지 못하고 이유도 모를 전쟁에 동원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국가 간의 세력 다툼인가? 탈영은 비겁한 일인가? 누구를 왜 죽여야 하는가? 그 입장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와 장군의 고뇌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계백 장군은 1남 2녀의 자녀와 아내를 칼로 베어 죽인 다음 전쟁터로 갔다. 페배를 예감하여 가족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조국 백제를 위해 황산벌로 달려가 장렬히 전사한다. 이 행동은 계백이 위대함으로 묘사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흔한데 여성과 어린이의 시점에서 보면 그저 남성을 위한 살육이다. 여성과 어린이는 남성 영웅의 경합과 탈취의 대상이며 남자의 명예를 저장하는 보관소로 여겨진다. 남성 영웅들의 정치가 여성의 몸에 실현되는 것이다. 여성으 ㅣ죽음은 남성 정치의 부산물이다. 여기서 세 주제의 시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고 그 의미 역시 다른 정치와 역사가 된다. 위치성의 내용 변화로 정치학의 변화로 이어져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어쨌든 이전 관점에서는 부산물, 부작용, 부수적. 이차적이었던 것이 주요 주제로 위치를 바꾸고 새로운 세계가 드러난다. 새로움을 찾아내는 것, 생각하는 것. 쓰는 것이 독후감이다. 백설공주와 난쟁이는 왜 커플이 되지 않는가. 잠자는 왕자는 없는데 왜 잠자는 공주는 그리 흔한가. 구약성서(롯기)의 며느리 롯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계는 레즈비언임을 암시하는데 왜 사람들은 동성애를 금기했다고 못 박는가?
·의사의 권력은 환자의 고통에서 나오고 사제들은 죽음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왕은 이 모든 시스템에서 우두머리다. 우리는 구체적 고통보다 관념적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런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 남은 사람의 고통 등 엉똥한 언어로 포장한다. 2014년 2월 ‘송파 세 모녀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그 고통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삶의 반대편에 죽음을 상정하여 없는 죽음이 있는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ㅇ과 죽음의 공포를 통해 일상을 협박하는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