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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주일설교
긍휼 베푸심의 끝은 어디인가?
마태복음 14:13-21
사람은 어떤 일에 애를 많이 쓰고 나면 지칩니다. 일이 잘 안되었을 때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되어도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그래서 큰일 후에는 쉼이 필요합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면 피곤하고 짜증을 내기 쉽고 마음을 다잡아 새로운 일을 하기 힘듭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기도회”는 현장에 100만 명, 온라인에 100만 명 참여를 목표했는데 현장 참여자만 해도 무려 110만 명이 모였습니다. 큰 성공이죠. 저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 교회라도, 한 성도라도 더 참여시키기 위해 교회마다 열심히 전화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나서 기쁘면서도 몸과 마음이 피곤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28-29일에 용인시 시목위원회 수련회가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박 2일의 수련회를 통해 쉬면서 재충전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도 완전한 사람이셨기에 몸이 지치거나 마음이 지칠 때는 쉼이 필요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2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이 예수님에게 전해졌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어떻게 죽었는지는 3~11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매우 엽기적인 사건입니다. 귀한 선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은 예수님께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인데 얼마나 부도덕했던지 요즘 같으면 탄핵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 악한 헤롯이 여자 하나 기쁘게 해 주려고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래놓고 헤롯은 예수님의 사역 소식을 듣고 요한의 영이 예수님에게 들어갔다는 소리를 했습니다(1~2절). 죽은 사람의 영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헤롯은 자기가 한 짓이 부당하고 악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두려워서 한 소리입니다.
헤롯은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누가복음 9:9). 하지만 헤롯이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섬찟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지친 우리 예수님에게는 잠시 쉼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지칠 수 있고 쉼이 필요한 것은 엘리야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3년간 비가 오지 않았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과 싸워 승리한 후에 기도해서 비가 오게 했습니다. 그랬던 엘리야는 너무 지쳐서 광야 로뎀나무 아래 쓰러졌습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지쳐 쓰러지는 것을 보면 사람이 피곤하고 지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쉼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당한 직후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도록 파송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에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큰 성과를 보고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요한이 죽은 슬픔과 헤롯이 예수님도 체포할 것 같은 위협이 생겼고 제자들은 전도 여행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몸이 지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어서 죄는 짓지 않지만 완전한 몸을 가지고 계셨기에 몸과 마음이 피곤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도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쉬기 위해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왜 하필 벳새다로 정했을까요? 벳새다는 갈릴리바다 북동쪽에 있는데 여기는 헤롯 빌립의 영지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바다 서쪽을 다스렸고 헤롯 빌립은 동쪽을 다스렸는데 벳새다는 경계선에서 약간 동쪽, 즉 빌립의 영지에 속했습니다. 빌립은 이복형 안티파스에게 아내도 빼앗겼으니 서로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안티파스가 벳새다까지 잡으러 올 가능성이 없고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새다로 가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이 의지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백성들이 선지자로 믿고 따랐던 요한이 사라지자 백성들이 바라볼 것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당시 백성들은 얼마나 공허하겠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피곤하고 쉬어야 하는 상황과는 달리 백성들은 세례요한을 대신할 새로운 의지처가 필요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예수님이 슬프다는 것과 몸과 마음이 지친 것을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지치고 피곤한 것도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황보다는 자신들이 공허하고 의지할 지도자가 없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진 예수님의 행로를 추적했습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지만 수소문하면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출발한 방향을 계산해서 백성들은 육로로 예수님을 좇아 뱃새다로 갔습니다.
뱃길은 육로보다 편하고 빠르지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배를 탈 수 없었기에 백성들은 갈릴리 북쪽 육로로 부지런히 걸어서 뱃세다로 갔습니다. 마가복음 6:33에 보면 그들이 달려가서 예수님보다 먼저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러 장소에서 왔기에 일부 사람들이 먼저 그곳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특히 슬플 때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짜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좀 쉬고 재충전해야 사역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안티파스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식을 때까지 좀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비록 벳새다가 빌립의 영지이지만 안티파스 영지의 경계선에서 멀지 않은 장소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서 안티파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국경선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안티파스의 군사들이 기습적으로 벳새다로 가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예수님이 위험하거나 피곤하거나 제자들에게 재충전이 필요한 것보다 자기들의 필요가 우선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벳새다로 꾸역꾸역 모여들자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여러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막 6:34, 마 14:14). 또 병자들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배불리 먹여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피곤하고 지치면 예민해져서 짜증내기 쉽고 좋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몸도 지치고 마음도 슬퍼서 쉬셔야 했고 헤롯 안티파스의 위협과 주목에서 잠시 피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보다는 백성들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목자 없는 양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양이라는 동물을 정말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특이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쉼을 포기하고 백성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수없이 반복해서 언약을 깨뜨려도 또 찾아오시고 다시 언약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결국에는 언약의 대표자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필요가 아닌 우리의 필요를 위해 살다가 우리의 필요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하나님 앞에 뻔뻔하게 나아와서 나의 필요를 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게 기도할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지 않고 내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 그런 뻔뻔함이 바로 믿음입니다.
갓난아기는 엄마가 피곤하든지 잠을 못 자서 눈이 충혈되었든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어떤 상태이든지 관계없이 아기는 배고프면 울고 오줌 쌌으면 울고 잠 오면 울고 그러면 됩니다. 어떤 엄마도 우는 갓난아기에게 염치가 좀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불쌍히 여기심, 다시 말하면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어 헤쎄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심의 끝은 바로 어디일까요? 바로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생명 맞바꿈입니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 허벅지를 뚝 잘라서 너희를 먹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시는 겁니다. 나는 그때 당황해서 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하고 먹을 것 없던 시절에 말도 안 되는 그 말은 어머니의 진심이었습니다.
인간 부모도 그럴진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 불쌍히 여기심은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도 슬프고 당신도 피곤하고 당신도 지쳐서 여차하면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당신의 슬픔, 당신의 피곤함을 돌보지 않고 무리를 불쌍히 여겨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피곤하니까 빨리 사람들을 흩어보내고 맛있는 것 좀 먹고 푹 쉬자고 하지 않으시고 무리를 먹여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들판에서 2000데나리온 이상의 빵을 어디서 구하느냐고 할 때 보리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주시고 우리에게는 생명과 구원과 천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끝은 생명 맞바꿈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그 정도 했으니 이제는 너희가 나를 위해 좀 희생하거라 하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여 죽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가는데 체면 차릴 것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와서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결심과 노력이지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벳새다까지 육로로 걸어서 오는 데는 꽤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한 것은 아무런 공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 전해 주시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여주신 것은 오로지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영혼을 구원하시고 우리 기도를 들어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주님께 나아와서 구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질문입니다.
“긍휼 베푸심의 끝은 어디인가?”
이 질문의 답은 엉뚱하지만 이것입니다.
“육로로 걸어서 예수님을 찾아가라”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의 한없는 긍휼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로로, 먼 길을 걸어서 벳새다까지 달려갔던 것처럼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서 은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는 엉뚱한 대화로 마쳐봅시다.
“예수님의 긍휼 베푸심의 끝은 어디입니까?”
제가 물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해 주세요.
“육로로 걸어서 예수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첫댓글 https://youtu.be/Hrds23bAv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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