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전도된 의식
‘나’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나’라는 인식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관념에 초점을 모으고 살아간다. 이때부터 일어나는 모든 느낌과 생각은 우리의 본질과 상관없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관념의 정보를 바탕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생겨난 새로운 관념의 정보는 퇴색하여 필요 없는 정보와 바꿔가면서 자신에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가는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닌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상상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더 나은 삶을 공유할 수 있다고 느끼는 착각인데, 그 착각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생각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고 누구와도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지 않은데 같은 시공간에 사는 것처럼 생활하게 된다.
본질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공간은 관념일 뿐이다. 그 관념이 동일할 수 있는 확률은 제로(zero)다. 그 관념은 ‘예’, ‘아니오’처럼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예’ 속에도 수많은 ‘예’가 있고, ‘아니오’ 속에도 수많은 ‘아니오’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같이 공유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생겨날 수가 없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 수 없는 본질은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나’라는 인식으로 펼쳐진 세계는 스스로가 만든 세계가 아니므로, 스스로가 그 인식의 세계를 지울 수도 없고 나타나게 할 수도 없는 입장 때문이다. 스스로는 펼쳐져 있는 관념의 세계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관념의 세계는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허깨비 같은 것이다. 일일이 개개인들에게 하나하나 일러줄 수가 없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조건의 허깨비는 다른듯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의미에서는 같은 것이다.
스스로는 ‘나’라는 인식이 만들어 놓은 관념에 무(관)심하는 일이 그의 일이다. 여기에서 무관심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는 허깨비에 대해 관심과 무관심이 처음부터 없으니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오해가 완전히 해소되어야 한다. 이러한 오해가 해소되지 못하면 반쯤 깬 상태의 잠에 취해 있으므로 꿈에서 완전히 나왔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스스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꿈속의 일인 동시에 꿈속을 나오는 말들이다. 그와 같이 춤을 추고는 있지만 춤을 추기 위한 춤은 아니다. 그가 꿈속에서 나올 수 있도록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같이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는 꿈속에서 노는 일이 없다. 그의 모든 일은 꿈속에서 나오는 일 이외에는 어떤 관심도 없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이 있어 건네줄 수 있다면 아마도 당장 그에게 그 약을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약이 없다. 사실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꿈속 일이니 사실 약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꿈속의 환상에서 사실이 하나라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전도된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으므로 터럭 하나도 허락할 수가 없다. 어찌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겠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아닌 사대오온이다. 스스로는 사대오온이 숨이 막힐 때가 가장 편안한 때이다. 그때는 아무 일이 없다. 걱정할 것도 근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게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도된 의식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조언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말해봐야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일이고, 또다시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일들이다. 조언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개념은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님을 알고 찾아 헤매는 일을 멈추어야 아무 일 없는 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지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