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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감사 노래 / 삼상 2:1-11, 빌 3:12-21
한나 이야기는 의미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가 먼저 사무엘의 어머니로서 사무엘, 사울, 다윗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도입부 역할울 하는 탄생이야기의 장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나는 이들과 나란히 자기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한나는 뒤에 나오는 세 인물 사무엘, 사울, 다윗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은 의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영광스러운 출애굽, 시내산 상의 계시, 광야 40년의 섭리,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의 쾌거에 이어 상황은 다소 혼미한 길을 걷고 있었다. 사사기가 전하는 이야기는 도덕적,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그리고 있다. 물론 때에 따라 드보라와 삼손, 기드온 같은 인물들이 혜성처럼 나타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활약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화려한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나라의 상황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는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통하지 않던 시대이다. 사사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21: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공동번역 - 제멋대로) 행하였더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비슷하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사사들의 시대와 같이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대이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가 옳은 소견대로 행하기 때문에 어떤 권위자의 권면이나 설득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런데 보세요. 이런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새벽을 여시고자 준비하신게 있다. 바로 한나 이야기이다. 한나 이야기는 부유하고 견실한 시민의 냄새를 풍기는 엘가나라는 남편과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 아내인 부닌나는 자식들이 있었고, 다른 아내인 한나는 자식이 없었기에 둘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나의 불임상태가 부정적인 기조를 이루며 이를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창세기의 사라나 누가복음의 엘리사벳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는 말은 비옥한 토지와 견실한 가문에 대한 묘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로 더 이상 평가되지 않는 우리의 문화에서도 자식을 갖기를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자들의 아픔과 쓰라림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자식이 없었더라’는 문구는 갈망과 좌절, 눈물과 기도의 세계를 즉각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한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안다. 그래서 성전에서 홀로 떨어져 기도한다. 한나의 기도는 서원 형태를 띤다. 한나는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또한 이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녀의 현실적인 마음도 가난한 마음, 빈 마음 만큼이나 기도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한나의 기도는 받음과 드림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결국 한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낳고 기뻐서 감사노래를 한다. 한나의 노래에는 하나님에 대한 풍부한 깨달음과 고백으로 차있음을 볼 수 있다. 1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2절 반서고가 같이 흔들림이 없으신 하나님, 3절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4-5절 능력이 많으신 분이되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 6-9절 생명과 재산과 권세를 주장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10절 종말적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실 하나님,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찬양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한나의 노래는 사사시대의 깊은 영적 무기력과 혼란에 대조되는 하나의 빛나는 아침 햇살과 같은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영적인 통찰력이 이미 녹슨 칼과 같이 무뎌져 있었다는 것을, 한나가 기도할 때 그 기도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제사장 엘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그 가문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부패에서 그 시대의 종교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그 시대는 삼상 3:1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때이다. 이런 때 한나의 기도와 감사 노래는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런 경건한 자를 통하여 새시대의 여명을 알리시고, 또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지도자 사무엘을 보내신 사실을 생각할 때, 한나와 같은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도 한나처럼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믿음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가장 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나의 기도와 감사 찬양은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한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고, 앞으로 열어나갈 구속의 역사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것은 무기력한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새롭고 위대한 다윗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며, 2:10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예언하는 것이다. 2:35절상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나의 믿음을 통하여 그의 구원의 역사를 풀어 나가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여자의 깨어있음을 통하여 찬란한 다윗의 시대는 준비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그것은 우리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님을 기억하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이루어 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후 5:15절의 말씀대로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한나의 감사노래를 살펴보면, 노래의 주제는 개인과 민족의 형편을 뒤바꾸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이다. 뼈아픈 고통의 세월과 사무엘을 품에 안고 젖먹이며 기도하던 뿌듯한 은총의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한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놀랍도록 깊어졌다. 한나의 이야기는 한나의 눈물에서 시작된다. 그러고 한나의 노래에서 끝이 난다. 한나의 찬양기도는 하나님의 강렬한 상호작용 속에서 영위되는 어떤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위 같은 거대한 현실들, 흔히 우리를 두렵게 하는 운명, 정치적인 압제, 경제의 피폐, 군사적 위협, 반역적 테러 행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임신하고 낳고 비치면서 이 진리를 터득한 후 이를 지극히 아름다운 노래로 옮겼다.
1절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한나는 자신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기도하며 구했던 것, 너무나도 소중히 여겼던 것을 포기했을 때 기쁨이 넘쳐흘렀다. 여호와께로부터 아이를 얻던 날은 정말로 행복한 날이었다. 여호와께 아이를 바치던 날은 한층 더 행복한 날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는 이 노래의 서정적 색채를 더해주고 있다. ‘내 마음, 내 뿔, 나의 하나님, 내 입, 내 원수들, 나의 승리’ 등 강렬한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한 기도는 이윽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궤도에 오른다.
2-3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본문은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해서 얻은 아들, 기적적으로 임신한 어린 아들을 여호와께 바치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상황이 이보다 개인적이고, 이보다 더 사적이고, 이보다 더 직접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기도는 곧장 한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아이 사무엘로부터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에게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우리의 기도는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예컨대 헌신할 때나 세례받을 때 통상 감상주의로 흐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나는 자신의 그 기이한 임신과 사랑스런 아들에 대해 기도하며 노래하지 않고, 비견할데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에 대해 노래하며 기도한다.
4-5절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강자와 약자,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 자식을 많이 낳은 자와 임신을 못하던 자의 위상이 서로 역전된다. 어떤 것도 현 상태 그대로 존재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리는 세상에서 주변의 어떤 것도 영구 고착화되지 않는다.
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주권은 가능성의 최극단을 포함하는 선까지 분명하게 확대된다. 인간 생존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을 떠나서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와 행위는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의 양극을 포용하고 있다. 이어서 틀별한 관점이 도입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의이 행위는 대개 내포적, 수용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제는 패배자의 시각으로부터 하나님의 행위가 명시된다. 8절상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한나도 그처럼 일으키심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1:9절을 보면 ‘한나가 일어났다’는 구절이 나온다. 2:8절의 일으킴과 같은 동사지만 주체가 하나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신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은 성경 전반에 등장하는 주제로서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때 절정에 달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불평 가운데, ‘역사는 승자의 시작에서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잃은자, 패배자, 소외자의 이야기를 말하러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역사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성경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 있는 것 가운데 많은 부분이 짓밟힌 자, 냉대당하는 자의 시각으로부터 기록되었다. 지극히 광범위한 방면에서 ‘낮춤 당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 가난한 자들, 소외자들, 착취당하는 자들은 실상 ‘일으키심’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그런 기적을 목도할 수 았는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나의 노래에서 어떤 음성을 들을 것이다.
나아가 정하고 돕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이 모든 행위를 어떤 확고한 토대가 뒷받침되며 떠받들고 있다. 8절하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창조는 구원 사역이 수행될 수 있도록 견실한 토대를 제공한다. 이 기도에서 노래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사적들은 오늘 여기에 있다가 내일 사라져 버리는 어떤 전시행사, 밤사이 없어지는 모종의 사업이 아니다. 구원은 피조 세계 전체의 뒷받침을 받는다. ‘땅의 기둥들’이라는 거대한 이미지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그 배후와 저변에서 어떤 지속적인 신뢰감을 제공하고 있다.
한나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두절은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과 범세계적인 심판을 포괄적으로 넓은 각도에서 그린 다음, 한가지 세부적인 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하나님이 택할 사람(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을 부각시키고 있다. 9-10절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기름 부음을 받은’은 이 노래의 마지막 단어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결짓는 말이 아니라 무언가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낱말을 보며 우리는 장차 올 일을 기대하게 된다. 히브리어로 이 용어는 ‘메시야’이다. 곧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군주적 통치와 구원 역사를 대행하기 위해 따로 구별되고 그에 관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보통은 왕)이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이다.
한나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앞에 생명을 바침으로서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삶을 얻었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뜻대로 일생을 사는 영혼의 참 평안도 누리게 되었다. 한나는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심을 자기 인생에서 체험했다. 또한 한나는 민족의 형편도 틀림없이 역전시키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겨레의 소망을 찾게 되었다. 100년후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해 이루어질 다윗 왕국과 멀리 1000년 후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메시야 왕국까지 내다보며 예언자적 시를 읊었다. 한나의 노래는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낭송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한나의 노래를 읊조리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되새겼을 것이다. 눅 1:46절 이하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가 얼마나 한나의 노래와 비슷한가를 보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한 여인을 통해 혼란스러운 시대를 바로잡는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기독교이 2천년 역사의 가장 어두운 위기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여인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루터의 아내 캐티, 웨슬리의 어머니 요한나 등이 그러하며, 어느 시대 어느 하늘 아래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자기 심정을 토해내는 여인들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먼저 한나에게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고, 그 기도를 들으신 후에야 사무엘을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문제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존 웨슬리가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계획을 두고 친히 일하시는데, 왜 반드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걸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로 삼으시는 은총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땅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일 뿐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한나같이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여인들의 기도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이 시대에는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여인들이 많을지 모르나,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센스를 가진 여자, 만군의 여호와께 무릎꿇는 여자,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를 쓰는 여자가 얼마나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인지 모른다. (20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