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삶을 가꾸는 일이라기에 / 고혜숙
나는 강진에서 사는 ‘목포댁’이다. 퇴직 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걷고 싶어지는 그런 동네에서 살고 싶었다. 하여, 찾아든 곳이 여기 월하리다. 3년 전에 이사를 왔지만 아직은 남악을 오가면서 산다. 귀촌 2년 차에 접어들고 보니. 이제 강진 사람으로 살아야지 싶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의외로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많았다. 1년 과정의 독서대학이 먼저 눈에 띄었다. 청자의 고장인지라 도자기 만들기반도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몇 조금 못갔다. 올 해 들어 다시 강좌 하나를 신청했다. '어반 스케치'라니 우리집이 들어간 풍경 정도는 그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우리집을 그리지 못했다.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으나 뜻대로 안되는 것을 어쩌랴.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지. 이것 저것 정리하고 나니 일상이 한결 단정해졌다. 독서모임 <코스모스>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2018년 5월 4일이었던가? “《코스모스》를 읽고 나면 못읽을 책이 없대요.” 선미가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볼까?”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눈여겨 봤던 사람들 네 명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 코스모스를 함께 읽어 볼 생각 없냐고.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는 답을 보내왔다.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합류했다. <코스모스>라는 이름으로 매주 금요일 도서관에서 여덟 명이 공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아홉 권의 책을 읽었다. 생각 나누기에 초점을 맞춘 터라 한 권을 다 읽기까지 1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별에서 온 그대'가 결코 은유가 아니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자연을 이루는 모든 환경세계에 빚지고 있구나. 나를 둘러싼 타자는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는 시간이다. 작년 10월 23일에 읽기 시작했던 《축의 시대》를 마침내 다 끝냈다. 9.11 테러에 충격을 받은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을 파헤친 책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축의 시대 현자들이 말하는 황금률은 대체로 비슷했다. 영성과 자비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나에게 영성이라는 단어는 늘 종교, 특히 기독교와 연관된 것이었다.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이제 나는 '공감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로 정리한다. 더불어 잘 살고 싶다면 자비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이제는 조금 더 깊이 책 속으로, 나아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독서모임 안에서 뱅뱅 돌던 나 자신을 바깥세계로 내던져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일상의 글쓰기>를 등록하고야 말았다.
무자비하게 더웠던 여름 내내, 왜 글을 써야 하는가를 나 자신에게 묻고 설득하려 애썼다. 사실 2,3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글쓰기 관련 책을 읽고 강연도 찾아서 듣곤 했다. 항상 뭔가 써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제공한 글쓰기 관련 프로그램을 찾아 가기도 했다. 언제나 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웠다. 포기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다시는 글쓰기에 마음 두지 않으리라. 그러다가 작년에 르뽀작가 은유의 강의를 들으러 해남에 갔다. 다만 좋아하는 작가라서 청중의 숫자라도 채워서 힘을 보태고 싶었을 뿐이다. '감히 쓰고 싶어지면 어쩌지?' 마음 한 켠에서 올라오는 걱정을 모른 척 했다. 늘 소외당하고 있는, 아픈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은유의 마음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글쓰기의 힘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친필 사인을 받았다. "자기 언어를 찾아서"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왜 나는 자꾸만 쓰고 싶은 지 모르겠다고 도반들에게 하소연 하기 시작한 것이. 세상에는 이미 좋은 글들이 차고 넘치는데 어쩌자고 그런 생각이 자꾸만 올라오는 지. 그러다가 《바가바트 기타》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요가 중 '행위의 요가'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쓴다는 행위 자체보다 그 결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시 물었다. 쓴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 읽기의 완성은 쓰기라거나, 수행의 한 방법이라는 이야기야 자주 듣는다. 어떤 이는 말한다. 타자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에게 다가가면 자비심이 샘솟게 된다고. 글쓰기는 그런 것을 지향한다고. '과연 그럴까? 어쨌거나, 글은 쓰고 볼 일이구나.'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다시 펼쳤다. "사람의 삶을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글을 쓰게 한다." 나에게 글 쓸 용기를 준 문장이다.
지난 8월은 너무나 덥고 길었다. 월하의 정원도 몸살을 앓았다. 어서 9월이 와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글쓰기를 시작해 보겠다는 내마음이 변하게 될까봐. 나는 문을 두드렸고, 이제 그 문지방을 넘어가고 있다. 글쓰기가 삶을 가꾸는 일이라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