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 바라보는 믿음
2021. 11. 24(주일낮예배) 마태복음 14:24-32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 모자의 가격이 얼마나 되어 보이는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는 120개의 모자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모자는 20여개 있고, 대부분 박물관에 소장되어져 있어서 개인이 소장할 수 없는 모자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마렝고전투에서 썼던 이 모자는 모나코의 국왕이 개인소장하고 있었는데, 왕궁보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매에 내어 놓았다. 그래서 하림의 김홍국 회장이 26억을 주고 사게 되었다. 이 모자의 예상가격은 6억 정도였는데, 김홍국회장이 26억이라는 큰 돈을 주고 나폴레옹의 모자를 산 이유는 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는 도전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사옥을 지은 김홍국회장은 나폴레옹의 모자를 전시하여서 회사 내에 도전정신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폴레옹은 전쟁 때에 왜 모자를 썼겠는가? 나폴레옹은 외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장군답게 크고 장대한 신체를 가졌으면 전쟁중의 군사들이 자신을 잘 찾을 수 있겠지만, 외소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 두려워 떠는 병사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큰 모자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을 출발하여 에돔땅으로 우회하려 하자 마음이 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먹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가게 하였다. 그렇게 여기저기에서 사람이 죽어갈 때 백성은 모세에게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용서를 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이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그것을 보라(민 21:9)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장대에 놋으로 만든 뱀을 달았던 것처럼 당신이 높이 들려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끄러운 십자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달리신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가?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유대인 추방, 수송, 학살의 전문가였다. 처음에는 독일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일을 하였던 아이히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하자 이제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대인 15만 가량을 추방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히만의 공적은 진급되어 독일이 점령한 모든 지역의 유대인 강제이주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렇게 유대인 추방과 학살 전문가가 된 아이히만은 1942년 1월 20일 반제회의를 통하여 유대인 수용소 이주와 집단학살에 대한 계획을 세워서 600만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랬던 아이히만은 독일이 패전한 후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지 15년이 지난 1960년 5월 11일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스라엘 요원에 의하여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때 아이히만은 독일 변호사를 통하여 자신이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잘못되었지만, 그것은 명령에 의한 수행이었다고 자신을 변론하였지만, 1961년 12월 1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아이히만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과 자신과 같이 단순히 도구였던 사람들을 구분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사면요청이 받아드려지지 않아 1962년 6월 1일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아마 아이히만은 군인이 명령에 복종한 죄로 사형에 처하는 것은 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재판을 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바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나치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아이히만이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성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성실한 아히만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죄이다. 아무 생각없이 명령이기 때문에 나는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죄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만큼 심각한 것이 바른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려서 당신의 구원을 보이신 그 예수님을 보지 않는 것은 죄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가 있은 후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후에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데 그 밤에 광풍이 불어 제자들이 고통하게 된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북방 헐몬산의 찬 공기와 남쪽 아라비아의 열풍이 험한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갈릴리 호수에서 만나면 광풍으로 돌변하는데, 그 광풍이 불면 아무리 노련한 선원이라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수를 잘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내가 경험해 보았고, 또 사람들을 통하여 들은 바가 있다 할지라도 광풍이 부는 고통 가운데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구나! 하면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염려하므로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어느 선전을 보면 개그맨 이수근이 놀이동산의 키제한에 걸린 아이와 엄마앞에서 키클래오? 안클래오? 하는 질문을 하면 모두 예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염려한다고 키가 커지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염려와 근심은 잠을 자지 못하게 해서 키크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는가?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지 염려하지 말아야지 염려는 백해 무익해 라고 주문하듯이 말을 해도 염려를 떨쳐 버릴 수 없다. 이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광풍이는 바다에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그냥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고,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 하지 말자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울수록 더욱 강력하게 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두려움이 다가올수록 더욱 주를 바라보고 있는가? 본문을 좀 더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고 제안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던 베드로는 바람이 휙하고 불자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호수에 빠져들어가게 되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광풍부는 바다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바람이 휙하고 불자 그만 물에 빠져들어간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는가?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바람을 보고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는 지 31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바람을 보았기 때문이고, 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 한 것은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는가?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물 위를 걷고 있었다. 물 위를 걷는 일은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있다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가 바람이 부는 순간 믿음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도 이런 실패를 하고 있지 않는가? 재력가의 아버지, 귀족 집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부요하게 자란 소녀가 있었다. 그런데 2차 대전으로 아버지는 투옥되고 가세는 기울어서 전쟁통에 튤립뿌리로 끼니를 해결하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삶은 여전히 가난과 고통이었다. 그런데 여인은 그 고난의 시간을 이기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분명 전쟁은 끝났는데 내 인생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전쟁 후에 먹고살기 위해 안 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된 영화 단역 일을 하며 배우라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꿈이 생긴 이후로 호텔 접대원, 승무원, 담배 판매원까지 연기만 할 수 있다면 그 역할이 무엇이든 했지.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기회가 찾아왔단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한 영화감독이 신인인 나를 캐스팅한 거야. 그리곤 그 감독도,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지. 영화가 개봉하고 집 밖을 나섰는데 사람들이 날 보더니 놀라 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로마의 휴일, 오드리 헵번이다!" 그 순간 나를 지치고 힘들게 했던 내 전쟁도 끝이 났다. 아들아 삶은 항상 좌절을 주고 때론 네 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억해주겠니. 세상은 꿈을 좌절시킬만한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거기까지일 뿐, 다시 한번 해보려는 마음까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니 좌절할지라도 계속 꿈은 꾸어라. 인생은 변덕이 심해서 이유 없이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에겐, 꼭 한번 기회를 주니까.
오드리 햅번은 가난과 고통이 있었다. 그런데 오드리 햅번은 고통에 빠져 살지 않고 꿈과 희망을 보고 살았던 것이다. 그랬던 오드리 햅번은 아들에게 계속 꿈꾸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과 업적을 나열한다. 그래서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려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하고,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아들을 낳을 수 없었던 사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를 좋아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을 나열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 2-3절을 기록한다.
(히 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낙심하고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그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드리 햅번은 고통 가운데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다 낙심한 사람, 또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은 자들에게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이 낙심과 좌절과 고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