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이유
2022. 11. 20(추수감사주일) 히브리서 13:9-13
칼의 노래를 지은 작가 김훈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전쟁의 참혹함을 잘 아는 김훈 작가는 그의 작품 곳곳에 전쟁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김훈이 쓴 단편소설인 강산무진에도 전쟁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피난 내려와 일 군 피난민들의 숙소는 보란 듯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미군들이 쓰다가 버린 레이션 박스를 모아 만든 가건물이었습니다. 레이션 박스를 모아 압정으로 눌러 지었기에 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처참한 판잣집이 삶의 처소였던 그 시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레이션으로 엮은 판잣집이니 오죽 불에 약하겠습니까? 삽시간에 화마가 마을 전체를 삼켰습니다. 단 한가지의 가재도구를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간 화재가 진압된 뒤에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어머니가 형제들과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이들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집터에 돌아와 울부짖는 아들딸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동네를 보지 말고 저 달을 쳐다 보거라 라고
레이션 박스(ration box)는 미군 보급품을 담은 박스를 말한다. 피난민들은 보급품 박스를 주워서 압정으로 고정하여 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재도구 몇 개를 두고 살았는데, 불이 나서 집과 가재도구가 다 타 버린 것이다. 보급품 박스로 지은 집이니 얼마나 불이 잘탔겠는가? 삽시간에 모든 것이 다 타 버리고, 집터로 돌아와 아이도 울고, 엄마도 울었다. 그때 엄마가 아이들에게 불탄 동네를 보지 말고, 저 달을 보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엄마는 왜 아이들에게 달을 보라고 하였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이다. 전통적으로 히브리서의 기자는 사도 바울로 여기고 있지만, 정확한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는 정확한 독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①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대 개종자들, ②믿음에 복종하게 된 제사장의 무리, ③예루살렘 멸망 이후 교회와 회당 사이에 발생한 분리와 적대감을 극복하려는 기독교인들이라고 한다. 아마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과 심한 박해로 인하여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던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려 하였다. 그러한 때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므로 예수를 확신하도록 한 것이다. 박해로 인하여 왜 예수를 믿어야 하지? 교회가 뭐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상태의 사람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소개한다.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기록한 히브리서 기자는 제일 마지막에 구원받은 성도의 실제적인 삶을 이야기 한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읽기 바란다.
(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의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화려한 악기와 함께 고함치며 찬송하는 것을 찬송의 제사라 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찬송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호세아서는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질 것을 예언한다.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칼에 넘어지고, 아이가 부서뜨려지고,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호 13:16)고 말씀한다. 그런데 그 고통 가운데 의지하였던 앗수르와 말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주이십니다고 부르짖으라 한다. 이것이 입술의 열매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 입술의 열매가 나온다. 이 입술의 열매는 박해와 고통가운데 자신의 억울함에 고통하기보다 하나님만이 구원이십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만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술의 열매에 곡조를 붙인 것이 찬송의 제사인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제안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16절도 읽어보기 바란다.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절한 행동을 말한다. 그리고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은 타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자신의 돈과 시간과 정성을 다 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이같은 제사라고 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찬양의 제사는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십니다고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한다면 이같은 제사는 이제 그 고백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가운데 나의 어려움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아픔을 보고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흔들리는 형제들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내용이다.
왜, 어떻게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또 이같은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뇌물과 선물의 차이에 대하여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에 대한상공회의소가 회원기업들에게 제공한 경영윤리 가이드북에 기록된 내용이 있었다.
금품을 받은 후 잠이 잘 오면 선물이고, 잠이 안오면 뇌물입니다. 또 언론에 보도되어 문제가 될 것같으면 뇌물이고, 그렇지 않으면 선물입니다. 그리고 현직을 떠난 후에도 문제가 안되면 선물이고, 그렇지 않으면 뇌물입니다.
금품을 받았을 때 선물이 될 수도 있고, 뇌물이 될 수도 있는데, 그 기준은 잠이 잘오느냐?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잠과 문제가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저는 선물과 뇌물의 기준을 바라는 것으로 해서 정의 해 보았다.
보상을 바라면 뇌물이고, 감사의 표현이면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인가? 뇌물인가?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면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는 행동이라면 그것은 뇌물인 것이다. <옆의 분에게 질문/ 집사님의 신앙은 뇌물입니까? 선물입니까?>
유대인의 5대 제사 중에 속죄제라는 제사가 있다. 죄용서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쳐지는 속죄제는 제사를 드린 후 그 제물은 성문 밖으로 가지고 가서 불태웠다. 다른 제사는 일부는 제사장이 먹고, 일부는 불태웠지만 속죄제만큼은 모든 제물을 다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 장소는 예루살렘 안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가 성문 안에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래서 출세하기 위하여 성문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또 성공하려면 성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성문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삶이 형통하던지 아니면 박해 가운데 있던지 언제나 성문 밖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찬양의 제사, 이같은 제사를 어떻게 드릴 수 있는가?. 성문 안의 부귀영화와 성공을 바라보는 자는 결코 이같은 제사를 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문 밖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이십니다는 고백과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결코 어리석은 삶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기 때문이다(14절).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며,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2022년은 코로나에서 자유로운 일상을 되찾는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자유가 주어지는 순간부터 고물가, 고금리, 고유가라는 3고 현상이 우리의 삶을 억누르고 있다. 작년까지 코로나가 내 삶에 자유를 빼앗아 갔다면 올 해는 3고 현상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간 것이다. 누구 말처럼 월급과 아이들 성적빼고 물가는 다 올랐고, 거기에 금리까지 올랐으니 서민들의 생활고는 극에 달했다고 할 정도이다.
이러한 사회현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이 감사할 것이 있는가? 초파일에 절에 가면 연등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 아래 기도제목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가족건강, 자녀의 합격, 취업, 결혼, 그리고 사업에 대한 내용이다. 그래서 가족이 건강하면 감사하고,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면 감사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감사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가족이 건강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고, 또 자녀의 취업에 어려움이 있어도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본향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연단받고 수고하는 순례자의 길을 걸어서 그 끝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가?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70이 넘은 밥순덕 할머니의 감사글을 읽어드리고 싶다.
1976년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시골에 있던 작은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서울에 있는 공장으로 이직을 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 와서 방 하나 부엌도 바람이 들어오는 판자집이었다. 그때 우리가 살고 있는 달동네 한가운데 5층짜리 아파트가 있었다. 그때도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에서 아파트에 사는 성도 집에 심방을 가게 되었다. 그 집에 들어간 나는 너무 놀랐다. 수돗물을 틀면 더운물이 콸콸 나오고 반팔만 입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연탄불에 물을 데워서 쓰고 있었고,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어디서 볼일을 보아야 할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양변기인데, 처음 보는 것이어서 사용방법을 몰랐다. <중략>
그날 집에 와서 초라한 우리 집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이 때는 아이가 둘이 되어도 방을 구하기 힘들었고, 주인들이 얼마나 눈치를 주는 지 아이들은 울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방이 4개, 욕실이 2개나 있고 돌아보니 먹을 것이 지천에 깔려 있다. 내가 먹기 싫어서 안먹는 것이다.
그러면 밥순덕 할머니는 감사하며 살았겠는가? 밥순덕할머니는 이제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글을 이렇게 썼다. 저도 밥순덕 할머니와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이제 없는 것, 부족한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남이 가지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가졌으니 날마다 감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