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부에서 보는 미혹한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5)
2) 아깔라까:akālika
법의 무시간성은 보통 인연 상속, 혹은 어떤 조건과 그에 따른 결과의 발생은 간단없이 즉각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진리의 초시간성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구절이 연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시간을 초월하여 그렇게 작동하는 원리라는 표현일
수도 있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여래들이 출현하든 말든 이 원리(다뚜:dhātu)는 사물의
지속성, 결정성, 상호 조건 성으로 확립되어 있다. 여래는 이것을 온전히 깨닫고, 통달한 뒤 설명하여
가르치고, 천명하여 확립하고, 열어 분석하고 분명하게 한다.
보라! 비구들이여,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경전 어디에서도
아깔라까:‘akālika’라는 단어가 ‘초시간(超時間)’의 의미로 쓰인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조심스럽다.
이것을 다만 ‘법의 즉시성(卽時性)’으로 이해한다면 전술한 산딧티까:‘sandiṭṭhika’와 연관시켜
금생을 더욱 강조한다고도 볼 수 있다.
3) 에히빳시까:ehipassika
불법(佛法)은 갖출 것을 제대로 갖췄고 청정하기 때문에 ‘와서 이 법을 보라!(에히:ehi 빳사:passa
이망:imaṃ 담망:dhammaṃ)’고 권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시켜 《대열반경》의 언급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난다, 승가(僧伽)가 내게서 더 기대하는 게 무엇인가? 이미 나는 안과
밖을 가르지 않고 법을 설했다. 여래의 가르침 가운데 ‘스승의 움켜진 손(아까리야-무티:
ācariya-muṭṭhi)’ 따위는 없다.” 특별한 누군가를 위해 비밀스런 법을 따로 떼어 감춰 두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밀교(密敎), 염화시중(拈華示衆) 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활짝 열어 다 보여 주었으니
스스로 따져 보고, 감당할 수 있을 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그저 믿고 수용하라고
강요하기는커녕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먼저 슬기롭게 시험하고 검증하라고 충고하신 분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저런 경전을 다 외우더라도 그 가르침의 의미를 지혜로(판냐:paññā)
점검하지 않는다. 지혜로 점검하지 않은 법은 명백해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고 말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법을 익혔을 뿐이어서 외운 법의 취지를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잘못 받아들인 법은
오래오래 불행과 고통을 겪게 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잘못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면 불자의 신심(信心,삿다:saddhā)이란 붓다의 가르침이어서 그냥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렇게 실천하면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
신념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오빠나이까:opanayika
위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법이 열반을 향한 가이드라는 것이다. 또한 제시된 목표로서의 법, 즉 해탈
열반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취할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법은 목표이면서 동시에 길이요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5) 빳까땅:paccattaṁ 웨디땁보:veditabbo 윈뉴히:viñūhi
불법(佛法)은 ‘슬기로운 자 스스로 실증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이며, 동시에 ‘그 이해에
어긋남이 없이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숭고한 이상이라도 그것이 여기 이 자리에
구현되어 이웃과 더불어 누릴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림의 떡, 무덤 속에 든 동전에 불과하다. 붓다의
가르침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바른 지견이며, 그러한 세계관의 실현, 깨달음의 실천에 관한
것이라면 머릿속에만 있는 지식이나 말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은 빠알리 경전에서 ‘제대로 알았음’을 의미하는 샹까카로타:‘sacchikaroti’ 같은 단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세 단어의 합성, 샹-카히-까로타:‘sa-akkhi-karoti’는 우선 ‘제 눈으로 직접
보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체험하다’ ‘깨닫다’ ‘실현하다’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작증(作證)’ ‘자작증(自作證)’ ‘자신작증(自身作證)이라는 한역(漢譯) 역시 생생한 자기 체험과
그러한 체험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언하면, 여기서의 이해와 그렇게 생긴 지식은 항상 거기에 맞는 실천을 전제로 한 앎을 말한다.
따라서 깨달음은 오늘 이 자리에 실천으로 보여지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방의 테라와다(Theravāda) 불법(佛法)도 들이 사용하고 있는 빠알리 니까야(Pāli Nikāya)가
불설(佛說)을 비교적 잘 보전하고 있다는 것은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빠알리어가 바로
고타마 붓다께서 사용했던 언어고, 그러니 오직 빠알리 니까야만이 정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율장 《소품(출라박가:Cullavagga)》에 전하는 가사를 보면 자명해질 것이다. 바라문
출신 형제 비구들(야메루:Yamelu 앤& 테쿠라:Tekula)이 붓다께 다가가 예를 올리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출신 지역, 가문, 카스트가 다른 사람들이 출가하여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각각 자기네 방언을 씀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말씀을 베다 언어
(찬도:chando)로 바꿔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붓다께서 심히 꾸짖어 나무라셨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나 아직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꾸짖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붓다의 가르침을 베다 언어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그리하면 ‘돌낄타:
dukkaṭa(돌길라:突吉羅, 악작:惡作)’를 범한 것이다. 각기 자신의 방언으로(샹까야;sakāya
나루탓야:niruttiyā) 붓다의 가르침을 익힐 것을 허락하노라!”
이 단순히 고타마 붓다의 베다 언어(산스끄리뜨)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하거나, 빠알리 니까야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앞뒤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을 어떤 특정 언어로 고착시켜 정전(正典)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에 ‘익히다’로 옮긴 단어 팔라야뿌나타:‘pariyapuṇati’는 사실 ’암기’한다는 말이고, 그렇게
외운 내용은 ‘암송’되었을 것이다. 여러 방언으로 암송되던 가르침이 몇 차례의 결집을 통하여
승가의 대다수가 사용하던 언어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챙겨야 할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배우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는 고타마 붓다의 열린 사고와
실천이다. 나아가 번역의 당위를 주장할 수 있는 전거(典據)가 된다.
세상만사 변하게 마련이다(아닛짜:aniccā 상다:sabbe 상카라:saṅkhārā). 불법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무상과 연기의 원리야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수용하고
실천하는 불법이 고타마 붓다의 본래 메시지의 깊이와 무게에서 동일한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빠알리 경전 역시 이 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고, 전혀 다른 문화 배경과 고유의
문자와 언어 전통을 가진 옛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불법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외래 사상을
수용하는 고대 중국인들이 상당부분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정과 함께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감도 함께 작용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한역 경전이나 중국인들의 수행이 불법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다수의 교종(敎宗)과 율종(律宗)의 부단한 활동은 그 내용에 있어 무상, 무아,
공, 연기의 바른 이해와 거기에 따르는 개인적 사회적 적용과 실천에 관한 집단 지성의
고뇌이자 결실인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변화한 것이 선종이다. 이것이 오직 불법 내부의 일로
그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가와 도가, 유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키우고 때로는 깎아
다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선종은 정교하고 치밀한 교학과 도덕적 바탕에서
제 고유의 모습과 색깔을 가지고 부화한 자유분방한 나비요, 중국 불법(佛法)의 꽃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