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지라도♡
성경: 히브리서 11장 6절
찬송: 338, 249, 370, 279, 19
설교: 이 경준 목사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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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를 다닐 때였습니다. 형편상 학업을 잠시 쉬고 고깃배를 탔었습니다. 먼바다까지 나가서 조업하는 배였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까지 나갔었습니다.
한번 나가면 보름 정도 있었는데,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오전에는 쾌청하던 하늘이 오후가 되자 비를 머금은 구름과 바람이 불더니 저녁 무렵에는 폭풍으로 변해서 4~5미터의 파도가 배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타고 있던 배는 70톤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배이기 때문에 내리치는 파도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같이 있던 선원들은 파도가 배를 때릴 때마다 이 벽에도 부딪히고 또 반대편으로 밀려가 저쪽 벽에도 부딪히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육지로 돌아갈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배의 엔진이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캄캄해진 바다에서 동력을 잃은 배는 몰아치는 파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선될 듯이 파도에 따라 휘청이고 있을 때 죽음을 예감해서일까요? 온몸이 경직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성난 파도는 잠잠해지지를 않았고, 깊은 밤이 되기까지 생명을 포기한 채, 배에 차오르는 물을 퍼내고 있을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표류할 때부터 엔진을 고쳐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던 선장님이 배의 엔진을 살려놓은 것입니다.
배에는 불이 들어오게 되었고 파도를 헤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했었던 선원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진 고난 끝에 항구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때는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손길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삶의 위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어려움이 인생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평온한 날들은 찰나에 지나가 버리고 금방 또 인생의 폭풍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풍은 예고가 없기도 하지만 끝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때를 만나면 우리들의 작은 삶의 둥지는 처참하게 부서져 깨어지기도 하지만, 더는 둥지를 틀지 못할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고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와 같은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눈물 속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가족들과 함께 극단의 선택을 하고 있다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얼마나 살아가기가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더라면 그 처절한 길을 가지는 않았을 터인데 견디다 못해 택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걸어 온 인생길이 그랬습니다. 잠시 깃들었다 떠나버린 행복을 다시 잡아 보려고 몸부림친 것뿐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양파껍질을 까는 것 같다고들 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까도 까도 그 매운맛은 여전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헌금도 없이 지난 10년의 사역을 이끌어 올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악명 높았던 헐레스코스타라는 지방에는 6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된 감옥이 있었습니다. 나치들은 유대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으로 잡아 와서 모진 고문을 가하다가 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위젤’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죽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나는 원고요 그는 피고가 될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처하게 된 비참한 현실을 통탄하며 원고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죽음의 현장에는 피 맺힌 절규가 가득했었던 것입니다. 수 없는 유대인들이 죄 없이 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습니까?”라는 말들을 무수히 되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유대인들이 죽어갔던 그 수용소를 탈환하고 수색하다가 외진 벽의 한구석에 희미하게 쓰인 글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어느 그리스도인이 쓴 찬송가의 한 구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 하네, 두루말이로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글이었습니다. 저주와 지옥의 현장에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글귀를 발견한 그들은 그 벽 아랫면에 있는 글을 보고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라고요.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현장, 지옥의 절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신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던 그 어느 그리스도인의 글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평안할 때만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극한 고통을 당할 때도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며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지금 온갖 고난 속에 있고,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순금을 원석에서 추출할 때는 용광로에 엄청난 열을 가해서 녹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순금과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그런 용광로와 같은 시험을 이겨내는 과정을 거침으로 고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크고 작은 고난들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즐비하게 널려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깊이와 크기가 너무도 커서 우리의 믿음으로 버티기에는 벅차기도 하지만, 그럴지라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결국 생명까지 버려야 할 지경에 처할지라도 결코 버리지도 잃지도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이시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고통이 겨우 지나가자 극심한 경제난이 찾아와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시기만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견디고 이겨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울 때나 평안할 때나
혹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를 돕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승리합시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11: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날씨와 같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폭풍과 같이 몰려오는 공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불어오는 봄바람 같은 행복감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는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 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숨도 쉴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든, 행복감으로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 있든 그 모든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하셨기에 감사합니다.
바라옵기는 이 모든 시간들을 우리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앞으로 남겨진 우리의 모든 날들과 함께 하시어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성령의 능력과 권능으로 함께 하셔서 풍성한 열매 맺는 삶과 사역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인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잘하였다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되게 하소서!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며 주께 기도하오니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축복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올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