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강제 체결
러일전쟁(1904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영일동맹 (1905년 8월),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등을 통해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은 이에 앞서 한일의정서(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일제의 충고를 허용한다는 내용)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시작했으며, 한일의정서의 시행세칙을 내세우며 토지 점령 수용, 군사행동 등을 단행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9일 인천에 상륙하고 다음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사전에 오오베와 초오미라는 장사꾼을 통해 외부대신 이지용에게는 1만 엔을 주어 매수하고 군부 대신 이근택을 협박하여 일본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 히카루는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 이용익을 납치하여 유람을 시킨다며 일본으로 압송하고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 진위대 4연대장 길영수를 서울에서 추방하고 감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 하야시는 일본군을 이끈 이노우에와 같이 경운궁에 들어와 매수했던 이지용과 일본군의 한반도 내 주둔과 사용을 허가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1904년 8월 22일에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재정고문인 메가타 다노타로와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두어 노골적으로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만주에서 계속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 열강으로부터의 동의를 얻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허용하는 대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인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02년 1차 영일동맹에서 약속하였던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없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할 것을 동의받았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지배의 걸림돌이었던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배제시킨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한반도 침략 프로젝트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은 1905년 11월 추밀원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 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이 행사하는 내용의 조약 체결에 나섰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인 10일 고종을 알현하여 '동양평화를 위해서 일본대사의 지휘를 받으라'는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지만 고종은 거절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5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다시 고종을 알현하여 협약안을 보여주면서 조약 체결을 강요했지만 역시 거부되었다.
한편 당일 고종은 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일본 사절단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육군중장 이노우에 요시토모부터 해군 군의관 오카다 코가네마루까지 모두 65명이었다.(1905년 11월 15일 고종실록)
다음날인 16일 이토는 자신이 머물던 손탁호텔로 내각 대신들을 불러들여 조약 체결을 하도록 회유를 하지만 대신들은 거부하고 돌아갔다.
같은 시각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으나 역시 거부되었다.
그러자 다음날인 17일 아침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0,000명을 동원해 경운궁 주변으로 배치하여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대한제국 측을 압박했다.
그리고 오전 11시에 주한일본공사관으로 대신들을 불러들여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토는 3시간에 걸쳐 협박과 회유를 했으나 대신들이 거절하자 오후 2시에 일본 헌병의 감시를 붙여 경운궁에서 재소집시켜 회의를 하도록 한다.
오후 3시경에 경운궁에서 열린 어전회의 중 이토가 다시 고종에게 결심을 받아내기 위해 알현을 청했지만 고종은 인후염이 있다고 하며 거절하고 자리를 피했다.
이어진 각료회의에서 일본공사 하야시가 대신들을 협박했으나 찬성하는 이 한 명 없이 부결되고 일본 측 요구를 거절한다는 합의도 보았다.
그러자 일본은 경운궁 내부에도 일본군을 진입시켜 건물 구석구석에 배치시켰다.
한편 각료회의를 연기하라는 고종의 어명을 받고 이토에게 전달하러 가던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잡아 가두어 회의 연기를 무마시켰다.
또 외부에 대기 중인 일본군이 포를 경운궁으로 조준시켰다.
오후 8시가 되자 이토는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일본군을 회의장 안까지 진입시킨 뒤 자신이 각료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고종이 각료회의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말을 했다며 대신들을 회유한 뒤 결정은 다수결로 하자고 하며 각료 개개인의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학부대신 이완용이 처음으로 찬성의 뜻을 말했다.
'일본의 요구는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감정이 충돌하기 전에 원만히 타협하는 한편 한국의 지위를 보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라고 찬성하자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도 여기에 동조했다.
오후 11시경 이같은 사태를 더 이상 참지 못한 한규설은 회의장을 뛰쳐나가 고종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감금되었다.
3시간이 지나도 한규설이 돌아오지 않자 각료들은 한규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날을 넘겨 18일이 되고 그동안 반대하던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조약문 수정을 전제로 찬성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은 황제의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책임회피성 애매한 발언을 하면서 찬성해 5명의 과반수 찬성을 했다.
조약 날인은 18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찬성한 5명은 을사오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정된 조약문은
'조약의 기간은 한국의 부강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전문과 통감은 한국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황실의 존엄함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국새와 외부대신의 도장이 있어야 할 조약 날인에 국새는 찾을 수 없어 찍히지 않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