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8 주일설교
고통의 때에 성도가 사는 법
디모데후서 3:1~5
1851년에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오자 각자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고슴도치들은 깜짝 놀라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다시 너무 춥고 외로워 죽을 것 같았습니다. 고슴도치들은 추위와 외로움, 가시의 통증 사이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슴도치 딜레마는 가족 관계와 각급 학교 동창, 직장 동료, 사업파트너는 물론이고 함께 천국까지 가겠다고 모인 신앙의 공동체에서도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교인답지 못한 모습을 보고 실망한 세상 사람들은 화가 나서 말합니다. “저 사람들이 가는 천국에는 가고 싶지 않다.” 충분히 이해되는 말입니다. 때로 교인들이 불신자보다 더 못된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가 믿는 즉시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분으로는 의인이나 수준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거룩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쉽게 말해 지금 ‘공사중’입니다.
일찍이 존 칼빈과 루터파 학자들,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은 불신자가 구원받아 거룩해지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데 아홉 단계는 “소명(부르심)-중생(거듭남)-회심-믿음(신앙)-칭의-양자-성화-성도의 견인-영화”입니다. 첫 번째 글자만 따면 “소-중-회-믿-칭-양-성-견-영”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서정 가운데 일곱 번째, 성화의 단계를 밝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화’라는 것이 사람마다 차이가 심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화의 진도가 너무 느려요. 심지어 집사, 권사, 장로 등 중직자가 되고 나서 도로 퇴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비밀인데요(소문내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고 나서 성화가 퇴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중직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서 선화가 퇴보할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온 교회가 흔들리고 많은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지요. 그래서 사탄은 목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것도 유명한 목사, 대형교회 목사일수록 대왕 마귀가 덤빕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리 행복한교회가 더 성장하고 최광희 목사가 유명해지면 긴장감을 가지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동역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살고 여러분의 영혼이 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기, 희망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구원의 서정 여덟 번째 단계는 ‘성도의 견인’인데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반드시 천국까지 이끌어 주신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흔들릴지언정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요한복음 6장과 10장과 17장에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경인에 이어 구원의 서정 아홉 번째 단계는 “영화”(榮化)입니다. 성화의 과정이 빠르든지 느리든지 이렇게 살다가 주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혹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영화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영화(榮化)는 영어로 Glorification입니다.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
우리 하나님은 고집이 굉장히 세십니다. 하나님의 고집을 성경적으로 작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시면 아무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반드시 영화롭게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아직 죄인인 우리에게 벌써 의인이라고 부르셨습다. 그것을 영어로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등병에게 별 네 개를 미리 달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리바리한 신병에게 사성장군 계급장을 단 모습, 그게 바로 성도들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어깨와 다른 신자의 어깨에 달린 별 네 개를 보시고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이 속히 성화하지 않는 것은 목사가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처럼 위대한 분이 말씀을 가르쳤을 때도 미성숙한 교인이 있었고, 영지주의자 이단이 등장했고, 이단의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더 사납고 세상은 더 어지러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1절에 “고통하는 때”는 헬라어로 카이로이 칼레포이(καιροὶ χαλεποί)인데 어렵고, 악하고 곤란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 후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더 악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을 많이 만나 보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자랑하는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남을 비방하는 사람들, 부모를 거역하는 사람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 무정한 사람들, 화해하지 않는 사람들, 중상모략하는 사람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나운 사람들, 선한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배신하는 사람들, 무모한 사람들,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 경건의 흉내만 내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우리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교회 다니는 교인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그렇게 실망한 분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 그게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분은 의인이지만, 수준은 아직 죄인이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영화롭게 변하지 않은 성화 단계여서 그렇습니다.
둘째, 그 같은 사람들에게서 돌아서세요. 이 말은 예수님의 말이고 바울의 말입니다. 주님은 바울의 입을 통해, 목사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니까 참 실망스럽지. 그러니까 너라도 그러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너는 택함 받은 백성이거든.”
셋째,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이든지 택함받은 사람이고,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면, 주님이 끝까지 이끌어 주실 것이며, 마지막 순간에 다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다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란 먹고 살기 힘든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하는 때란 경건하게 살기 힘든 시대, 주님을 섬기기 힘든 시대를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살기 힘든 시대를 말합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고난이 있는 시대의 성도들을 오히려 더욱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보다 서머나교회가 훨씬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초대교회의 박해와 종교개혁 시대에 박해를 받은 분들은 죽어가면서도 신앙고백을 포기하지 않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풍요롭고 편안한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가 어렵고 환경이 나쁠 때 믿음이 더 좋았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볼 때 잘사는 선진국일수록 사람들은 더욱 불경건합니다. 이것이 말세의 증상입니다.
말세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그 증상은 더욱 심해져서 지금은 말세지말(末世之末), 말세 중의 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을 지키기 더욱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은 “너는 이것을 알라”라고 시작합니다. 이 말은 중요한 말을 할 테니 잘 들으라는 뜻입니다. 이미 듣고 있는데 더잘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모든 성경 가운데 이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라고 시작해서 말세에 경건을 지키기 매우 곤란한 때가 오는데 19가지 악한 사람들의 모습을 나열한 후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돌아서야 하는데, 방법이 무엇입니까? 비결이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 저라고 무슨 뾰죽한 수가 있을까요? 저도 똑같은 인간인데 저만 경건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방법도 없이 요구만 하는 무지막지한 주인이 아닙니다. 정답은 14절에 나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15절에서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거든요. 16절은 말합니다. 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해 줍니다. 모든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십니다.
성경은 지혜입니다. 성경은 능력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성경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생명이고 말씀은 성도에게 생명을 줍니다. 생명이 있는 자는 주변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펄 속에 사는 미꾸라지 배 속에 펄이 없습니다. 모래 속에 사는 조개 몸속에 모래가 없습니다. 죽은 조개만 속에 모래가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 몸속에 염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오염과 주변의 염분까지 배출하고 깨끗하게 사는 힘, 그것이 바로 생명의 힘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주변의 오염을 배출하고 영양분만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 있는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말세의 더러운 상황에 물들지 말고, 그 같은 사람들에게서 돌아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개혁주의자입니다.
성도는 염세주의자가 아닙니다. 산에 가서 집짓고 살지 않습니다. 성도는 동화주의자도 아닙니다. 세상이 굴러가는대로 똑같이 살지 않습니다. 성도는 내가 주변을 변화시키는 개혁주의자입니다. 살아있는 성도 여러분은 주변 환경과 주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 때문에 더 경건한 세상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고 성령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고통의 시대에 성도가 사는 법”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불경건한 시대에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입니다. 오염을 배출하고 주변을 경건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성도가 사는 법입니다. 그러기 위한 비결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꾼, 주님의 용사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결심과 헌신을 잘 담고 있는 찬송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어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
나는 주의 군사 되어 충성을 맹세하여
내가 승리하기까지 주은혜로 싸우리
주님의 용사된 내게 주의 일 맡기소서
같이 찬송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