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자리가 뒤숭숭했습니다. 집안에 가구들이 빼곡 차 있어서 비좁은 공간이 답답해보였습니다. 몸을 비스듬히 틀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니 거긴 더했습니다. 그러고는 깨어났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집안 곳곳을 채운 잡동사니들이 거슬렸습니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곳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습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놔두자니 짐스럽던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이 후련했습니다.
서랍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거실 수납장을 여니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날 잡아서 정리 해야겠거니 하고 넣어둔 것들이 많았습니다. 내 집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참신한 물건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비좁고 캄캄한 서랍 속에서 주인이 불러 주기만을 바라던 잡동사니들입니다. 어떤 것은 너무 작아서 손가락 끝으로 잡아서 작은 상자에 담았습니다. 클립이나 압정 같은 것부터 언제 누구에게 받았는지 모를 상본들이 한 움큼이나 있었습니다. 서랍 두 개를 정리하다보니 하루가 또 흘렀습니다.
주방과 안방 서랍까지 합하면 총 15개, 꼬박 열흘이 걸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하루 만에 치워버렸을 겁니다. 한 번에 여러 일에 집중하며 중요한 일들을 하면서 습관이 되어 버린 거지요. 워낙 분주하기도 했지만, 성격상 일을 남겨두거나 미루는 것을 불편해하는 겁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속도감 있게 처리하던 방송작가로서의 습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열흘 동안, 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에 집중하며 행복했습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빨리 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아닌데 서두를 거 뭐 있나 싶었지요. 어릴 적, 마당에서 소꿉놀이하는 것 같은 정서적 안정감도 맛보았습니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데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발밑의 작음과 평범함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과거의 저는 뭔가 특별하고 큰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매여서, 왠지 커 보이거나 특별하거나, 있어 보이는 것들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서랍 하나를 열 때마다,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들이 절로 나뉘어졌습니다. 너무 잘 둔 덕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20단짜리 묵주가 작은 주머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의 귀한 넥타이핀이 잡동사니 속에서 나왔습니다. 100여권의 책을 버리던 중, 책 안에서 20만원 비자금 봉투가 출몰했습니다. 땡 잡았습니다. 오래전, 지인 수녀님이 써주신 손 카드가 나왔는데 ‘작은 가난’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가정 형편마저 어려울 때, 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런 소중한 것들이 어찌 작고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의 서랍에도 이렇듯 작은 존재들이 숨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작은 길의 성녀 소화 데레사께서는,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사람에게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작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빠져 나갈 수 있지요. 큰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들을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고, 어려움이 생기면 심사숙고하며 기도하거나 자신의 덕행으로 모든 것을 쉽게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아주 작은 사람들은 큰 사람들과 똑같이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리지외의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께 드리는 9일기도 첫째 날, 작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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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