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조암 안내문. 정선군에서 최근 동학 사적지에 대한 안내문을 만들어 세우고 있다. >
적조암에서 종교적 성찰
해월은 적조암(寂照庵) 49일 기도를 통해서 또 한 단계 종교적으로 성장했다.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함백산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적조암에서 해월과 강수, 전성문, 김해성 등 네 명은 목청껏 주문을 외워도 잡아갈 사람이 없었다. 늘 숨죽이며 지내야만했던 해월은 마음을 놓고 주문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적조암의 스님 철수좌가 해월 일행의 주문 소리에 매혹돼 한참 동안 방 앞을 떠나지 못했다고 하니 해월 일행의 공부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도원기서>에는 적조암에서의 종교 체험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수련을 시작한지) 5~7일에 이르러 선생(해월을 가리킴)은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한 선관(仙官)이 나타나 소매에 봉황(鳳凰) 여덟 마리를 넣어가지고 와서 주면서 말하기를 이 여덟 봉황새를 받아 그 주인을 전해주라고 하였다. 선생은 봉황 세 마리는 자신이 품고 다섯 마리는 그냥 새장에 넣어두고는 홀연히 깨어나니 꿈이었다. 강수와 전성문이 꿈 이야기를 듣고 각각 봉황 한 마리를 원했다. 선생은 후에 반드시 주인이 있을 것이니 지금 어찌 임의로 하겠느냐고 했다.(<도원기서, 임신년조>)
해월은 주문 수행과 부도(符圖)를 그리며 위와 같은 신비한 종교 체험을 했다. 10월 15일에 시작한 기도는 12월 5일에 끝났다. 강시(降詩)도 깊은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비 체험의 하나다. 해월은 주지 철수좌의 배려로 49일간의 주문 수행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철수좌와 허물없이 지내게 된 해월이 주변에 지낼만한 곳이 있느냐고 물자 스님은 단양(丹陽) 도솔봉(兜率峰) 아래 지낼만한 곳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해월이 적조암에서 내려온 직후 수운의 부인 박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정선 싸내로 가서 시신을 가매장했다.
해월은 영월에서 영춘의 노루목으로 이사 온 박용걸의 집으로 가서 1874년을 맞았다. 해월이 2월 초에 철수좌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려고 옷을 두 벌 지어 적조암으로 가니 스님은 병들어 누워 있었다. 해월 일행이 떠난 직후 병을 얻은 철수좌는 해월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다. 해월은 정암사의 스님들과 철수좌의 다비(茶毘)를 한 후 김연국 형제에게 철수좌가 안내한 단양 도솔봉 아래를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이들은 도솔봉 아래인 단양 대강면 절골[寺洞]로 가서 머물만한 곳을 알아보고 돌아왔다.
해월은 1874년 4월초에 단양의 절골로 이사했다. 1871년 3월 영양 일월산에서 도망친 해월은 3년 만에 정착할 곳을 찾은 셈이다. 해월의 집이 있었던 곳은 절골의 안들이었다. 절골의 안쪽으로는 풍기장(?基場)으로 통하는 묘적봉(妙寂峰) 고갯길이 있어 이 동네 사람들은 이 길로 풍기장을 다녔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강 방면으로 조금 내려가면 예천(醴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있다. 절골은 단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골이었지만 교통로가 잘 발달돼 있어서 해월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해월이 김연순과 절골로 들어오자 김병내와 홍순일도 이곳으로 이사 와서 함께 지냈다.
<수운의 둘째딸 최완의 가족사진(1916년). 사진 가운데 부인이 수운의 둘째딸 최완이다. 1916년 환갑 즈음에 찍은 사진이라고 가족들이 사진에 적어 놓았다. >
단양으로 피신
단양은 일찍이 수운 시기에 동학이 전해진 곳이었다. 민사엽이 단양접주로 활동했으나 그의 사후 명맥만 유지했다. 해월은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 단양 가산 정기현의 집에 잠시 숨어 있었고 이후 단양 대강 정석현의 집에 숨어 있다가 영월로 도피했기 때문에 단양은 해월에게 낯익은 곳이었다. 해월은 3년간의 힘든 도피 생활 끝에 단양의 절골에 정착했다. 이듬해인 1875년 절골의 옆 마을인 송두둑으로 이사한 해월은 1884년 여름 관의 지목이 심해져 익산 사자암으로 피신할 때까지 약 10년간을 이곳에서 은거했다.
해월이 정석현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했는데 이필제가 문경에서 변란을 기도하다 붙잡히자 동학에 대한 지목이 다시 일어났다. 해월은 정석현의 집에서 급히 피신하느라 가족을 피신시킬 틈도 없이 헤어졌다. 단양의 교졸들은 이때 해월의 부인과 딸들을 잡아갔다. 해월이 손씨 부인과 헤어진 후 3년간 수차 찾아보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어 제자들은 손씨 부인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해 해월에게 다시 결혼할 것을 권했다. 제자 가운데 권명하가 홀몸으로 있는 인척인 안동 김씨를 소개해서 날을 잡아 예를 올렸다.
절골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해월에게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었다. 스승인 수운의 둘째아들이 사망했다는 부고가 날아들었다. 1875년 1월 22일 수운의 둘째 아들 세청(世淸)이 영월의 소미원에서 급사했다. 수운의 큰 아들 세정은 양양 관아에서 장살 당했고 수운의 부인 박씨가 영양실조로 사망한 후 유일하게 수운의 대를 잇고 있던 세청마저 급사하자 수운의 집안은 대가 끊기게 됐고 유족은 이제 딸들만 남게 되었다. 수운의 큰 딸은 시집을 가서 찾을 길이 없어졌고 둘째딸 최완은 인제군 아전인 허찬과 결혼했다. 허찬은 이후 동학에 입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셋째 딸과 넷째 딸은 어려서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수운 가족의 사망으로 동학 교단은 해월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수운이 죽은 후 부인과 아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려던 교도들이 잠잠해져 동학 교단은 자연스레 해월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조직으로 정비됐다. 관의 단속도 느슨해지자 절골로 도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절골 안들의 집이 비좁아 이듬해인 1875년 2월에 절골과 샘골 사이에 있는 송두둑에 큰 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 송두둑 해월의 집은 절골이 있는 장정리에서 1881년 <용담유사>를 간행한 샘골로 올라가는 초엽의 길목 왼쪽 산록 위에 있었다. 해월이 떠난 후에도 남아있었던 이 집은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유생들이 불을 질러버렸다. 지금은 사과밭으로 변해 이곳이 동학의 사적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송두둑 해월의 집은 해월 시기 두 번째 도소가 있었던 동학의 중요한 사적지로 복원되어야 마땅하다.
<절골[사동] 마을 안내석. 단양 대강면 장정리에 있는 절골은 해월이 1874년 적조암 철수좌의 권유로 이사한 곳이다. 해월은 절골의 안들에 정착해 충청도와 강원도를 중심으로 동학 재건에 나섰다. >
제례의식을 통한 교단 활성화 시도
해월은 1875년 8월 보름 추석에 제자들과 송두둑에서 모여 새 출발을 다짐하는 제례를 지냈다. 송두둑에서 안정을 찾은 해월은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궤멸하다시피 한 경상도 일대의 교인들을 찾아 나섰다. 9월초 해월은 강수, 전성문과 함께 단양을 출발해 문경, 상주, 선산을 거쳐 신령으로 향했다. 신령에서 수운이 임명한 신령접주 하치욱을 만난 후 경주 용담으로 향했다. 용담에서 해월은 수운의 조카 최맹윤(崔孟胤)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수운이 살아있을 때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라 손을 붙잡고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맹윤이 종제인 세청과 세정에 대해 묻자 해월은 차마 사망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정선에 잘 있다고만 전했다. 해월은 맹윤과 다음을 기약하고 경주로 들어와 최경화를 만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청하로 가서 이군강, 이준덕을 만나고 달성으로 가서 강수의 아들 강위경과 상봉을 지켜본 후 단양으로 돌아왔다.
경상도를 둘러본 해월은 열악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경상도에 몇몇 도인들이 살아 있어 그나마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조직이 거의 붕괴돼 있었다. 또한 경상도에는 여전히 지목이 심해 적극적인 활동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영남행을 통해 해월은 수운의 순도 이후 생사를 몰랐던 몇몇 도인들을 확인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해월은 동학 교단 재건의 길이 충청도와 강원도를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월은 동학 교단을 재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집단종교행위를 구상했다. 집단종교행위를 통해 도인들 간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도인들의 신념을 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해월은 1875년 10월 18일에 도인들에게 송두둑으로 집결하라는 통문(通文)을 보냈다. 해월이 이때 시도한 집단종교의식은 전통적인 천제(天祭)의식을 차용했다. 복식은 선도(仙道)의 복제를 모방한 예복(禮服)을 마련하고 의식을 위해 향촉(香燭)을 밝혀 성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식순은 유도식(儒道式)을 참고해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의 헌작(獻酌)과 축문(祝文)을 지어 읽었다.
10월로 집단제례 날짜를 정한 이유는 첫째, 추수가 끝난 시점이라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전통적인 천제(天祭)를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등 전통 제례가 10월에 시행됐던 것을 따랐다. 셋째, 민간의 고사(告祀)가 10월에 있었는데 이것도 참고했다. 해월은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제례를 동학의식으로 개조해 집단종교행위를 시행했다.
해월은 집단종교의식을 시행하기에 앞서 교단의 조직도 정비해 강수를 도차주(道次主)로 임명했다. 도차주(道次主)는 수운이 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해 후계자로 삼은 것에서 유래했다. 해월은 수운 시기부터 함께 일하던 강수를 도차주에 임명해 늘어나는 교인의 관리와 제례의식의 진행을 맡겼다. 강수는 학식이 깊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포용하는 능력이 있어 인망이 두터웠다. 해월은 신망이 두터웠던 그를 2인자로 삼아 교단의 조직을 체계화하고 제례 의식을 정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