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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 혹은 기사회생
이원우
한국소설가협회 이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국제PEN한국본부 이사-한국문인협회 문인복지위원-경기PEN운영위원-<문학과 비평> 운영이사-대한가수협회 정회원/소설집 <거기 나그네 방화 끝나는 곳> 등 4권-수필집 <죽어서 개가 될지라도> 등 15권-논픽션 1권-기타 2권/ KNN부산방송 문화대상-화쟁포럼 문화대상-<한국수필>청향문학상-경기PEN문학대상-<문예시대>문학대상-<표암문학>문학대상-부산수필대상-부산가톨릭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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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김서전트의 극성을 막을 수는 없다, 그는 추석을 전후하여 김 대령을 만나러 서울 행 지하철에 몸을 실을 각오인 것이다. 물론 무장을 단단히 해야겠지. 두말할 나위 없이 마스크는 필수이고 손 소독제도 지참한다. 그리고 손수건 등등,
김서전트(金Sergeant)? 그의 명함에 인쇄된 이름이다. 타인들이 마치 시비라도 하듯 왈가왈부한다는 자체가 난센스다. 행여 지나치면 그로부터 큰 원망이라도 들어야 하리라. 남의 사정을 그리도 못 알아줘야 직성이 풀리느냐는….
서전트! 물론 영어다, 우리말로는 하사(下士). 창군 이래 하사(일반 하사를 가리킴)야말로 가장 다양한 부침 혹은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는 성(姓)을 뺀 서전트만으로써도 친구나 지인 혹은 전우들에게 통한다. 하사 혹은 서전트!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명분으로 삼기에 족하다. 왜 서전트 쪽을 더 선호하느냐고? 세음절이라서 어감이 좋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전우야 잘 자라’ 등을 외국군인들 앞에서 부를 땐 영어 서전트가 설득력이 있어서다. 그는 가수이기도 하다.
그는 하사 모자를 두 개 갖고 있다. 하나는 그가 집을 나서기만 하면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 수 년 전 군수사령부(軍需司) 군악대 부사관으로부터 습득한 거다. 후자(後者), 그러니까 군악대 하사가 무심결에 놓고 간 것을, 김 대령에게 돌려주려는 것이다. 그건 특별한 상징의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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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경우가 더러 있다.
전쟁 때 일어난 사건 하나. 병사가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던 중이었단다. 마침 애국가 주악이 울리기에 따라 부르기 위해 일어서는 찰나, 적의 총탄이 사타구니 사이로 지나갔다. 애국가가 없었으면 그는 *알에 관통상을 입었으리라. 실화이든 아니든 듣는 이는 웃게 마련이다.
산적에 쫓긴 어느 남자 이야기.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쳤는데, 그 밑이 수심 깊은 웅덩이였다 치자. 물만 약간 먹었을 뿐, 그는 살아 날 수 있었고말고. 사극에 흔히 나오는 한 장면이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이 그런 경우에 어울리다마다.
이 두 개 사자성어 중 긴박함을 비교하는 데 약간 혼란을 겪는다. 어느 쪽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아마무승부! 고민하던 서전트는 차라리 ‘어금지금하다’는 형용사가 어울릴 듯하다는 판단을 방금 내렸다. 그래도 쓴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는지….
자, 뜸을 그만 들이고 서전트 자신의 기가 막힌 체험담을 소개하자. 듣는 이가 더러는 입을 모으리라. 우와,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서전트의 전직은 초등학교 교장이다. 그는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교육자였다는 세평을 들었다. 그는 교육과정에 식견이 부족하여 항상 헤맸다. 그로 말미암은 열등의식은 항상 그를 괴롭혔다. 해서 그는 울타리 바깥을 기웃거렸고, 가르치는 일과 상관없는 일종의 허영을 쫓아다니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내실이 아니라 외형을 추구했다고 표현하자. 그의 교육자 생활은 불행이었다 할밖에.
어느 해, 학교 안에서 한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사고가 발생했다. 수습을 하느라고 서전트와 모든 구성원은 노심초사했고, 교내의 모든 것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때 서전트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어 부르짖었으니,
“분위기를 한 번 쇄신시켜 보자. 부산경찰청 악단을 초청하여 학부모와 어린 이들, 교직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거야 나도 노래 한 곡 부르고….”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악대’ 이야긴 가끔씩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되곤 했으니까. <성경>에 있듯이 두드리면 열리게 된다고 했다. 뭐, 그런 정도였다 하자. 그런데 그가 평소에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맺어오고 있던, 정보과 백(白) 형사한테서 정보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부산광역시경찰청장이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백 형사는 경찰청장이 대민 지원 사업을 열심히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청장은 자기 자신이 색소폰에 입문한 지 몇 달 안 되지만, 어지간한 흘러간 옛 노래를 연주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한다나? 서전트도 덩달아 웃었다. 본래 색소폰에 입문하면 그러기 마련이지, 허허. 백 형사는 청장이 색소폰을 들고 경로당을 혼자서 찾는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서전트는 주임교사 회의를 소집하고 그 문제를 안건에 올렸다. 2주일 뒤 수요일을 ‘기방 없는 날’로 운영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설득 끝에, 모처럼 완전일치로 그러기로 결정을 보았다. 경찰악대가 오전 수업까지 연주를 해주면 그날 일과는 그걸로 마치고, 오후 클럽 활동은 생략하면 된다. 악대 대접은 근처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 하기로 하고!
서전트는 실로 오랜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산뜻한 행사 하나가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갖고 올 거란 생각에 그는 가슴이 희열로 벅차오름을 느꼈다.
아무튼 그는 오후 백 형사더러 교장실에 좀 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참, 서전트가 북구 문화예술인협회 회장 일을 보고 있어서, 전시회 등 행사장에서 만나왔었기 때문에 둘 사이엔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녹차를 한 잔 대접하고 나서, 서전트는 백 형사가 앉아 있는 가운데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을 경유, 쉽사리 청장에게 연결이 되었다. 서전트, 교육자로서의 능력은 별 볼일 없다고들 평가받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 이런 통화의 경우는 다르달 수밖에. 그는 상대가 경찰청장이라고 해서 굽신대거나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다. 그런 걸 두고 서전트더러 장점이자 결점이라고들 주위에서 쑥덕거리지 않던가? 청장은 단박에 좋다고 했다. 서전트는 다짐을 받았다.
“청장님,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저희 학교 어린이들이 1천 5백여 명입니 다. ‘가방 없는 날’은 청장님도 잘 아시지요?”
“그럼요. 저도 시간이 나면, 색소폰 들고 가서 저도 독주를 하고 싶습니다.”
내친김에 서전트는 경찰을 치켜세우는 추억담 하나도 들먹였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교감 시절이었다. 대저중학교 울타리에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내용이 ‘경축/ 대저중학교 ㅇ회 졸업 선배 ㅇㅇ 경찰서장 취임’이었다.
그러자 청장은 크게 웃더니,
“그러셨습니까? 경찰서장은 직급이 서기관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같지요. 그 현수막은 좀 지나친 것 같군요.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 승진 축하 현수막이 어 지럽게 걸려 있어야 맞지요.”
교내 사건의 수습 때문에 거의 파김치가 되어 지내오던 터였던 서전트였다. 경찰청장의 농담 아닌 농담 덕분에, 백 형사가 돌아간 뒤 적요(寂寥) 속에 빠져 있던 교장실에서 서전트는 맘 놓고 파안대소를 날릴 수 있었다.
그는 서둘렀다. 원안을 만들어 행정실장에게 건네주며, 감사패부터 만들라고 지시했다. 물론 대상자는 경찰청장이다. 두 명의 공군 5672부대장(준장)에게 증정한 감사패 원안을 참고로 해서….생색을 내고자 하는 그의 허영심도 한몫 거들었지만, 당일 청장이 직접 올 수도 있다는 기대 심리조차 남들이 나무랄 수 없는 일 아닌가?
나아가 북구 문화 예술인 협회 회원 여남은 명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북구청 출입 기자들도 마찬가지. 학부모들에게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했고. 그로써 그는 그날의 일정 소화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셈이다.
드디어 당일! 날씨는 유리처럼 쾌청했다. 드높은 하늘을 쳐다보며 서전트는 중얼거릴밖에. 아, 어린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내며 딸 둘도 덩달아 쾌재를 불렀고.
그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아내가 모는 승용차 안에서 호기롭게 휘파람을 날리기도 했다. 몇 달 만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연출하는 출근길이었다.
여덟 시를 조금 넘겼는데, 문화 예술인 협회 회원들이 두서넛이 교장실에 미리 와, 서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문화원장도 들어섰다. 녹차를 달여 대접하면서 환담을 나누고 있는 중, 교과 담당 교감이 황급히 다가오더니 하는 귀엣말이다. 어쩌지요? 교장 선생님, 오늘 경찰악대가 못 온다는데….
서전트는 까무러칠 듯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 무슨 말입니까?”
“경찰청장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청장님 이취임식이 있다는 겁니 다. 청장님이 거기 참석해야 하고, 경찰악대 또한 당연히 그리로 가야 한다는 군요.”
“그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철석같이 약 속해 놓고, 1천 5백 명 어린이들의 하루 일과를 송두리째 망치다니….”
“누가 아니랍니까? 어쩌면 좋을는지….”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기자들이 몇몇 온다 치자. 그들은 얼씨구나 싶어, 특종이라도 잡은 듯 설치다가,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보도할 게 아닌가? 경찰청장은 다음 인사 명령대로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서전트는 그게 아니다. 안 그래도 어린이 사망 사고 때문에 뒤숭숭하기만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경찰청장 비서실에다 전화를 내었다. 자리에 없단다, 청장이. 부아가 치밀어 오른 그는 전화기에다 대고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경찰청장, 나쁜 사람이잖아?”
“…….”
정말 눈앞이 캄캄하였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속수무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밖에.
그때였다.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59사단 군악대! 그가 연거푸 59사단에서 호국 문예심사위원장을 지낸 적이 있어서였다. 밑져야 본전이라 했으니, 거기 사단장한테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자.
호국 문예는 공모(公募)가 아니라 백일장 형식이어서 학생들이 직접 부대에 와서 현장에서 내 주는 제목에 따라 산문과 운문, 서예, 회화 등 부문으로 이루어진다. 해서 사단장과 두 번 환담을 나누었으니 모르는 사이가 아닌 터,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기분으로 사단장에게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그러면서 그는 혀를 찼다. 몇 년 전만 하여도 공군 5672부대에 부탁해서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쯧쯧. 거기엔 강상길 중사가 중심이 되어 20인조 정도의 자생 취미 군악연주반이 있었던 거다. 서전트가 십년 가까이 그 부대에서도 호국문예 심사 위원장을 맡아 왔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천하의 강상길 중사가 예편하고 나니 연주반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던 참이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사단장에게 연결이 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연민의 정이 묻어나는 소릴 건넸다. 그날 해운대구 정관 지방에 군악대가 연주 봉사를 하게 약속되어 있어 미안하다며 되레 사과를 했다. 덕장(德將)인 그의 인품에 감동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는 중,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교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교장실은 이미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하는 수 없었다. 교육청에 사정을 설명하고, 수습은 학교에서 하겠다며 자신감이 모자라는 어투로 얼버무렸다. 이쯤에서 혹자는 의문을 가지리라. 아이들 각각 자기 반에서 담임교사의 지도하에 공부하면 될 텐데 왜 그러냐는…. 모르는 말이다. ‘가방 없는 날’은 그렇게 간단하게 운영되는 게 아니다. 그때 그 경우처럼 전교생이 동시에 참여할 경우, 60학급 1,500여 명이 아무 다른 준비를 해 오지 않았으니 어떤 교육과정도 제대로 운영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죽으란 법이 없다 했듯이 그 전말을 이야기하면 이렇다. 실로 기적이다. 찰나에 좌우된 그건 눈물겹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고말고.
-3-
서전트가 절망의 늪에서 떠올린 건 뜻밖에도 군수사령부 군악대였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무슨 일이든지 일단 저지르는지 모른다. 고민할 여유조차 없던 서전트는 무턱대고 군수사령부 교환에다 다이얼을 돌렸다. 물론 군수사령부에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그러니 그야말로 그건 막무가내로 불특정다수 장병들에게 매달리는 형국과 진배없었다 하자.
“충성! 군수사령부 교환 이진환 일병입니다. 통신보안!”
“수고하네, 이 일병. 난 시내 명덕초등학교장일세. 자네한테 부탁이 있으니.”
“말씀하십시오, 교장 선생님!”
그는 속사포처럼 여태까지의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사령관(중장)을 좀 바꿔 달라고 했다. 병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병사의 말이다.
“교장 선생님, 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재학 중에 입대했습니다. 해서 교장 선생님 말씀을 좇아서 사령관님께 연결시켜 드리는 게 도리이겠습니다만, 제 재량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나중에 처벌을 받 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가? 이해하겠네, 자네 말을! 하지만 생각해 보게. 1천 5백여 명의 어린이 하루가 걸린 일이네. 다른 방법이 없을까?”
“…….”
“교장 선생님, 모험을 하는 기분으로 제가 담당 과장님실로 연결해 드리겠습 니다, 충성!”
이윽고 신호음이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다. 서너 번 그러는가 싶더니 상대방에서 수화기를 집어 드는 모양이다.
“충성! 군수사 행장과장 김 대령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북구 명덕초등학교장입니다. 오늘 저의 목이 달리느냐 떨어지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예순을 넘긴 이름 없는 교육자의 청을 들어 주시도록 간청합니다.”
“교장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간단명료하게 내용을 말씀하시지요.”
서전트는 다시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좀 전 교환병사에게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다 듣고 난 김 대령은 특유의 여유가 있는 군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서전트는 거의 죽을 맛이었다. 갑자기 허허 하는 웃음소리를 터뜨리더니 김 대령이하는 말이다.
“근데, 오늘이 저희 부대 창설 기념일입니다. 다른 일정이 없고 체육대회로 갈 음을 하기로 했습니다. 방금 기념식이 끝났습니다. 저는 전투복을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제 방에 잠시 들렀는데, 그 몇 분 사이에 교장 선생님이 전화를 하신 겁니다. 사정이 그럴진대, 제 담당 업무이기도 하니, 한 번 애써 보겠습 니다. 안중근 의사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 危授命)! 위태로울 때는 자기 목숨을 내 놓으라는 뜻 맞지요? 제게, 위기에 처 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으라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백퍼센트 제 재량은 물론 아닙니다.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서전트는 확신을 가졌다. 군수사령부 군악대는 반드시 온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주저 없이 난 사표를 낸다.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내게 없다.
교장실의 손님들도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환호도 터졌고말고. 그들도 군을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딱 40분이 지났을 무렵. 백차를 앞세우고 군수사령부 버스와 트럭 석 대가 교문으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학교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환호작약했다. 길길이 뛰는 인들 왜 없었을까?
여기서 잠깐. 솔직히 말해서 경찰악대와 군수사령부 악대는 차이가 난다. 군수사령부는 관현악이 아니라 관악인 것만으로도 비교 우위를 점하게 하는 요인이다. 어린이들도 경찰악대야 방송을 통해 수없이 보아왔지만, 군수사령부 군악대는 모두에게 그야말로 난생 처음이지 않는가!
이인호 소령(뒤에 특전사 군악대장으로 있다 예편)이 인솔 책임자였다. 절도 있고 균형 감각이 넘치는 군인이었다. 다른 대원들이 악기 점검을 하는 동안 잠시 그를 교장실로 오게 해서 서전트는 몇 번이나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가 말했다.
“교장 선생님,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행정실장님이 자신의 방에 옷 갈아입으 러 들어간 그 시간에 전화를 하셨으니….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찰나에 혀를 내두릅니다. 그리고 오히려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사령관님도 기뻐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제대 후 공군 5672부대 및 육군 53사단과 인연을 맺어 오면서 적잖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을 기점으로 난 군을 영원한 제 반려자로 여기리라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행사는 열 시에 시작하여 열두 시에 끝났다. 다양하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곡들을 언제 준비했는지, 감탄사가 절로 터지게 했다. 모처럼 한바탕 잔치 마당에 들어서 있는 느낌에 서전트는 빠져서 헤어날 줄 몰랐고말고. 학부모들이며 손님들인들 서전트와 어찌 다른 정서겠는가? 미리 주문해 둔 덕분에 중국집에서 배달해 온 자장면이며 탕수육, 군만두 등이 식거나 불어나 있지 않았다.
이튿날 조간신문 몇 군데서 크게 기사로 다뤄줬음은 물론이다. 서전트는 기적처럼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상당 기간 아니 오랜 세월, 서전트가 경찰관들을 얕잡아보는 버릇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소위 부산 경찰의 총수(總帥)라는 사람이 그런 참혹한 식언을 하다니 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경찰청장이 사과 전화했다 치면 문제는 달라졌겠지만.
몹쓸 병마는 서전트를 붙잡고 놓치질 않았다. 죽은 어린이의 담임교사는 아무 책임이 없는데, 그걸 빨리 처리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서전트의 모습에 화가나 심한 위염에 걸려 출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서전트는 맥박이 120회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공황장애의 습격에 당하기도 했다.
민사 재판도 끝나지 않아 좌불안석인 데다가 시 교육청에서조차 위자료와 구상권 문제까지 거론하는 것이었다. 그러구러 세월이 가다 보니 명예 퇴임하기조차 불가했다. 여섯 달 남기고 사표를 낸 경우는 부산시 교육청이 출범하고 나서 유례가 없다는 데에야 어쩌겠는가? 서전트, 죽지는 못할지언정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 괴롭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지옥 같은 여섯 달을 초주검으로 버텨내고 44년 만에 이윽고 그는 눈물을 뿌리며 교문을 나섰다. 정년퇴임을 한 거다.
-4-
다시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서전트가 그대로 머물러 있기에는 부산이라는 고장이 너무나 버거웠다. 또 다른 사고 하나를 겪었다. 상장조차 할 수 없는 크나큰….그 뒤로 몇 달, 차라리 목숨을 내 놓은 보다 못 한 삶을 영위하기도 했다는 게 맞는 말이리라. 마침내 그는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메고 딸이 사는 서울의 근교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아내와 함께였다. 그리고 몇 달.
운명처럼 그는 모부대(母部隊)-자기가 복무했었던 부대-를, 보이지 않는 어떤 주체의 이끌림에 의해 찾게 된다. 지금은 없어진 26사단. 사단장 양병희 소장, 그분 덕분에 서전트는 정말 행복한 예비역 하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는 안보 강사 겸 홍보 대사라는 직함(?)을 얻고 예하 부대에 뻔질나게 드나든다. 그런 그의 얼굴 표정에서 식구들은 비로소 안도감을 읽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꿈에도 그리던 김 대령의 전화번호를 알게 된 거다.
그날도 강연을 마치고 여단장 차에 편승해 와서, 사령부 간부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앉아 있었다. 두 명의 부사단장, 참모장, 여단장 등과 함께.
이윽고 사단장이 들어서는데 혼자가 아니다. 두서너 명의 민간인들과 함께였으니, 오히려 서전트는 그들에게 호기심이 갔다. 물론 그들도 헤드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러니까 소장과 대령 셋, 고참 중령 둘(일반 참모) 및 서전트, 민간인 등이 어울린 거다. 육군 사관학교 몇 기(期)가 어떻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그 민간인들이 잠시 나누고 있었다. 순간 그 옛날 서전트 그를 살려 준 김 대령이 얼핏 떠오르는 게 아닌가. 그는 사단장에게 물었다.
“혹시 김 대령님을 아시는 분 아십니까? 그를 찾습니다. 제가 교장 시절 그분 덕분에 죽을 목숨을 건진 적이 있습니다. 군수사령부가 부산에 있을 때, 거 기 근무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사단장은 40기인데, 동기 중에 그런 분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단장의 선배라는 한 민간인이 반응을 보이는 거다. 민간인이 입을 열기 전에 서전트는 덧붙였다. <국방일보> 에 한 미담의 주인공 김 대령을 소개하는 글을 썼었는데, 정작 본인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고. 대신 어느 교사가 그러더라고 했다.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것. 군수 사령부에 복무하는 자기 아들이 <국방일보>를 읽고 기뻐서 다이얼을 돌렸다고 . 그러자 아까 그 민간이
“양 장군은 모를 겁니다. 저희의 선배님 중 그런 분이 계십니다. 군수사령부 에 근무했다니 확실히 그분입니다. 그분은 군수사령부가 부대를 옮기면서도 거기 계속 근무하다가 제대했습니다.”
“아, 이럴 수가! 혹시 그분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는지요?”
“그럼요, 제 명함 여백에 적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서전트 그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전 군수사령부 행정과장 김 대령과 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가끔 전화나 카톡은 오갈 뿐 만나지를 못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추석이 어쩌면 그를 부둥켜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는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든다. 다만 ‘해후(邂逅)“는 아니다. 둘이서 여태 직접 만난 적은 없었으니까.
그날 군악대를 이끌고 왔었던 이인화 소령 소문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든다. 하사 모자는 이인화 소령으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래저래 서전트는 가슴이 벅차오를밖에. 해서 큰소리, 까짓 코로나! 뭐가 겁이나? 뜨거운 전우애가 있는데….
참 이 이야길 잊어서는 안 되겠다. 아직도 서전트의 경찰관들을 불신하는 마음이 그대로인지? 궁금하다는 농담을 친구로부터 가끔 듣는다. 그렇다면 그건 불행이고말고. 서전트는 그래 중얼거리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 경찰청장만 증오(?)의 대상이었지, 다른 공복(公僕)들은 아무도 내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손톱 끝만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일까지 겪었으니 이 또한 미담이라 우겨 적어서 보태자. 역시 큰 반전이다.
서전트는 국방홍보원을 줄기차게 드나들기도 했었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국방 TV와 국방 FM 방송 출연도 하고, <국방 일보> 편집에 참고 될 만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볼일을 보고 나면 걸어서 서울역까지 나온다.
서울 역 대합실에서 그는 하염없이 26사단 병사들을 기다리는 게 하나의 습관 아니 고집이었다. 불무리 마크를 단 병사들을 보면 붙잡고 커피도 사 주고 때로는 김밥도 대접했다. 심지어는 꽁무니를 빼지 않는 병사에겐 만 원짜리 두 장 정도를 지워 줘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틈을 봐서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하사 모자를 쓴 노병의 정성을 받아 줘야지, 기어이 도망치다시피 해? 그런 녀석이야말로 소위 관심 병사가 될 수밖에 없어!
그러다가 가톨릭 신자인 그가 만난 형제가 있었다. 광장에서 말이다. 누구냐고? 열여섯 살 아래인 노숙인이다.
서전트는 조그만 상을 하나 놓고서 그 위에 <성경>과 노트를 얹고 필사(筆寫)하는 노숙인의 모습에 반해서 그와 어깨를 겯게 된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개신교 신자라는 형제는, <성경> 필사를 네 번 반이나 했다는 게 아닌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돌아서 왔는데, 다음 토요일 광장에 갔더니 형제가 우는 상을 하고 술만 병째 마시고 있었다. 형제의 말을 들으니 서전트는 가슴이 아팠다.
노숙자라고 출입을 막아서는 식당에 억지로 들어가 마주보고 까닭을 물었다, 형제는 울상을 하고 며칠 전 <성경>과 필사 노트(네 번 반 한 것) 들을 모두 도둑맞았으니 살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서전트가 보기에 날씨는 추워지고 해서 이부자리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곁을 떠난, 생명과 다름없는 그것이 그에게 주는 상처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판단에 서전트는 형제를 우선 달랬다. <성경>과 노트부터 마련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한데 일주일 뒤에 광장에 가 봤더니 형제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노숙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사롭게 말을 건네면 그게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해서 서전트는 말없이 광장을 맴돌기만 했다. 시비로 발전할지도 모르는데, 그 많은 노숙인들에게 이름조차 모르는 형제를 찾는다는 하소연인들 하기 망설여질밖에.
그러던 중 잠시 건너편에 시선을 두다가 그가 발견한 것은 남대문 경찰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의 그 경찰청장에게 나쁜 감정을 완전 버리지 못한 그에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답답한 사람이 샘 판다고, 성큼성큼 그리로 발걸음을 했다. 주차장에 몇몇 경찰관들이 보이기에 그리로 다가가다 그는 젊은 경위를 불렀다. 경위는 하사 모자를 쓴 노병에게 깍듯이 경례를 올려붙였다. 서전트가 하는 말이다.
“귀관, 인상이 참 좋으이. 내가 사람을 찾네.”
“누구신지 말씀 하시지요."
“광장에 있던 노숙인 형제일세. 이 사람이야. 그리고 이건 그를 우리 <실버넷 뉴스>에 내가 그를 인터뷰해서 찍은 사진이고….<성경>을 네 반 반 필사했는 데 그걸 송두리째 잃어버렸다지 뭔가? 내가 오늘 그를 만나 소액이 든 금일 봉을 전하려 하네.”
“할아버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광장 끝에 파출소가 있거 든요. 거기에 가서 의논해 보시지요. 그렇다고 해서 거기 경찰관들도 수월하지 않을 겁니다. 요즘은 워낙 개인 정보 보호를 중히 여기니까요. 어쨌든 제가 안 내할 테니 같이 가시지요.”
백차에 타라는 걸 마다하고 서전트는 경위와 함께 걸어서 역전 파출소에 들어섰다. 대여섯 명의 경찰관들이 동시에 일어서서 친절하게 노병을 맞았다. 물론 경찰관들은 서로가 서로를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커피를 내 놓기에 서전트는 맛있게 마셨다. 하지만 그 형제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나서면 오히려 불화가 조장된다고 했던가? 대신 노숙자들의 일상이며 고통 등을 다 같이 이해하자며 도와주지 못하는 점을 사과했다.
대신 바로 앞의 무슨 ㅇㅇ 센타 비슷한 데를 소개해 주었다. 한데 거기 직원들은 뜻밖에도 퉁명스럽기만 했다. 화가 난 서전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일선 경찰관들은 저토록 친절한데, 저들은 뭐지?”
그러고 나서 다시 몇 달이 지났다. 한겨울에도 시위대가 광장을 채우고 해서 서전트는 현장에 올라가기 망설일밖에. 솔직히 말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겁부터 났다. 코로나로 말미암은 금족령 때문이지만 가고 싶다, 서울역 광장에.
그러던 그가 며칠 전부터 얼굴에 미소를 띠고 지낸다. 서모의 쌍둥이 손자가 나란히 순경에 임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아무리 서모의 아들이 낳은 녀석들이지만, 거긴 아버지의 피며 DNA가 섞이지 않았는가? 서울 역전 파출소와 남대문 경찰서의 경위와 역전 파출소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중얼거린다.
“사필귀정이야.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경찰관은 한 사람으로 족해. 잠깐! 그 경찰청장이란 ‘친구’와의 일도 이젠 그게 단순 과거지사로 치부하자.”
그 옛날 ‘나쁜 사람’이 ‘친구’로 바뀐 것만 해도 어딘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 살고 볼 일이란 농담이 실제론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느낌이다. 코로나가 물러간다는 전제로 제삼자로서 감히 진단한다. 강연의 외연을 넓혀 군과 경찰을 모두 아우르고 많은 젊은이들 앞에서 갖가지 체험담을 들려주고 싶다는 각오를 서전트 그가 갖고 있다고. 그가 앓았던 병도 다 나았으니 그가 모름지기 ‘구사일생’이니 ‘기사회생’을 두고두고 화두로 삼는 건 당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