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에다가 상당히 성공한 의사였고, 그 부인은 어디가도 인물이 뒤지지 않는 그런 매력 있는 여인이었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면, 불행할 이유가 조금도 없고 오히려 행복의 정상을 달려야 하는 그런 삶이었지만, 그 부부 사이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결혼초기에는 너무 많이 싸웠고, 지금은 이제 서로에게 대하여 애써 무관심한 채 겉으로만 멀쩡한 부부 연기를 하고 살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남편은 남편대로 삶을 사는 의미가 없고, 그저 있다면, 골프 치는 것 정도라고나 할까? 부인은 부인대로 때때로 절망적인 미움과 의심, 그리고 허영과 과시, 죄책감 이런 것들이 뒤범벅이 된 삶을 살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두 사람이 다 매우 성실해 보이는 교인이라는 것이다. 안수 집사 부부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실화이다. 약간 각색을 했지만…
세상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더욱 많다.
그 훌륭한 다윗은 왜 어느날 갑자기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범했을까?
섹스 스캔들을 때문에 추락한 미국의 텔레비젼 부흥사 지미 스왜거트(Jimmy Swaggart)나 짐 베이커(Jim Bakker)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은 사기꾼이었을까?
빈야드(Vineyard)의 다음 세대를 맡았던 목사가, 그 훌륭한 찬양을 많이 작곡한 그가 알코올 중독자였고, 포르노 무비 중독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더구나 은혜롭게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한 날 밤이면 더욱 심하게 술과 포르노에 빠져들었다는 것에 대하여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한다는 권사님 중에서 온통 사람들과 부딪히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평생을 성공적으로 목회한 목사님이 말년에 소유와 집착 때문에 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무슨 연유인가?이런 이야기를 열거하려면 수도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고 있는… 그리고 어렴풋이 그것이 상처라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일 어떤 병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정작 그 병의 원인도 그리고 치료법도, 심지어 병명조차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괴질’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상처는 일종의 괴질이었다.
나 자신이 수 십년 동안 그런 것에 의해 고통을 느끼고 삶에 있어서 불편함을 느꼈음에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를 살았다는 면에서 그렇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과정 중에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내적 치유 세미나를 해보면 더욱 실감하게 된다.
병이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가 “생물체의 전신 혹은 일부분에 생활 기능의 장애로 변화가 생겨 고통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때, 상처도 분명히 병의 범주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장애’ 와 ‘고통’이 상처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처의 치유는 목회와 복음 사역의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유를 위해서는 상처가 무엇인지, 그 원인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I. 내면이 중요합니다
처음에 내적 치유 세미나를 들을 때 강사인 이성훈 집사님이 특유의 어조로 지루할 만큼 여러 번 ‘내면이 중요한데, 우리는 내면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반복하고 반복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저 분이 정신과의사라서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애착과 홍보 때문에 저러는가 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적 치유 사역을 하면서 보니 상처의 치유를 위해 해야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바로 우리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의 삶의 질은 외적 환경보다는 내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도 사람들, 심지어 신앙인들조차 외적인 환경을 만들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질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내적인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목회하고 있는 이곳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비버리 힐스(Beverly Hills)나 말리부(Malibu)에 가면 어마 어마한 저택에 대단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가십(Gossip)을 취급하는 잡지이기는 하지만 그런 잡지에 등장하는 그들의 삶의 단면을 보면, 그들의 삶의 질이 한 두 칸의 작은 집에서 털털거리는 소형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서 건강한 내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질보다 결코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면이지 결코 외적 환경이 아니다.
둘째로 내적인 건강이야말로 진정한 건강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엡 3:14~16).
세기의 결혼이라고 했던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때 주어졌던 말씀이 바로 이 에베소서 말씀의 바로 뒤 이은 부분인 17절부터였다고 한다.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 그러나 정작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부분 말씀보다는 그 앞에 있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것!’ 겉은 멀쩡했으나 내면이 건강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참 비참한 결론을 내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외적 건강과 안녕에는 몹시 예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내면적 건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몸이 아프면 참 많이 고통스럽고, 삶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실이다(간혹 아픈 가운데에서도 큰 기쁨을 누리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하나의 착각이 자리잡게 된다. 그것은 몸이 건강하기만 하면 그 기쁨과 행복이 삶 가운데 오는 것으로…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은 우리를 매우 행복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또 한 그릇을 더 먹었을 때 행복이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다가 또 한 그릇을 더 먹으면 이제는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몸의 건강이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차지하는 비중은 부분적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내면의 건강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은 안다고 하는데도, 실제로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몸은 조금만 아파도 그것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면서도, 마음의 건강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건강은 내면적 건강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가훈처럼 액자를 해서 걸어 놓은 집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그렇게 해 놓고 바라보는 그 말씀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실 그 앞에 있는 12절 말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말씀과 함께 봐야 그 뜻이 정확해지는 말씀이다. 즉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을 다 바꾸실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보다는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그 방식을 택하신다. 성경 도처에 나오는 증거들을 읽어보면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주께서 네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서 2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주로 내면을 통해서이고, 또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중점이 마음을 고치는데 있었으므로(“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 사 61:1 ), 모든 목회적이고 영적인 관심과 적용이 우리의 내면으로 향해야 함은 당연하다.
II. 상처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나면, 그 다음에 풀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 내면을 건강하지 못하게 망가뜨리고 뒤틀리게 한 ‘상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알아야 치유를 하든지 할 것 아닌가?’라는 아주 상투적인 이유에서라도…
첫째,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상처’라는 말을 정확히 제대로 말하면, 그것은 ‘상처 난 감정’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을 지,정,의 세 부분으로 본다면, 그 가운데서 상처를 받는 부분은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정,의 가운데 가장 쉽게 다칠 수 있고, 또 가장 예민한 부분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살아가면서 감정에 상처를 안 받으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라는 것이 상처를 다 주고 받으며 살되, 그것을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적절하게 해소하고 아물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문제이다. 여기서 적절하게 해결이 안 되는 (혹은 안된) 상처란 그 상처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서 그것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이든지, 아니면 상처 위에 세워진 가치관이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내면이 그렇게 상처 가운데 자리를 잡은 경우,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되고 있는 경우 이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것은 주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처럼 태아 때에 받은 상처까지 포함해서… 어떤 버림받은 사건이나 관계, 환경, 언어를 통하여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주로 망각이나 부정, 투사 등의 방어기제로 부적절하게 덮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 그래서 고통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처의 가장 일반적인 전형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게 불우한 환경이나 부당한 상황에 있지 않았는데도 내면이 심히 허약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경우 대부분 어떤 사건이나 환경을 통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영향력으로 상처가 자리잡은 경우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줄 때 정말 순도 100%의 사랑만을 줄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상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달되는 것이고, 그것을 자녀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아 먹게 되기에 상한 감정이라는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보호에 의한 상처 이야기가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고, 유전적인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고, 심한 두려움을 가진 내면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과거가 지금 현실에 부적절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한가지, 현실적으로 상처를 너무 심하게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배신을 경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처리되지 않은 상처 가운데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지난 날의 부적절하게 처리된 상한 감정 위에 이것이 더해지면 그 고통은 더 엄청나겠지만…
둘째,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다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상처는 감정의 문 가운데 음부의 문(The Gates ofHades, 마 16:18)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까지에 보면 소위 낙원의 회복(Paradise Regaining)이라고 하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는 대단히 황당하고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기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평강’(Shalom)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일어난다면, 어느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일어날 것이다(천국은 원래 한 개인의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주의 말씀이 덮이면서, 그 미움과 적대감,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생각들, 느낌들, 바르지 않은 자기 평가, 이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바로잡아지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모습이 내면에 일어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상처가 치유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우리 가운데 주는 가장 큰 고통, 피해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 평강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평강’ 이라는 말을 ‘아무 느낌이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오히려 상처가 많은 경우 망각이나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해서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져서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이 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을 평강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셋째,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에게 상처가 전혀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상처가 많아 졌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책임을 결혼과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상한 감정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인데, 결혼 전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맺어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가 도망갈 수도 없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상처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 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러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은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한 삶의 의욕이고, 이것은 적절한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 내면에 느끼는 느낌이 평강(Shalom)인데 나는 이것을 ‘감동 있는 평강’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운 정의이지만, 바로 영적 능력이란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상처는 바로 이런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질병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에 의한 치유가 일어날 부분은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목회의 중점은 바로 이 부분에 모아져야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