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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사와 접두어 '여' 문제
정진명(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1.문제의 실마리
이제 활에 관한 글을 쓰다가 벼라별 글의 다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동안 국궁계에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의 나쁜 짓을 접하다보니, 국궁계 전체가 다 이런 혼란에 맞닥뜨려서, 결국은 날마다 걸어다니던 사람이 자신의 걸음걸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해보는 지경에 이른 것과 같다. 무심코 하는 것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는 바람에 자신의 무심코에 스스로 의구심을 갖고 움찔하는 상황이다.
이런 심리가 문제인 것은, '전통'에는 <무심코>의 작용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 '무심코'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뒤따르지 않으면 전통은 한 걸음마다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위기의 접점에 놓인 말이 '여무사'이다. 온깍지아카데미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거기서 여무사들 스스로 여무사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어느 분의 제보를 한 차례 맞닥뜨렸는데, 이런 따위까지 시시콜콜 설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찜찜한 채로 몇 년을 미루어왔고, 결국은 이 자리를 빌어서 얘기하는 셈이 되었다.
2.사회변화와 이름
우리 사회가 전통에 대한 혼란을 겪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일생 생활 속에서 갑자기 동시다발로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최근의 일이다. 특히 2017년 미투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여성 지위와 그들의 사회 활동과 관련된 행동 양식의 합의를 놓고 계속해서 공중파 저녁 9시 뉴스를 달구는 상황이다. 특히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오랜 세월 약자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처우와 대우, 나아가 그에 따른 명칭과 호칭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릇된 정보를 퍼뜨려,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무사의 문제가 바로 그렇다. 2019년 대한궁0협회의 지도자 연수에서 여무사는 부적절한 말이니 쓰면 안된다는 식의 궤변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그런 궤변을 한 강사가 했다고 해서, 그런 멍석을 깔아준 협회가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협회의 각종 연수는 활터에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온상 노릇을 하게 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식이면 활터와 협회는 상극의 관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결론은 간단해진다. 전통을 위해서라면 '협회가 죽어야 활터가 산다.'
한 발 더 나아가, 여무사들 자신이 여무사라는 말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다면 그것은 더더욱 문제이다. 이런 우려 때문에 사말은 "활터의 아름다운 호칭, 여무사"라는 논문까지 써서 굳이 발표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무사는 아름다운 전통 용어라는 것이다.
3.이름의 성격과 교직 사회의 구조 변화
이름이란 다른 개체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은 구별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철수'라면 이 세상에서 철수가 아닌 사람과 나를 구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름은 먼저 보편자가 아니라 특수한 개체에게 붙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말이 국어교육을 전공했고 평생을 국어 가르치며 살아온 이력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쪽에 대하는 어느 정도 확신과 지식이 있기 때문에 강조하는 사실이다.
예컨대 1970년대 학교 교사 중에서 남과 여의 비율은 80:20정도였다. 특히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여교사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학교에 가면 교무실에 여교사라고는 한둘, 많아야 서넛 정도였다. 이런 것이 1980년대 접어들면서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아지고, 그 첫 영역이 교사였으며, 초등학교는 여초 현상이 두드러졌다. 결국 1980년대에 이르면 군대 면제라는 혜택까지 주면서 초등학교 남자 교사를 구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여자가 남자보다 교무실에서 더 많아진 것은 대세가 되었다. 이것은 1990년대 접어들면서 중학교까지 확대되었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도 여교사 수가 더 우세한 상황이다.
1970~1980년대 교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가 여교사모임이었다. 친목 모임으로 학교마다 여교사 모임이 없는 학교가 없었다. 당연히 남교사 모임은 따로 없었다. 모였다 하면 남자가 훨씬 더 많으니 굳이 남교사 모임을 따로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교사 모임은, '여교사'를 비하하려는 모임이 아니다. 오히려 여교사의 권익을 보호하고 자신을 지키려는 차원의 모임 성격이 강하다. 직장내 소수가 다수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모임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성평등 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특히 여교사들 스스로 만든 것이기에 이것을 여성비하의 어떤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여교사 모임의 문제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서 붙은 '이름'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름은 필요성에 따르며 그 필요성은 사회 내의 기능과 역할에 따라 저절로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여교사 모임은 교직 내의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지키고 강조하여 그 조직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 하기 위해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성격에 따라 그 사회 내의 합의를 전제로 한 것이고, 그것은 비하나 존중의 차원이 아니라 기능의 차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름은 그 기능을 따른다. 비하나 존중의 차원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원래 이름이 붙은 것은 기능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비하나 존중으로 바꾸는 것은, 이름이 붙은 본래의 기능을 다른 차원의 성격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의 또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니 여교사라고 해서 '여'를 탓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2020년은 어떨까? 이제는 고등학교까지 여교사 수는 확대되어 오히려 그 반대로 남자 교사 수가 줄어들었다. 중학교에 가면 교직원 50명 중에서 남교사는 10명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여교사 모임은 어떨까? 대부분 사라졌거나, 있어도 이름만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두드러진다. 즉 남교사 모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가 소수로 존재 양상이 바뀌다 보니 그들만의 특수한 상황을 공유할 모임이 저절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여'의 경우처럼 비하나 존중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직은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런 단체에 쓰이는 '말'은, 즉 접두어는, 기능 중심으로 명명되기 때문에 차별은 그 다음에 이루어진다. 사실 여교사의 '여'도 기능으로 남아있지, 차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냥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인 것이다.
5.여무사 용어의 특수성과 본질
<여무사>의 '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활터에서 차지하는 숫자가 적기 때문에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들을 농락하거나 비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오히려 여무사를 대하는 활량들의 태도를 보면 '이 어려운 운동을 여자들도 하는구나!'하는 감탄과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미투 운동으로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까지 점검 받아야 하는 오늘날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사말이 집궁하여 해방 전후에 집궁한 구사들을 만나러 다니던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여무사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는, 비하의 차원이 아니었다. 정말 이 어려운 운동을 여자들도 하는구나 하는 것에 대한 감탄에 가까웠다. 그래서 저절로 옛날부터 여무사를 대접해주었고, 그 차원에서 '여무사'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온다.
이런 특수한 분위기 때문에 옛날에 하루 1순만 쏘아서 3순 경기를 3일에 마쳐야 하는 전국대회에서도 여무사들만은 특수성을 인정하여 하루만에 다 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요즘도 여무사들은 대회 도중에 한꺼번에 쏠 수 있도록 주최측에서 배려한다. 이런 배려는 여무사를 비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활터에서 그들의 존재가 무시당하지 않고 여자들도 남자와 동등하게 활을 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활터 문화의 평등성을 제도 안에서 보장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을 거꾸로 해석하면 안 된다. 전통은 남성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에게도 이렇게 당당하게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것이 '여무사'라는 말이고, 지금 활터에서 여무사들에게 대접해주는 '조건'이기도 하다. 굳이 그것을 여성 폄하의 시각으로 째려볼 게 아니다.
교직사회처럼, 활터에도 여무사들이 더 많아져서 남자가 극소수가 된다면, 자연스레 여무사라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지닌 속성과 본질 때문이다. 언어는 소수를 지칭하기 위해 먼저 발생하고, 그 발생이 사회로 적응하면서 기능에서 차별 차원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 차별이 좋은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 사회 안에서는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접해주려는 차원에서 좋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여무사가 그런 경우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활터에서 오랜 세월 여자들을 대접해주려고 하는 '여무사'라는 말을 이제 와서 정확하지도 않은 지식으로 접근하여 선배 한량들의 지난 세월까지 폄하하고 욕보일 필요는 없다.
6.무사와 여무사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무사'라는 말이다. 해방 전 집궁한 구사들과 대담을 해보면, 옛날에 활량들을 남무사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남무사', 또는 '무사'라고 불렀다는데, 이것은 당연히 '여무사'에 대한 대응어이기도 하고, 활터에서 활을 쏘는 사람들의 존재가 단순히 '활만' 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예도 하는 무인임을 나타내려는 뜻이다. 그러니 '여무사'는 부적절한 말이라는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근거도 없는 주장인가를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남자 한량을 무사라고 불렀다면, 여자 한량은 뭐라 부른단 말인가? '여무사'는 내력이 있는 말이다. 여성비하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을 대접해주려는 활터 사람들의 섬세한 배려에서 나온 말임을 그 짝인 무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1930년 12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리에서 벌어진 전 조선 궁술대회의 소식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수상자 명단에는 남무사와 여무사라는 표현을 썼다. 당시 신문 기사를 훑어보면 여무사라는 말은 너무나 많아서 예를 일일이 거들기도 귀찮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1960년대 신문에도 여무사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활쏘기가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던 시절에도 신문에 쓰이던 용어이니, 우리 사회가 여무사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 얼마나 광범위하고 일상화된 말이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글을 쓰느라고 인터넷에서 여무사를 검색해보니, 의외로 관련 기사나 자료가 많지 않다. '여궁사'로 검색을 하니, 오히려 자료가 더 많이 뜬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여무사와 여궁사의 사용 빈도가 갈라진다. 2010년 이전에는 여무사라는 말을 많이 쓰다가, 2010년 이후부터 여궁사라는 말이 많이 쓰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전국여무사회가 이름을 전국'여궁사'회로 바꾸면서 벌어진 일 같다. 접장을 보부상들이 쓰던 말이라며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궤변이 이 무렵에 나타났는데, 아마도 여무사도 이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문제는 여무사들 자신이 모임이름을 여궁사회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당사자들이 나서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을 버린 셈이니, 이걸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여궁사회의 주요 인사들도 여무사에 대한 이러한 궤변에 현혹된 것 같다. 여무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따로 전국여무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7.맺음말
접장과 여무사는 비슷한 말이다. 남자를 대접해주려고 하는 말이 '접장'이고, 여자를 대우해주려고 하는 말이 '여무사이다. 여무사더러 '접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보았는데,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접장이 꼭 남자에게만 붙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무사'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여자 활량에게 '접장'이라고 부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이다.
몇 백 년 내려온 이런 전통에 대해, 하필 '접장'이 보부상들이 쓰던 용어이니 활터에서 쓰면 안 된다고 딴지를 걸던 시기와 비슷하게 '여무사'에 대한 군말이 나온 것을 보면, 여무사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퍼뜨리는 사람과 접장 딴지꾼은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래저래 왜곡된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저지를 수 있는 해악을 또 한 번 보게 된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저지레는 하루 아침에 끝나지 않고 국궁계에 내내 분란의 불씨로 남아, 악의를 품은 누군가 건드리면 또 다시 매캐한 연기를 일으킨다.
여무사는, 우리 조상들이 여자 활량을 대접해주려고 만든 아름다운 말이다. 단순히 '활 쏘는 여자'를 뜻하는 '여궁사'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말이다. 여궁사는 그냥 활쏘는 사람일 뿐, 활터 전체로부터 받는 존중과 대접을 나타낼 수 없는 말이다. 어찌 보면 활터 문화의 정점에 꽃처럼 핀 아름다운 말이다.
사족 : 여성운동과 말
서지현 검사로 촉발된 미투 운동이 전사회로 번져가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예상대로 공중파였다. 여기저기 관련 인물들을 취재하여 보도를 하는 가운데, 눈쌀 찌푸려지는 일이 자주 눈에 띄었다. 평생 국어를 가르치며 살아온 사말에게는 우리 사회의 언어현상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거의 모든 분야 사회 운동가나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말장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먼저 눈에 띈다. 미투 운동이라고 해서 다를 게 아니다. 예컨대 어느 젊은 여성 운동가를 취재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부터 질타하고 나선다. 즉, 자궁은 '아들의 집'이라는 뜻이니 성 차별 발언이고, 따라서 '포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발언이 공중파를 타고 전국의 가정으로 전달된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 젊은 운동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런 부실한 지식을 갖춘 사람을 취재한 기자의 잘못이 사실 더 크다. 자궁의 <자>는 '아들 자'자가 아니라 이럴 때는 아기라는 뜻이다. 이런 식이면 공자의 <자>도 아들이란 말인가? 子는 원래 씨앗을 뜻하는 한자이다. 구기자, 오미자, 흑임자...... 그러니 자궁이란 '사람의 씨앗이 들어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애기집'이다. 언어학을 전공한 분들에게 한 번 전화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자신의 코딱지만한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부터 딴지를 걸면, 그것은 이미 약속된 언어체계를 흔드는 엉뚱한 짓을 한다. 제발 부탁이, 말 장난을 하기 전에 전국의 수만명이나 되는 국어학 전공자에게 자문을 구하기를, 모든 사회운동가들에게 제발 부탁드린다. 사회의 모순을 바꾸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열정은 크지만 경험이 적다. 그러니 경험이 많은 전문가 집단에 살짝 전화만 하면 자신의 열정이 저지를 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다. 언어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제발 말장난을 하려는 간교한 짓을 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디선가도 지적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무슨 일을 새로 하려고 하면 말장난부터 하는 이상한 짓을 곳곳에서 벌인다. 그리고 남의 말로 우리말을 대체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일로 귀결된다. 허긴 국민들을 탓할 것이 아니다. 국어학자들 스스로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을 탓할 것도 없는 일이다. 언어의 허영기가 온 나라에 넘쳐나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전에 '이빨'에 대한 사전의 편견에 대해서도 지적한 적 있지만, '자궁'의 경우도 똑같다. 90을 코앞에 둔 우리 어머니는 아직도 '아기집'이라고 한다. 전에 우리 집사람이 아이를 가져서 처가집에 갔다가 '집사람이 애가 섰다.'고 우리 어머니가 쓰던 말로 소식을 전했는데 우리 장인 어른이 웃으시더니 그럴 때는 '태가 들었다.' 말하는 거라며 굳이 지적을 하셨다. 우리 처가집은 안동 김 씨이고, 우리 어머니는 평강 채 씨이다. 둘 다 유력한 양반집 가문인데, 임신에 대한 이 차이는 사말이 보기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로 보인다. 임신의 당사자인 여성들이 굳이 남의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어머니는 자궁을 애기집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그것을 확신한다. 태가 들었다는 것은 한자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지금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임신'으로 대체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끊임없이 우리말을 남의 말로 대체하며 그것을 고상하게 사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고상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우리말을 버리는 언어생활로 귀결된다. 오히려 일찌감치 우리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로 살러간 교포들이 우리말의 원형을 더 잘 간직한 것을 수없이 본다. 연번에 사는 조선족들이 지금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풍속을 간직하고, 각 지역별로 사투리를 그대로 간직하여 1980년대 한중수교 때는 수많은 언어학자들이 가서 취재해 오기도 하였다. 그런 자료들을 보면 한국인이 얼마나 스스로 열등감에 절어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의 언어는 교포들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쓴다. 예를 들어 최근에 복고 열풍을 타고 화면으로 돌아온 인기 스타 중에 양준일이 그런 경우이다. 양준일이 공중파에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가운데 '집사람이 아이를 뱄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사말은 혼자 감탄했다. 우리나라에 사는 일반인들 같으면 <임신했다>고 하지, '아이 뱄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정책 입안자나 사회 운동가들에게 부탁 하나 하자면, 우리 말에 대해 뭘 할 때 제발 국어학자나 국어 단체에 자문을 좀 구해달라는 것이다. 방송국에는 언어자문단이 있다. 방송국 기자들은 혼자서 까불지 말고, 그들에게 좀 제발 물어달란 말이다. 아니다! '게릴라성 폭우'니, '이면도로'니 하는 뿌리 없는 말들이나 만들어내며, 그 놈들이 더 큰 잘못을 하기도 하니, 큰일이다! 우리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첫댓글 1930년 여무사와 남무사라고 표한 것이 눈에 띕니다. 어느 분의 제보로 알려드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무사는 활터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걸 시비 거는 놈들이나, 그런 놈들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협회나, 참, 누구를 탓해야 할지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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